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우리는 이런 범인들을 ‘괴물’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같은 인간과는 거리가 먼 존재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와는 ‘다른 차원’의 존재라고 믿고 싶어 합니다.” 게블러 박사는 학회에 참석할 때마다 그렇게 설명했다. “그런데 정반대로, 그들은 우리와 완벽히 똑같은 인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주변 사람이 이런 끔찍한 짓거리를 벌였을 거라는 건 상상조차 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아마 우리가 지닌 원죄에 대한 대가일 수도 있습니다. 인류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범죄자적 이인증(depersonalization)’이라고도 말하는데, 이는 연쇄살인범 식별에 난관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겐 약점이라는 게 있고 꼬리를 잡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괴물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나토 카리시의 데뷔작 《속삭이는 자》
전자책 구독서비스(리디셀렉트)를 통해 알게 되었던 이 작가의 소설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고전 추리소설을 제외하고 이런 유형의 범죄소설은 인문학이나 철학 서적에 비해 잘 손이 가지 않았던 개인적 취향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글로써 독자의 긴장감을 유지시키기엔 범죄/스릴러라는 장르가 영상매체에 비해 약점을 가질 것이다 라는 편견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도나토 카리시는 앞서 《이름 없는 자》에서 소개 드린 바와 같이 활자라는 플랫폼에서 놀랍게도 그 긴장과 스릴을 시종일관 유지합니다.
“적어도 우리 아이가 죽었는지나 알게 해주세요.” 부모들은 말한다. 몇몇은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기도 한다. 단지 눈물을 흘리고 싶기 때문이다. 그들의 유일한 바람은 포기하고 체념하는 게 아니라, 간절히 희망하기를 멈추는 것이었다. 희망은 서서히 고통스럽게 심장을 옥죄어오기 때문이다.
연쇄살인 사건에서는 피해자가 살해된 장소보다, 피해자가 발견된 장소가 더 큰 의미를 갖고 있다.
한마디로 살해행위는 살인범 자신만을 위한 행동인 반면, 그 이후의 모든 과정은 타인과 경험을 공유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연쇄살인범은 피해자의 시체를 통해 수사관들과 일종의 대화창구를 만드는 것이다.
사실을 기반으로 쓰여진 놀라운 소설
아동 연쇄 살인범과 벌이는 사투를 그린 이 소설이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이 이야기가 사실을 기반으로 쓰여졌다는 점입니다.
연쇄살인범은 최종 목적에 따라 여러 가지 유형으로 나뉠 수 있다. 우선 ‘망상가’의 집단이 있다. 그들은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또 다른 나에 의해 지배당하며 살인행각을 저지른다. 가끔은 환영이나 단순한 환청에 이끌리는데, 그들의 범행은 종종 정신질환에 의한 심신미약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선교자’형도 있다. 그들은 무의식중에 자리 잡은 목표를 가지고 있는데, 주로 자기 자신이 부과한 책임감에 의해 범행을 저지르고, 살인을 통해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런 유형은 필연적으로 특정 부류의 계층을 타깃으로 삼는다. 동성애자나 매춘부, 바람을 피우는 사람들, 변호사, 세무사 등이 바로 그 타깃에 속한다.
‘권력 추구형’은 자기 자신을 한없이 못난 인간이라고 비하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피해자를 살리고 죽이는 생사여탈권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결정하고 통제한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낀다. 살해행위에 주로 성폭행이 동반되는데, 이는 단지 피해자에게 수치심을 자극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쾌락 추구형’이 있다. 이들은 단지 살해행위가 전해주는 쾌락을 위해 사람을 죽인다. 이들 중에는─물론 하위범주에 지나지 않지만─성적인 동기를 지닌 범죄자들도 포함된다. 벤자민 고르카는 이 네 가지 유형에 동시에 속하는 희대의 살인마였다.
범죄학자 출신인 저자는 연쇄살인범의 특징을 묘사하며 베일에 가려진 속삭이는 자의 정체를 조금씩 좁혀갑니다. 물론 그 과정이 독자가 예상하지 못하는 반전을 만들어 감탄을 자아내면서요.
“2008년, 후지마쓰라는 일본인은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전 세계 사람들 중 열여덟 명을 골라 밸런타인데이에 동시에 자살하게 만들었다. 자살자들은 나이, 성별, 경제적 여건, 사회적 배경 등이 전혀 다른 사람들로, 피해 남성이나 여성은 아무런 문제 없는 지극히 정상적인 시민으로 알려져 있었다.” 밀라는 다시 남자를 향해 눈을 들어 올렸다. “도대체 어떻게 이 사람들을 전부 통제할 수 있었던 걸까? 지금도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어……. 하나가 더 있어.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지. ‘1999년, 오하이오 주의 애크런에 살고 있던 로저 블레스트란 사람은 여섯 명의 여성을 살해했다. 그는 체포 당시, 수사관들에게 루돌프 믹비라는 이름의 제삼자가 자신에게 그 행위를 권했다고 해명했다. 판사와 배심원은 그가 심신미약자로 판명받아 법망을 빠져나가려는 속셈이라고 판단, 약물 투입에 의한 사형을 선고했다. 2002년, 뉴질랜드에서는 글을 읽지 못하는 노동자 출신의 제리 후버라는 사람이 네 명의 여성을 살해한 뒤 경찰 조사에서 루돌프 믹비라는 이름의 제삼자가 자신에게 그 행위를 권했다고 해명했다. 당시 검찰 측 증인으로 나왔던 심리학자는 1999년 사건을 떠올리고─후버가 당시의 사건을 알 수 없다는 판단하에─조사 끝에, 그와 같은 직장의 동료 중에 루돌프 믹비라는 사람이 있었음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는 1999년, 오하이오 주 애크런에 거주하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 연관성이 보이나?”
속삭이는 자의 정체
“잠재의식 속의 연쇄살인범들은 실제로 범행에 가담하지 않아. 죄를 물을 수도 없고, 처벌도 불가능해. 찰스 맨슨의 경우, 재판과정에 약간의 트릭을 이용했어. 그래서 사형선고도 여러 차례의 무기형으로 감형되었고……. 일부 심리학자들은 심신이 미약한 사람들을 교묘히 조종하는 능력을 가진 당신 같은 인간들을 ‘속삭이는 자들’이라고 지칭하지. 난 ‘늑대’라는 말이 더 좋은데 말이야……. 늑대들은 떼로 몰려다니거든. 그리고 각각의 무리마다 우두머리가 있어. 그런데 종종 나머지 늑대들은 우두머리를 위해 대신 사냥을 하곤 하지.”
역자의 표현대로 저자는 소설 《속삭이는 자》를 통해 이러한 ‘살아 있는 악마’의 존재를 고발하고 이들의 해악에 무방비로 노출된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있는 듯 합니다.
표창원씨가 본 소설의 추천사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언급했는데 이러한 관점 또한 참신 하네요.
시대를 막론하고 어디서나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도스토옙스키를 보면 정말 클래식은 영원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런 악마의 출현은 이미 19세기에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에 의해 예견되었는지도 모른다.
오직 자신이 ‘보통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우월한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해 전당포 노파와 그 여동생을 도끼로 살해한 라스콜니코프.
자수하고 자백한 뒤 선처를 받아 8년간의 시베리아 유형생활이라는 벌을 받았지만 끝까지 자신의 잘못과 죄를 진정으로 참회하지 않은 라스콜니코프.
아마 《죄와 벌》의 속편이 있었다면, 유형생활을 끝내고 사회로 돌아온 라스콜니코프가 자신의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은 채 인간의 악한 본성을 자극해 살인을 저지르게 한 《속삭이는 자》의 ‘앨버트’가 되지 않았을까? - 추천사, 표창원
함께하기 좋은 것들
이 책이 마음에 드셨다면
이 현대판 죄와 벌이 마음에 드셨다면 불후의 클래식인 "죄와 벌 -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지 않을 수가 없겠지요.
마찬가지로 이 소설이 마음에 드셨다면 같은 저자의 연작물 "이름없는 자 - 도나토 카리시" 또한 추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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