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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설에세이

외국어 공부가 취미인 사람들 feat. 아무튼 외국어, 조지영

by Caferoman 2023. 6. 21.

외국어 공부가 취미인 사람들의 이야기 : 아무튼 외국어, 조지영

외국어 3개월이라는 것은 바이엘 상권의 반절 정도의 진도에서 피아노 배우기를 그만두는 것과도 비슷하다. 대략 악보는 볼 수 있지만(심지어 다장조), 피아노를 친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싶은 바로 그런 무렵에 피아노를 그만두고, 이번에는 첼로를 해볼까 두리번대는 식이다.

 

제대로 마스터한 외국어는 없지만 이 언어 저 언어를 깨작깨작 거리며 배우기를 좋아하는 한 사람의 에세이입니다. 이 책은 뭔가 깨달음이나 꿀팁을 주는 책은 아니지만 같은 언어 덕후로서 즐겁게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었던 책입니다. 저 역시 저자처럼 이 외국어 저 외국어에 집적대며 외국어를 배워왔는데요, 그간의 대략적인 여정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2004

  • 졸업/취업을 목적으로 영어공부를 시작 : 토익점수 700을 겨우 넘김

2005 - 2007

  • 한국국제협력단(KOICA) 소속으로 스리랑카에 파견되면서 외국어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함
  • 파견된 국가의 공용어인 싱할라어를 공부하기 시작, 귀국을 앞둔 2년차 즈음에는 현지어로 전공 수업과 의료봉사 통역이 가능한 수준(주관적인 평가로는 Intermediate 정도)으로 싱할라어를 익힘
  • 영국 문화원(British Council)에 다니면서 집에서는 독학으로 Oxford 출판사의 Grammar in use 시리즈 전권(Basic ~ Advanced)을 공부하면서 영국 스타일의 영어를 공부함
  • 스리랑카에 있는 동안 Goethe Institut에 다니며 B1.3 정도 단계까지 독일어를 공부함(현재는 대부분 망각)
  • 독일어를 공부하면서 뜬금없이 프랑스어에 대한 관심이 생겨 Alliance Française에 초급반에 강의를 들으며 아주 기본적인 프랑스어의 맛만 살짝 보게 됨

2008

  • 귀국하자마자 토익/토익 스피킹 시험을 보고 860 / 180(Level 7) 점수를 획득
  • 교양 수업으로 초급 중국어를 신청했다가 뭔가 중국어에 대한 매력을 느끼지 못해 2주 듣고 바로 수강철회함

2013

  •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출장을 가게 되어 독학 러시아어 책을 사서 키릴문자 읽고 쓰는 법만 익힘(간판을 보고 길을 찾아다니기 위한 생존의 목적)

2018

  • 일본 여행을 처음 가보고 일본어를 모르는 상태에서 식당에서 원하는 음식을 제대로 주문할 수 없는 어려움을 느끼고 일본어를 공부하기로 결심. JLPT N3정도만 따볼 목적으로 히라가나/가타카나부터 일본어 공부를 시작

2019 - 2022

  • JLPT N3 공부를 하다보니 '어? 여기서 조금만 더 하면 N2도 따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어 더 공부를 하다가 2021년 N2를 합격하고 같은 과정으로  N1까지 공부를 하면서 2022년 N1을 합격

2023

  • 매번 매력을 못느껴서 손이 안 가던 중국어 공부를 시작 HSK 4급 합격을 목표로 공부 중

 

사실 당장 업무에서 해당 언어를 쓸 일이 없다면 구글 번역이나 파파고와 같은 번역 어플들이 워낙 잘 되어 있어서 따로 시간을 들여 외국어를 공부할 필요성을 느끼기 쉽지 않은데요, 저는 저자의 경험처럼 언어 자체가 가지는 뉘앙스와 미묘한 차이 등에 매력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주로 외국어를 활용하는 영역도 좋아하는 소설의 원서를 찾아서 읽어보거나 여행지에서 번역어플들이 할 수 없는 수기로 작성된 메뉴판을 읽고 주문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해당 언어를 쓰는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까요?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에서 수학했고, 후일 러시아어 통역을 오래 했던 일본의 에세이스트 요네하라 마리는, 열네 살에 일본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열등감’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 감정이 무엇인지도 몰랐다고 생전에 술회했다. 심지어 체코에서는 ‘어깨 결림’이라는 말도 들은 적이 없으니, 말이 없으면 신체 감각도 없게 마련이라고 했다 - 책의 본문 중

 

중국어 공부를 하며 다시 보고싶은 영화 : 와호장룡

<와호장룡>을 극장에서 보고 나왔을 때, 나도 리무바이처럼 수련과 용처럼 중력을 가볍게 이탈하여 대나무 숲을 날아다니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 만큼, 멋짐이 대폭발하는 우아한 무협의 세계에 반해버렸다. 과연 <와호장룡>은 그해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을 받았고, 그때까지 미국에서 가장 흥행에 성공한 외국 영화라는 얘기도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토록 멋진 영화가 정작 중국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심지어 “중국 영화가 아니다”라는 평가도 있었다. “오리엔탈리즘을 헐리우드식으로 포장했다”는 혹평에도 시달렸다. 나는 이 멋진 영화가 본토 사람들에게 외면받는다는 사실이 좀 아쉽다 못해 속상했다. 미국 자본으로 만들어져서 그런 건가? 이안 감독이 대만 출신이라서 그런 건가? 여러 가지를 추측해보며, 대륙의 안목 없음(?)을 이해해보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이런 박한 평가가, 실은 작품과는 무관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잠시 중국어를 가르쳐주던 화교 후배가 <;와호장룡>이 대륙 사람들에게 무시받았던 중요한 이유 하나를 알려주었다. “언니, <와호장룡>은 중국어가 너무 엉망이에요. 중국어 제대로 하는 배우가 장쯔이 하나였어요.” 그 순간 내 머리 위로 말풍선이 떠 있었다면 물음표가 열 개쯤 둥실둥실 떠다녔을 것이다. 중국 영화에서 중국어가 엉망이라니…? “주윤발은 홍콩 사람이니 광둥어 네이티브고, 장첸도 대만 사람이라 만다린은 좀 어색해요. 그중에 최고는 양자경인데, 양자경은 중국어 정말 못하는 것 같아요. 말레이시아 사람이라 그런가. 외국 사람이 중국어 하는 느낌? 저도 사실 중국어 때문에 몰입이 안 되더라구요.”
- 책의 본문 중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액션과 영상미가 엄청나게 인상적이었던 영화 <와호장룡>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어차피 영상과 자막으로만 영화를 감상하던 중알못 입장에서는 전혀 배우들의 의 어색한 언어가 문제가 되는 줄 몰랐거든요.

 

양자경이 만다린을 못하는지 처음 알았고, 말레이시아 사람인 것도 매우 신선했다(미스 말레이시아 출신이다). 그녀는 광둥어는 제법 하는 편이었지만, 처음에 영화 데뷔하던 시절에는 그나마 그 정도의 광둥어도 제대로 못했다고 한다. 오히려 영국에서 오래 거주한 편이라 영어가 익숙했다니, 반전이라면 반전이었다. 아무튼 주윤발과 양자경의 로맨스가 영화의 무게 중심이요 중력과도 같은 핵심적인 부분이었는데, 두 사람이 주고받던 말들이 그렇게 어눌하고 어색했다니…. 중국에서 흥행이고 비평이고 모두 실패한 이유가 무엇인지 얼추 알 것 같았다. 우리가 미드 <로스트>의 대니얼 대 킴의 한국어 열연에 결코 ‘햄보칼 수 없었던’ 이유와 다르지 않았다. 궁금해서 영화 제작기를 찾아보니, 주윤발은 대사 처리가 안 된다고 한 장면을 스물여덟 번까지 다시 찍었고, 양자경도 마찬가지였으며, 그녀는 특히 한문을 몰라서(!) 고생을 했다고 한다. 심지어 무술팀들도 홍콩팀과 중국팀, 대만팀들로 함께 구성이 되었는데 의사소통이 어려워 제작 과정에서 예민한 상황이 많았다는 얘기까지. 거의 바벨탑 건설의 현장이었다고나 할까. 게다가 이안 감독과 같이 시나리오를 쓴 사람은 미국 사람이었으니 이런 재난 상황에서 이토록 놀라운 작품이 나왔다니, 영화 외적으로도 영화적인 스토리가 이어진 셈이다.
- 책의 본문 중

 

아주 기본적이긴 하지만 기초 수준의 중국어를 익힌 입장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된다면 어떤 느낌 일까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같은 외국어 덕후로서 나와 비슷한 취미를 가진 작가의 에세이들을 보는 것은 꽤 반갑고 즐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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