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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역사

커피 한잔으로 알아보는 세계사 : 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 우스이 류이치로

by Caferoman 2022. 10. 12.

세계사를 뒤흔들었던 커피의 위용 : 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 우스이 류이치로

세계를 뒤흔든 커피라는 음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커피에 매혹되었다. 식용 음료로 군대에 커피를 맨 처음 보급한 이가 바로 나폴레옹이었다는 사실이 그 점을 증명해준다. 나폴레옹은 왜 맛도 없고 색깔도 거무튀튀한 그 독특한 음료에 매료되었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영양분이 거의 없는데도 왠지 힘이 나게 하는 음료였기 때문이다.
커피는 유럽은 물론이고 전 세계를 제패하고 싶은 나폴레옹의 야망과 뒤얽히며 프랑스 산업 전반을 비약적으로 성장시켰으며, 머지않은 미래에 유럽과 전 세계 경제를 송두리째 바꿔놓는 ‘산업혁명’의 근간이 되었다

 

유럽발 제국주의가 횡횡하는 분위기 가운데 매력적인 음료로 자리 잡은 커피가 상당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역사의 요소요소에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대략적인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작 커피 때문에 역사가 움직였다고?'라고 할 수 있는 다소 과장된 면이 없잖아 있지만 당시 볶은 커피콩에서 시작된 이 파격적인 음료는 유럽/중동인들의 삶 전반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저자는 국가별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슬람 수피교도가 ‘욕망을 억제하고 수행에 정진하기 위해’ 즐겨 마셨던 독특한 ‘검은 음료’. ‘커피’라는 이름의 이 음료는 역설적으로 17세기 유럽 상업자본가와 정치 권력자의 욕망을 자극하며 유럽과 전 세계 문화를 바꿔놓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혹은 중동의 예멘을 커피의 기원으로 보는 설이 가장 유력한 가운데 저자는 커피라는 음료가 어떠한 중동의 문화적 배경에서 널리 확산되었는지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회의 때 카이르 베그는 커다란 그릇에 카와를 담아 왔다. 주요 의제는 두 가지였다. 첫째, 대중이 종교를 구실로 카와를 마시는 일을 금지해야 하는가. 둘째, 카와 자체를 금지해야 할 것인가. 첫 번째 의제가 금지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난 후 의견이 갈렸다.... 오랜 논의 끝에 카와가 심신에 피해를 주는지 주지 않는지 의학적 검증을 받아보는 방향으로 정해졌다.

 

결과적으로 커피는 하마터면 종교재판에서 사장될 위기를 모면하고 중동을 넘어 전세계에서 사랑받는 음료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당시 사람들도 커피의 치명적인 매력을 거부할 수 없었나 봅니다. "이 좋은, 맛있는 음료를 못 먹게 된다고?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된다!"라는 위기의식이 자리 잡고 있지 않았을까요?

 

카이르 베그는 미리 대기시켜 둔 페르시아인 의사 두 명을 불러들여 전문적 의견을 구했다. 학식이 높은 두 의사는 미리 준비해둔 답변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카와는 차고 건조한 성질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것을 마시면 신체 균형을 깨뜨릴 우려가 있다고 했다.
메카의 총독 카이르 베그 알미마르는 자신이 원하는 결론을 얻었으며, 이후 본격적 커피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커피 탄압은 오래가지 않았다. 회의에서 커피 전면 금지에 찬성하지 않은 온건파 몇 명이 카이로에 의사록을 보내 중앙정부의 의견을 물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카이로 중앙정부는 공식 답변을 보내 온건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카이로 중앙정부는 무리하게 커피를 탄압한 카이르 베그를 해임시켰다. 회의에 증인으로 출석한 두 의사는 그 후 메카를 떠나 카이로로 이주했다. 그리고 카이로가 오스만 제국에 정복되었을 때 그 두 의사는 오직 ‘신만이 아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1517년의 일이다. 권력에 아부하는 어용학자에게 내린 엄격한 판결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카이르 베그의 노골적인 탄압을 이겨낸 메카는 그야말로 ‘커피의 메카’가 되었다. 

 

이렇게 이슬람 세계의 검증을 거친 커피는 바닷길을 통해 전세계에 소개되는데요, 당시 유럽 선박이 직접 기항을 허락받아 커피를 매입할 수 있는 곳이 모카항이 유일했기에 ‘아라비아 모카’는 유럽에서 예멘 커피를 대표하는 명칭이 됩니다.

 

모카 커피가 암스테르담에 정기적으로 수입된 것은 1663년의 일이다. 메카와 메디나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커피에 관한 지식과 습관은 인도와 인도네시아의 이슬람권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그런데 과연 누가 인도와 인도네시아 시장으로 커피를 싣고 갔을까? 우선, 메카 순례자 무리에 끼어 사막을 가로지르는 카라반 부대를 꼽을 수 있다. 그밖에 바닷길로 커피를 나르는 방법도 있었다. 그 동인도 항로를 마치 주머니 속 제 물건인 양 마음껏 활용한 주체가 바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였다.

 

한편 네덜란드에서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공급되고 있는 커피를 다른 식민지 국가에 옮겨 심어 막대한 이익을 취하게 됩니다. 이는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가 주장 대로, “원시공산주의 단계에 있는 촌락이 근대 모습을 갖춘 한 나라를 위한, 착취와 전제를 위한 광범위한 기초를 제공하게” 된 것인데요, 커피 생산지의 확산에는 식민지주의 아래에서 침략자와 토착민 사이의 빈부격차가 발생하고 토착민들이 자연발생적인 몽매한 단계에 정체되게 하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습니다.

 

커피하우스, 다양한 사람들 의견이 공론화되는 장이 되다

사람들이 커피하우스를 찾는 이유를 반드시 커피를 마시고 싶어서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커피를 마시고 싶은’ 이유 말고 다른 어떤 이유가 있을까? 가장 사적인 집을 떠나서, 혹은 공적인 장소를 떠나서 그저 편안한 한때를 혼자, 아니면 동료들과 함께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사람을 보고,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면 편하게 대꾸하면서,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즐기면 되고 지루하면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런 공간 자체가 지닌 매력이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저자의 표현대로 커피는 자연적인 음료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구석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창고에 쌓아둔 커피콩을 굶주린 쥐조차 거들떠보지도 않을 정도이고 어린아이를 포함해 처음부터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점인데요, 그런 커피가 대량으로 유통되고 소비되게 하기 위한 상업자본의 고민 끝에 나온 것이 바로 커피하우스라는 점을 책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17세기 후반 무렵의 상황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커피하우스를 다목적공간으로 활용해 급성장을 이루는 셈이 되었다. 커피하우스는 여러 장점을 갖고 있었다. 우선, 한 잔의 커피값만 지불하면 커피를 마시면서 몇 시간이고 머무를 수 있었다. 또 매일 커피를 마신다고 해도 사무실 임대료보다 훨씬 저렴하기 때문에 무리하게 임대료를 지불하며 사무실을 얻을 필요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업무 파트너가 죽치고 앉아 있는 커피하우스가 어디인지를 그 업무와 관련된 모든 사람이 알게 하면 될 일이다. 커피하우스에는 최신 정보가 가득 실린 정기간행물, 우편물 등 업무에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다. 그런 터라 주식중개인, 각계 정보통과 런던의 내로라하는 엘리트들이 커피하우스로 부나비처럼 몰려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커피 한잔 값을 지불하고 죽치고 앉아있는 죽돌이들에 의해 커피하우스는 모반과 정치적 허위 선전, 인신공격의 온상이 되고 심지어 영국 정부는 커피하우스 폐쇄를 명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17세기 유럽의 커피하우스는 ‘대화(conversation)’ 기법이라는 시민사회의 필수 기술을 개발하는 일에 있어서 그야말로 획기적인 역할을 해냈다. 그때까지 사람들이 대화를 나눌 만한 장소로 꼽은 곳은 무도회장, 극장, 공원, 마티네(Matine, 연극이나 오페라, 음악회 등의 주간흥행), 만찬모임 등 이른바 상류층을 위한 사교장이었다. 이들 고전적인 장소와 커피하우스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커피하우스에는 신분제 틀을 벗어나 대화할 수 있다는 특수성이 있었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과 한데 어울려 대화하는 일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고객층이 다양하다는 점이 커피하우스의 매력이었다. 그리고 그런 바탕 위에서 비로소 사회정세나 정치 동향, 거래 성사에서 문예활동에 이르는 변화무쌍하고 흥미진진하며 예측하기 어려운 소통과 토론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커피하우스에서는 궁정사회의 답답하고 굼뜨고 바보 같은 정중함은 쓸데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곳에서는 정보와 정보가 충돌하며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정보는 공기의 저항을 이기고 힘차게 창공을 나는 새처럼, 물의 저항을 이기고 상류를 향해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했다. 커피하우스에서 사람들이 터득한 ‘말하기’는 ‘사고’로 승화되어 새로운 시대정신을 일깨워주었다. 그러므로 당대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커피하우스에 즐겨 다닌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여성들의 관점에서 보면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영국의 커피하우스는 심각한 두가지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일단 커피하우스에 들어가면 수 시간을 죽치고 있는 사이 방치되는 (남편들의) 생업이고 다른 하나는 커피하우스가 오로지 남성을 위한 제도이자 공간이었다는 점이다. 여성이 참여하지 않는 커피하우스의 시민생활은 근대시민사회가 철저히 ‘남성 위주 사회’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커피

아프리카 서해안에 집결한 흑인노예는 그리스도교 목사의 축복을 받은 후 서인도제도의 플랜테이션으로 실려 갔다. 노예를 싣고 간 배는 돌아올 때 설탕, 담배, 럼주, 인디고, 커피를 실어 유럽으로 날랐다. 한데 충격적인 것은, 흑인 노예를 옮기는 과정에 드 클리외가 커피나무를 옮길 때와 같은 세심한 주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당시 배에 탄 흑인 가운데 무려 3분의 1이 배 안에서 사망했다고 하니 살아남은 흑인 노예가 얼마나 비참한 환경을 견뎌냈을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추정하기로는,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1,500만 명의 흑인 노예가 실려 갔지만 18세기 말 아메리카 대륙에 살아남은 흑인 노예는 300만 명뿐이었다고 한다. 서인도제도의 대지는 처음부터 ‘니그로의 땀’을 받아들여 유럽인을 위한 ‘신의 음식’을 풍성하게 한 셈이다.

 

식민지주의가 팽배하던 시절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커피 재배를 위해 아프리카 흑인들을 주요 노동력으로 활용했습니다. 이토록 맛있고 훌륭한 음료가 전세계로 확산되기까지 슬픈 과거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리해보면 이 책은 커피의 발원지인 아프리카와 아라비아반도 국가들, 계획적 플랜테이션으로 인해 커피를 생산하게 된 신대륙을 포함한 커피 벨리의 국가들, 끝으로 주요 소비자였던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삶이 커피라는 음료로 인해 어떠한 변화를 겪어왔는가를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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