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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설에세이

은하영웅전설, 다나카 요시키 : 엘리트의 독재와 중우정치 사이의 딜레마

by Caferoman 2021. 8. 20.

독서노트

결단을 내리고 싶지 않을 때 내리지 않아도 된다면 인생은 장밋빛으로 가득할 것이다. - 2권 본문 중

'정치 따위 나하고는 관계 없어.'라는 한 마디는 그 말을 한 사람에 대한 권리 박탈 선언이다.
정치는 자신을 경멸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복수하는 법이다' - 10권 본문 중

 

제국주의와 민주주의의 격돌

"그것은 제가 한 말 치고는 드물게 진중한 발언이었습니다.
국가가 세포 분열해 개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의지를 가진 개인이 모여 국가를 구성하는 것인데,
어느 쪽이 주이고 어느쪽이 종인지, 민주 사회에서는 자명한 이치 아닙니까?" - 양 웬리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막대한 피를 흘리고 국가경제를 파국으로 몰아넣고 국민들의 고혈을 짜내야한다면,
정의란 탐욕스러운 신과도 같다. 끊임없이 산 제물을 요구하며, 만족할 줄을 모르는 것이다. - 1권 본문 중


국민의 고혈을 짜내어 성장하는 국가와, 국민을 희생하여 승리하는 전쟁은 의미가 있을까?
그 성과의 정도에 관계 없이 불합리한가?
이 책은 단순하지만 은하제국(제국주의) VS 자유행성동맹(민주공화제) 직관적인 네러티브를 통해 국가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합니다.

 

"조직에게 2인자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2인자란 무능하다면 무능한 대로, 유능하다면 유능한 대로 조직을 해치게 마련입니다. 1인자에 대한 부하의 충성심에 대용품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 오베르슈타인

역사를 돌이켜 보았을 때, 민중이란 본래 자주적 사고와 그에 수반한 책임보다도 명령과 종속과 그에 따른 책임 면제를 선호한다. - 1권 본문 중

'법에 따르는 것은 시민의 당연한 의무다.
그러나 국가가 스스로 만든 법을 등지고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려들 때, 그에 맹종하는 일은 시민에게 있어선 오히려 죄악이지. 왜냐하면 민주국가의 시민에게는 국가가 저지르는 죄나 오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비판하고 저항할 권리와 의무가 있기 때문이야' - 양 웬리


또한 이 구조를 통해 엘리트에 의한 독재와 중우정치(眾愚政治)라는 난해한 이지선다 선택지를 제시하며 '최선의 정치제도라는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의심을 품게 합니다.

정치권력이 매스컴과 결탁하면 민주주의는 자정능력을 잃고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게 된다 -프레데리카 그린힐

 

전략과 전술에 대한 고찰

전술이란 전장에서 승리를 얻기 위해 병사를 움직이는 기술이다.
전략이란 전술을 가장 유효하게 살리기 위한 조건을 갖추는 기술이다. - 2권 본문 중

'전술은 전략에 종속되며, 전략은 정치에, 정치는 경제에 종속된다는 얘기다' - 양 웬리


이 소설에서 언급된 전략과 전술의 개념은
거시적인 것과 미시적인 것의 비교
수단과 목적의 비교
비전과 실행의 비교
책략과 기술의 비교 등등 복합적인 의미로 혼용되고 있는데요,

 

"올라야 할 산을 정하는 것이 정치이다.
어떠한 루트를 이용해 올라갈지를 정하고 준비를 갖추는 것이 전략이다.
그리고 주어진 루트를 효율적으로 오르는 것이 전술이다." - 유수프 토패롤


동아시아문화권에 속한 우리에게 일본 저자의 번역은 별 수고로움 없이 이해될 수 있지만 그 외의 언어에서는(전략과 전술은 각각 영어로 Stretegy와 Tactics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여러차례 강조해서 설명된 이 전략과 전술에 대한 개념에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그런데 이 소설이 얼마나 동아시아 외의 언어로 번역되어서 출간되었는지는 모르겠네요.)

 

직무에 불성실한 군인일수록 전략을 경시하고 전술 레벨에서 도박을 하려하지.
더욱 더 무능하고 불성실한 군인이 되고 보면 정신론으로 전략의 미비와 전술의 불완전함을 얼버무리려고 한다.
식량이나 탄약도 보급해주지 않으면서 전선의 병사들에게 투지로 적을 이기라고 강요하는 거다.
결과적으로는 정신력으로 이겼다는 예도 있지. 하지만 처음부터 정신력을 계산에 넣고 이긴 사례는 역사상 하나도 없어' - 양 웬리

 

금수저 엄친아 라인하르트와 먼치킨 양웬리

세간에 공개된 이 소설의 기획의도나 구성은 삼국지를 연상시킵니다만 (은하제국 - 자유행성동맹 - 패잔자치령) 실제로 대부분의 이야기는 2명의 남자주인공, 은하제국의 라인하르트와 자유행성동맹의 양웬리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전례가 없었던 작전에 실적이 어디 있단 말인가. 실적은 이제부터 치를 전투에서 올려야 할 것 아닌가.' -라인하르트

'체제에 대한 민중의 신뢰를 얻으려면 두 가지만 있으면 된다. 공평한 재판과 마찬가지로 공평한 세금 제도, 다만 그뿐이다' -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참지 말아야 할 때 참고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다면 상대는 한 없이 기고만장해져 자신의 이기심이 그 어떤 경우에도 통용된다고 믿게 될 것이다. 젖먹이와 권력자의 생떼를 오냐오냐 받아주어서는 좋은 결과를 볼 수 없다. - 3권 본문 중

지장이니 맹장이니 하는 말이 있다. 이러한 구분을 넘어 부하에게 불패의 신앙을 안겨 주는 지휘관을 명장이라 한다. - 1권 본문 중


전임 황제의 왕비가 된 누나찬스로 좋은 교육과 기회를 얻은 뒤, 이후로는 전장에서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며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은하제국의 수장 라인하르트는 나름 로열 페밀리라는 금수저의 이득을 가지고 시작했지만 그에 준하는 능력 또한 갖추고 있는 엄친아로 등장합니다.
여색을 밝히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환관의 아들찬스로 정무를 시작해 자수성가한 조조를 오마주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급과 정보다. 이 두 가지가 없으면 전투는 벌일 수도 없어.
전쟁을 굳이 하나의 경제 활동에 비유한다면 보급과 정보는 생산이고 전투는 소비에 해당한다'
'세상에서 가장 유해한 바보는 보급 없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바보다' - 양 웬리

'위인전이니 영웅전이니 하는 걸 어린아이들에게 읽히다니 어리석은 짓이야.
선량한 인간에게 이상한 사람을 본받으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 양 웬리


반면 전쟁에 있어 먼치킨급의 능력을 가진 사기캐릭터이지만 정작 자신은 쿨하고 시크하게 권력욕심 없이 은거하려는 성향을 가진,
인물의 재능은 출중하나 주변 환경이 받쳐주지 못하는 비운의 2인자로 묘사되는 자유행성동맹 소속 양웬리는 마찬가지로 삼국지 촉나라의 제갈공명을 연상시킵니다.

 

소설 속 유일한 두 영웅의 독대 장면

소설의 시대 배경이 배경이니만큼 정작 두 영웅은 각자의 함선에서 전투를 지휘했을 뿐 독대하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일이 없었는데요. 소설속에서는 이 둘의 만남과 거기서 이루어진 짧은 대화가 딱 하나 존재합니다.
어쩌면 (외전 포함)15권에 이르는 장편소설의 주제를 요약하는 중요한 장면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라인하르트 : 그토록 민주주의가 좋단 말인가? 은하연방의 민주 공화 정치는 루돌프 폰 골덴바움이라는 추악한 기형아를 낳지 않았나. 거기에 경이 사랑해 마지 않는 -그렇게 생각되네만- 자유행성동맹을 팔아 내 손에 건넨 것은 동맹의 국민 다수가 스스로의 의지로 선출한 국가 원수다.
민주공화정치란 민중이 자유 의지로 자기 자신의 제도와 정신을 깎아내리는 정치 체제를 말하는 건가?
양웬리 : 실례입니다만 각하의 말씀은 화재의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불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겨집니다
라인하르트 : 흠...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전제 정치도 마찬가지 아닌가.
때때로 폭군이 출현한다고 해서 강력한 지도성을 지닌 정치적 이익을 부정할 수는 없다
양웬리 : 저는 부정할 수 있습니다
라인하르트 : 어떻게?
양웬리 : 민중을 해칠 수 있는 권리는 민중 자신만이 가지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 루돌프 폰 골덴바움과 그보다 훨씬 소인배이지만 욥 트류니히트 등에게 정권을 준 것은 분명 민중 자신의 책임입니다.
다른 사람을 책망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전제 정치의 잘못은 민중들이 정치의 해악을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 잘못의 크기에 비한다면 훌륭한 왕 백 명의 선정도 작습니다. 더구나 당신처럼 총명한 군주의 출현이 드뭄을 생각하면 공과는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라인하르트 : 경의 주장은 대담하고 참신하기도 하지만 극단적이라는 기분도 든다. 나로서는 바로 수긍할 수 없지만, 경은 그것으로 나를 설득하려는 건가?
양웬리 : 그런 건 아닙니다. ...... 각하의 주장에 반론을 내놓은 데 지나지 않습니다.
한 가지의 정의에 대해 반대 방향에 동량 동질의 정의가 반드시 존재하지 않는 가 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라인하르트 : 정의는 절대적이 아니며 한 가지인 것도 아니라는 말인가? 그것이 경의 신념인가?
양웬리 : 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어쩌면 우주에는 유일무이한 진리가 존재하고,
그것을 해명하는 연립 방정식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에 닿을만큼 저의 팔은 길지 않으니까요
라인하르트 : 그렇다면 나의 팔은 경보다도 더욱 짧다. 나는 진리 따위 필요치 않았다.
내가 원하는 바를 맘대로 할 힘만을 필요로 해왔다. 바꿔 말하자면 싫은 녀석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있는 힘 말이다.
경은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나? 싫은 녀석은 없단 말인가?
양웬리 : 제가 싫어하는 부류는 자기만 안전한 장소에 숨어서 전쟁을 찬미하고 애국심을 강조하면서
다른 사람을 전쟁터로 떠밀고는 후방에서 안락한 생활을 보내는 무리입니다.
그런 무리와 같은 깃발 아래에 있다는 건 참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모든 전쟁에는 명분과 희생이 있었다.

항구적인 평화 따위는 인류 역사상 없었어. 그러니까 나는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
하지만 몇 십 년 정도의 평화가 충만했던 시대는 존재했지.
우리들이 다음 세대에 무언가 유산을 남긴다고 하면 역시 평화가 제일이야.
그리고 앞선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평화를 유지하는 것은 다음 세대의 몫이지.
각각의 세대가 다음 세대에 대한 책임을 잊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장기간의 평화가 유지될 거야.
그걸 잊어버리면 선조의 유산이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것이고 인류는 하나로부터 다시 출발하게 되는 거지." - 양 웬리


이 소설은 공상과학소설(SF)의 범주에서 봤을 때에는 허점과 모순이 많고 과학적인 근거가 빈약한 부분이 많지만 양보해서 단순히 미래 우주와 거기서 벌어지는 전쟁이라는 배경을 두고 사회제도와 정치에 대한 풍자를 하는 단순 소설로 본다면 충분히 훌륭한 작품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중위, 나는 역사를 공부한 적이 있어. 그래서 조금은 알고 있는데 말야. 인간 사회의 사상에는 크게 두 가지 조류가 있어.
생명 이상의 가치가 존재한다는 학설과 생명보다 더 가치있는 것은 없다는 학설 그 두 가지야.
그런데 사람들이 전쟁을 시작할 땐 전자를 택하고, 싸움을 그만둘 땐 후자를 이유로 내세우더군.
그것을 지금까지 수백 년, 수천 년 반복해 왔다 그말이야. - 양 웬리

무력이란 정치와 외교의 패배를 보상하기 위한 최후 수단이며, 발동하지 않았을 때 비로소 가치가 있는 것이다. - 3권 본문 중

'운명이라면 또 몰라도 숙명이라는 말은 정말 싫구나. 이중으로 사람을 매도하고 있어.
한 가지는 상황을 분석하는 사고를 정지시킨다는 거고, 또 한 가지는 사람의 자유의지를 싸구려로 간주해 버린다는 거다.
율리안, 숙명의 대결 따위는 없어. 어떤 상황이라도 결국은 당사자가 선택하는 거야' - 양 웬리

 

삼국지를 배경으로한 항우와 유방(초한지)의 재해석

"양 제독님의 가장 훌륭한 작전이 뭔지 알아?"
"당연한 걸 묻는군. 그야 다음 작전이지" - 8권 본문 중


제국주의와 민주주의의 승부에서 이 소설에서는 마지막에 제국주의의 승리에 손을 들어줍니다.
하지만 최종 승리여부와 달리 (소설 상에서) 역사가가 전하는 이야기는 양웬리 쪽에 좀더 우호적인 것 같습니다.
마치 삼국지 연의가 최종승리자인 조조(위)가 아닌 변방의 약체 유비(촉)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듯 말이죠.

 

'양 웬리의 진정한 위대함은 스스로가 함대 결전의 명수면서도 그 한계를 잘 분별하여 자신의 장점에 도취하는 일이 없었다는 점에 있다.'
그렇게 절찬한 역사가도 있었지만 그 점에서는 양의 적수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함대 결전을 전략 실행 차원의 부분적 기술 표출에 불과하다고 봤다.
적에 비해 보다 강력한 전투 능력을 갖추고, 보급을 완전히 하고, 정보를 많이 수집하고, 나아가 정확하게 분석하고,
신뢰할 수 있는 전선 지휘관을 임용하고,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여 개전 시기를 고른다.
그렇게 해 두면 한두 차례의 전술적 패배는 논평할 가치도 없었다. 그렇게 되면 최고사령관의 임무는 단 한 가지.
전군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일밖에 남지 않는다. -'방심말라'고 -7권 본문 중


출간된지 30년이 넘은 소설이지만 여전히 읽을 가치가 있는 소설임에는 틀림없기에 아직 안읽어보신 분들께는 정주행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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