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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설에세이

살인의 모든 단서와 용의자가 모인 시간 0시 : 0시를 향하여, 애거서 크리스티

by Caferoman 2024. 1. 30.

0시를 향하여, 애거서 크리스티

 

나는 잘 쓴 탐정 소설을 좋아하네. 그런데 말이지, 탐정 소설이란 게 대개 시작부터 잘못되어 있어! 살인에서 시작을 한다고. 하지만 살인은 그 결말일세. 이야기는 살인 사건이 있기 훨씬 전부터 시작되네. 때로는 수년 전부터 시작되지. 어느 날 몇 시, 어떤 장소에 어떤 사람들이 모이게끔 하는 원인과 사건들에서 시작하는 거란 말일세. - 책의 본문 중
“이 모든 정황이 하나의 지점을 향해 가는 거야. 그리고 정해진 시각이 되었을 때 정점으로 치닫는 거지.
0시라고 해 두세. 그렇지, 모든 것이 0시를 향해 모여드는 거야…….”
그는 자기 말을 반복했다.
“0시를 향해…….”

 

애거서 크리스티의 유명한 여타작품들과는 다소 색을 달리하는 '0시를 향하여'는 서스펜스 장르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스릴러가 범인이 누구인지를 인지하는 상태에서 출발하는 긴장감이라면 서스펜스는 그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의 긴장감에 집중하는데, 이 소설은 사건이 곧 벌어질 시점을 특정하고 (0시) 그 상황에 인물도 시간도 좁혀지기 시작하면서 읽는 내내 작중 인물 모두를 의심과 긴장 속에 바라보면서 이야기에 몰입하게 됩니다.

 

누가 그랬던가요? 스릴러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시한폭탄을 해체하는 1인칭 시점이라면 서스펜스는 주인공도 모르는 지뢰밭을 지나가려는 찰나에 바라보는 3인칭 관찰자 시점이라고요.

 

하지만 나는 언제나 계획을 세우는 데는 비상했다고요. 세상 일은 그렇게 되게끔 꾸미지 않는 한 일어나지 않는 법이에요! 당신은 가끔 나보고 멍청이라고 부르지만, 나름대로 나도 아주 영리한 면이 있다고요. 내가 마음먹은 대로 일이 일어나게끔 할 수 있으니까요. 때로는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을 세워야 할 때도 있어요. - 책의 일부

 

이 소설에서는 소설 속 이야기가 하나 등장하는데요, 전에 벌어졌던 어린아이의 살인 미수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면 이 소설의 핵심을 슬며시 관통합니다.

 

두 아이가 활과 화살을 갖고 놀고 있었어요. 그중 한 아이가 다른 아이의 급소를 향해 화살을 날려 보냈고 그걸 맞은 아이는 죽었지요. 심리 과정에서 아이는 완전히 넋이 나간 모습이었어요. 이 사건은 실수로 일어난 사고로 판결받았고, 잘못 화살을 쏘아 동무를 죽게 한 아이에게 동정이 쏟아졌지요.
그게 전부입니다. 유감스러운 사고였지요. 하지만 여기에 다른 측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고가 있기 얼마 전, 한 농부가 근처의 숲 속에 난 길을 우연히 지나게 되었답니다. 거기 조그만 공터가 있는데, 거기서 한 아이가 활쏘기를 연습하고 있는 것을 그 농부는 보았답니다.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 진상을 밝히려는 주인공들의 대화 가운데에서는 아래와 같은 구절이 등장합니다.

 

이 사건에는 냉정한 사전 계획과 우발적인 폭력이 뒤섞여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둘은 뒤섞일 수가 없는 겁니다!

 

이 소설의 구성은 어느 사건에서 시작하여 그와 관련된 구성 구성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진실을 밝히는 구조와 달리 사건을 중심으로 그와 연관된 모든 진실의 조각들이 하나 둘 모여가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살인이 벌어지고 난 뒤에 단서를 모으는 과정이 아닌 살인을 앞두고 한데 모인 단서와 증인들이 모두 모이는 과정에서 살인은 그 완결이 되는 상황에서 진상을 밝혀간다는 점이지요.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만큼이나 참신한 구성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저자의 다른 작품들이 더 마음에 들었던 지라 한 손에 꼽을만한 순위에는 들지 못하는 소설이었습니다. 물론 멋진 소설임에는 틀림없지만요.

 

살인 사건에 대한 기사, 또는 살인 사건에 바탕을 둔 소설을 읽을 때, 이야기가 살인 그 자체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것은 모두 틀린 겁니다. 살인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합니다. 살인은 수많은 다른 정황들이, 주어진 시각에 주어진 지점에서 한데 합쳐지면서 그 정점에 달해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지구상의 여기저기에 있던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모여들어 살인 사건에 연루됩니다. 여기 로이드 씨는 말레이에서 왔지요. 맥휘터 씨는 한때 자신이 자살을 시도했던 장소를 다시 방문하려는 생각으로 이곳을 찾았습니다. 살인은 그 자체로는 이야기의 종결입니다. 그것은 ‘0시’이지요.
- 책의 본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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