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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설에세이

[독서노트] 피를 마시는 새 1, 이영도

by Caferoman 2023. 10. 12.

피를 마시는새 1, 이영도

나가

세상은 가깝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이 세상과 맞닿는 표면에 살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표면은 중심에서 가장 먼 곳, 그러나 외부와 가장 가까운 곳이다. 이곳의 마지막이자 저곳의 시작인 그곳은 경계다. ... 그들은 삶의 중심에서 한가롭게 떠다니며 죽음을 먼 변경의 이야기로 치부해 버리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자신의 심장을 뽑아낸다. 뽑아낸 심장을 중심에 남겨 놓고 그들은 외부로, 표면으로 나아간다. ... 표면에 있는 그들은 깊숙한 자아의 모호한 메아리인 말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을 직접 상대방에게 전달하며 이를 니름이라 한다. ... 비록 중심에 있는 본질은 안전하지만 표면에 있는 그들은 더위에 끓어오르고 추위에 얼어붙는다. 그들은 나가라 한다.

 

도깨비

세상은 느리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오래된 원한이라는 말을 낯설어 한다. 그들은 짧고 강렬한 웃음으로 폭발시킨 다음 더 이상 구애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을 더 좋아하고, 심지어 그렇게 되기 어려운 일들도 그렇게 만들려 애쓴다. 그들의 사랑이나 우정 또한 짧고 빠르다. ... 그들은 세상이 느리게 행하는 일을 훨씬 빠르게 해치울 수 있는 힘인 불을 자유롭게 다룬다. 그들은 죽은 후에도 무거운 몸을 벗어서 더 가볍다는 듯 죽음에 앞장서 달려간다. 느린 죽음은 그들을 잡기 위해 꽤 오랫동안 그들을 추격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가장 빠를 때는 폭력과 피를 피할 때다. 그것들은 도저히 즐거운 일로 만들 수 없으니까. 그들은 도깨비라고 한다.

레콘

세상은 엉성하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계에 존재하는 결합 대부분을 어렵잖게 해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위라는 퍽 단단한 결합을 흙과 모래로 해체하고 싶다면 이들은 정이나 망치 따위는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단지 그래야 할 이유만을 요구할 것이다. 그 일을 수행할 도구는 그들에게 충분히 갖춰져 있다. 무지막지한 힘과 강철같은 몸, 지치지 않는 체력, 그리고 광적인 집착으로 오해받기 쉬운 집중력을 가진 그들은 바위를 손쉽게 흙과 모래로 분해한다. 그들은 다른 결합들도 어렵잖게 해체할 수 있다. 생명이라는 결합도 쉽게 해체하여 무생물로 분해한다. 국가라는 결합도 그리 어렵잖게 해체할 것이다. 그들에게 세상은 엉성하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상대적으로 훨씬 단단한 것에 주된 관심을 기울인다. 절대로 변하거나 퇴색하지 않는 단단한 사명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그것을 맹렬하게 추구하는 것이 그들의 삶이다. 그 추구는 실로 맹렬한데, 엉성한 세상은 부서질지언정 단단한 자신은 부서질 리 없다는 꽤나 정당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과 무관할 것 같은 이 강대한 자들에게도 두려움의 대상은 존재한다. 어떤 파괴력에도 해체되지 않고 거꾸로 감싸 안아 그들의 튼튼한 몸을 가라앉히는 물은 그들의 근원적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은 레콘이라 한다…….

 

“그 다음은 인간이 보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지.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자네 이야기를 먼저 듣고 싶군. 자네는 자신이 군령자가 아니라고 했고, 또 아무리 봐도 두억시니는 아닌 것 같으니 자네는 눈에 보이는 것처럼 인간임이 분명해. 그러니 말해 보게. 자네 생각에 세상은 어떠한가?”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내가 본 세상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피를 마시는 새는 저자가 창조한 네 선민종족에 대한 특징들을 언급하며 끝에 "그렇다면 인간은 어떠한가?"라는 질문과 함께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황제가 태양이 두 개라고 말하면 조신들은 걱정할 것이다. 황제가 미친 것이 분명하기에. 즈믄누리의 성주가 태양이 두 개라고 말하면 도깨비들은 걱정할 것이다. 태양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 분명하기에.’

 

당신은 도깨비들 사이에서 자랐고 나는 나가 황제를 모시고 있지만, 어쨌든 우리는 같은 인간입니다. 다른 종족 사이에서도 가능한 대화가 우리 둘 사이에서만 불가능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붓으로 이루어진 범죄라 하여 가볍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붓이 칼보다 강하다고 말하는 문필가는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붓으로 이루어진 범죄가 칼로 이루어진 범죄보다 더 큰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 억울해합니다. 바르지 못한 일입니다. 붓이 정녕 칼보다 강하다면, 그 책임 또한 더 무거워야 합니다. 등기부 위조는 붓으로 이루어지는 반역이라고 할 수 있으며, 나는 창검으로 이루어지는 반역에 비해 더 큰 처벌을 내리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같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붓에 보내는 칼의 경의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도 할 수 없죠. 남의 피를 마시면 오래 살 수 있지만 결국 지독한 피 냄새를 풍기게 되니까.” 틸러는 눈을 끔뻑거릴 수밖에 없었다. 틸러의 표정을 본 정우가 활짝 웃었다. “아, 미안, 미안해요. 이건 저를 귀여워해 주셨던 어르신이 들려주신 이야기지요. 당신도 어쩌면 그분의 성함을 알 거예요. 비형 스라블이라는 분인데, 알아요?” “물론입니다. 굉장히 유명한 분이지요. 승천한 티나한의 친구분이잖습니까.” “비형 어르신은 해몽서를 쓰고 계세요. 그 일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온갖 옛이야기를 많이 수집하셨어요. 어르신은 언젠가 제게 키탈저 사냥꾼의 옛이야기를 들려주신 적이 있지요.” “무슨 이야기입니까?” 정우는 새카만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 구절을 통해 전작 눈물을 마시는 새의 주인공 중 하나인 비형 스라블은 어르신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가운 티나한의 이름과 함께 이 작품이 연대기 상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철저한 주변인은 철저한 중앙인과 같아. 주변에 머물기 위해서는 중앙에 머물기 위한 것과 똑같은 적극성과 노력이 필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떠밀려 다니게 돼. 주변에서 중앙으로, 중앙에서 주변으로. 아이저 규리하가 그랬듯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뿐이야, 뭄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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