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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설에세이

나가, 도깨비, 레콘 그리고 인간 : 눈물을 마시는 새 1, 이영도

by Caferoman 2023. 6. 14.

셋이서 하나를 상대한다 : 눈물을 마시는 새 1, 이영도

서신의 아래쪽엔 서명 대신 기묘한 낙서 같은 것이 적혀 있었다. 사빈은 고개를 들었고 그러자 성주는 설명했다. “키탈저 사냥꾼들의 사냥 기호야. 흑사자와 용(龍).” “흑사자와 용이오?” “둘 다 나가에 의해 멸종한 것들이지. 키탈저 사냥어로 읽으면 케이건 드라카가 되네. 그 친구가 사용하는 이름은 거기서 따온 걸세.”

 

소설에서 등장하는 첫번째 주인공은 나가를 잡아먹는 키탈저 사냥꾼 "케이건 드라카"입니다. 그 시작은 여느 판타지 소설에서 익숙한 종족으로 시작해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판타지 세계관을 바탕으로 쓰인 타자(타이핑하는 자)의 또 다른 시리즈물로 착각하기 쉬우나 이어서 등장하는 범상치 않은 종족들(도깨비와 레콘)을 통해 무언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륜.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지만, 우리는 그 남자가 준 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냐. ‘아버지’라는 그 우스운 단어를 꼭 사용하고 싶다면, 너는 어머님이 드신 동물들과 마신 물까지도 모두 아버지라고 불러야 해. 니름도 안 되는 일이잖아?>

 

이어서 묘사되는 나가라는 종족은 우리가 인도 신화에서 유래된 종족으로 이 소설에서 다루어지는 이 종족은 몇 가지 특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소리로 말하지 않고 의식의 전달을 통해 니르는 종족, 짐승을 산 채로 잡아먹지만 나무에게는 애정을 넘어서 숭배에 가까운 집착을 보이는 종족, 심장을 적출 후 보관하여 불사에 가까운 수명을 가지며 극한의 재생력을 보이는 종족, 모계중심 사회에서 남성의 지위는 그저 출산을 위한 체액을 제공하는 존재에 불과한 종족. 이러한 특이점을 가진 종족 가운데 심장 적출을 거부한 어느 남자 나가를 주인공으로 하여 그를 구출하여 나가들이 살기 힘든 추운 지역까지 인도하는 세 종족(인간, 레콘, 도깨비)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셋만이 하나를 상대한다는 옛말 아시오?”
“예! 압니다. 지상에 있는 네 선민 종족들 중 하나를 상대하기 위해선 다른 세 선민 종족이 모두 협동해야 된다는 뜻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우린 나가 한 명을 구출하기 위해 세 종족이 모였군요. 이것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그런데 그 말에는 약간 고풍스러운 설명이 더 붙어 있소. 하나를 상대하기 위한 셋이 모였을 때 그 셋은 각자 길잡이, 요술쟁이, 대적자가 되어야 하오. 아마 당신이 요술쟁이일 거요.”
<북쪽으로, 계속 북쪽으로 달려가. 아주 거대한 강을 만날 거야. 무룬 강이지. 거기서 세 명의 불신자를 만나게 돼.>
<불신자라고!>
<그래. 도깨비와 인간, 레콘이야. 너를 안내할 자지. 노래를 불러야 해.>
<그게 신호야. 그러면 그 불신자들이 너를 데리고 한계선을 넘을 거야. 내 배낭을 가져가. 그 속에 도움 될 물건들이 있어. 하인샤 대사원의 쥬타기 대선사(大禪師)를 만나. 그 인간이 해야 할 일을 가르쳐줄 거야.>

 

소설에서 등장하는 네 종족 외에 그들간의 서사에서 중요한 조연을 담당하는 종족이 셋 있습니다. 두억시니와 흑사자 그리고 용입니다. 여기서 두억시니는 각기 다른 신을 가지고 있는 네 종족과 달리 신을 잃어버린 종족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흑사자와 용은 모두 나가에 의해 멸종위기에 처해져 있는 희귀한 존재로 등장합니다.

 

용은 너무 위험하다. 나가의 최대 적수라 할 수 있는 도깨비들은 피에 대한 공포 때문에 투쟁을 싫어한다.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운동이 피를 볼 일이 거의 없는 씨름이라는 점은 유념할 만한 사실이다. 하지만 용은 그런 공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도깨비보다 더 거대한 불꽃을 일으킨다. 다른 나무들에겐 최악의 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무들의 적은 나가의 적이다.
“자기가 천년 동안 사유했지만 아직 대답을 알지 못한 것에 대해 대답해 주길 원하는군요. 그런데 그게 좀 까다로운 질문인데요.” “무슨 질문인데요?” 륜은 미간을 찡그렸다. “두억시니가 왜 신을 잃었는지 알고 싶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어. 조심하길 바라. 두억시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단정할 수 없으며 무엇에도 놀랄 필요가 없어.”

 

이 소설을 통해 처음 소개되는 다소 생소한 종족인 레콘은 어느 종족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엉뚱하게도 물에 대한 극한의 공포를 가지고 있는 종족으로 묘사됩니다. 나가가 무서워하는 것은 불, 도깨비가 무서워하는 것은 피인데 단순한 혐오를 넘어서 레콘은 상대가 조그만 수통하나를 들고 협박해도 금새 달아나버리고 마는 극한의 공수증을 보입니다.

 

“이 마귀야! 감히 왕을 농락하려 한 죄값을 받아라!” 그리고 선지자는 커다란 물통의 마개를 뽑았다.
케이건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망치셨겠군.”
티나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건은 ‘그런 바보 같은 짓이 어디 있느냐, 수치를 알아라, 병신 같은 녀석아. 믿고 맡겼더니 겨우 물 몇 방울에 놀라 도망치냐.’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다만 조용히 질문했다. “그래서, 그다음엔?”.
레콘이 물을 제일 두려워한다고 해서 레콘에게 물을 뿌리는 것은 천하에 둘도 없는 바보짓이다. 아무 해도 끼치지 못하면서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복수자만 만들 뿐이니까
“너 이 새끼, 그걸 뿌렸겠다! 내게 감히 그걸! 너 오늘 뼈 개수 두 배로 늘어나는 줄 알아라!”

 

이 소설에서 묘사되는 도깨비라는 종족은 한국인에겐 매우 친숙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이 죽었을 때 영혼이 분리되어 어르신이 되는 설정, 피와 살생을 두려워하고 호기심이 많으며 불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종족, 그들의 일상적인 인사가 "좋은 꿈 꾸셨습니까?"이며 씨름을 좋아하는 종족이라는 점은 타자(저자)의 독창적인 세계관에 큰 특징을 부여합니다.

 

도깨비들에게 곡물을 재배하는 법을 가르쳤다는 전설 속의 인간의 이름이 킴이었기에, 도깨비는 모든 인간을 킴이라고 부른다. 자칫 혼란스럽기 쉽지만 그 속엔 원래 그런 경의가 담겨 있다. 지금에 와서는 그저 단순한 대명사처럼 되어버렸지만.

 

소설에서 이렇게 독특한 세 종족을 다루면서 자연스럽게 그와 비교되는 인간종족의 특성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비교해 보고 생각해 보게 됩니다. 다른 세 종족에 비해 특이하다 할 만한 강점도 약점도 없는 인간이라는 종족이 "눈물을 마시는 새" 즉 타인의 눈물을 먹으면서까지 얻으려고 하는 권력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보이는 점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면서 인간이 가지는 가장 큰 특성 중 하나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네 마리의 형제 새가 있소. 네 형제의 식성은 모두 달랐소. 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 독약을 마시는 새, 그리고 눈물을 마시는 새가 있었소. 그중 가장 오래 사는 것은 피를 마시는 새요. 가장 빨리 죽는 새는 뭐겠소?”
“눈물을 마시는 새요.”
“그렇소. 피를 마시는 새가 가장 오래 사는 건, 몸 밖으로 절대로 흘리고 싶어 하지 않는 귀중한 것을 마시기 때문이지. 반대로 눈물은 몸 밖으로 흘려보내는 거요. 얼마나 몸에 해로우면 몸 밖으로 흘려보내겠소? 그런 해로운 것을 마시면 오래 못 사는 것이 당연하오. 하지만.”
“하지만?”
“눈물을 마시는 새가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고 하더군.”

 

소설의 1권은 "눈물을 마시는 새"가 이 책의 제목이 된 이유를 설명합니다. 함께 목적지로 향하는 길에 일행인 네 종족은 모든 사람의 눈물을 먹고 왕이 되려는 자들을 만나면서 눈물을 마시는 새가 되려는 수많은 왕을 참칭 하는 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왕은 도대체 뭐죠? 저는 정말 모르겠어요. 왕은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저 제왕병 환자들의 목표인가요, 아니면 그 제왕병 환자를 왕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자들의 목표인가요?”
“눈물을 마시는 새요.”
“왕은 눈물을 마시는 새요. 가장 화려하고 가장 아름답지만, 가장 빨리 죽소.”
“왕이 다른 사람의 눈물을 마시는 사람인가요?”
“왕이 사람들의 눈물을 다 마셔버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눈물 없는 비정한 자들이 될 수 있거든. 그게 왕의 해악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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