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이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눈이 멀고 단 한 사람만이 보게 된다면’
그녀는 구급차에 올라타 남편 옆에 앉았다. 구급차 운전사가 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저 사람만 데려가야 하오, 그게 내가 받은 명령이오, 어서 내려주셔야겠소.
여자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나도 데려가야 할 거예요, 방금 나도 눈이 멀었거든요. - 눈먼자들의 도시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사람들이 눈이 멀어 백색 세상을 마주하게 된다.
이 전염병은 감염자와 접촉했던 이들에게 확산되기 시작한다.
주제 사라마구의 화제작 『눈먼 자들의 도시』는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마치 감염되고 확산되고 격리되고 의심하는 코로나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처럼
이 소설을 통해 저자는 눈먼자들의 집단 수용소 가운데 유일하게 세상을 볼수 있는 한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의 단면, 인간성의 단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볼 수 없는 세상에서의 의심과 신뢰의 경계
의사 선생님, 선생님이 이 병실의 대표가 되어주시는 게 좋겠어요
어차피 선생님은 의사니까. 눈도 없고 약도 없는 의사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권위는 있잖아요, 의사의 아내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지금은 여기에 여섯 명밖에 없지만, 내일이면 틀림없이 숫자가 늘어날 거야, 그리고 매일 사람들이 새로 들어올 거야, 그 사람들이 자기들이 직접 택하지도 않은 사람의 권위를 인정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야, 게다가 나는 존중해 주는 대가로 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잖아, 새로 오는 사람들이 내 권위와 규칙을 기꺼이 받아들여줄 거라는 가정에서 출발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곳에서 살기가 어려워질 거예요.
단순히 어렵기만 하다면 아주 운이 좋은 거라고 할 수 있지.
이 작가의 스타일인지, 아니면 눈먼 자들의 대화라는 상황 특유의 분절 없이 뒤섞인 하나의 흐름을 표현하기 위함인지,
사라마구는 소설 속 모든 대화를 쌍따옴표를 쓰지않고 문장과 문장사이를 쉼표로만 구분합니다.
처음에는 상당히 헷갈리고 '지금 이 말이 누가 하는말인가?' 하고 종종 되짚어야 했지만 이런 답답함과 불편함이야말로 작가가 묘사하고자 했던 "눈먼자들의 사회"의 대화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정상인 자가 겪어야 하는 가장 큰 부담
그녀는 눈을 떴다. 그냥, 무슨 의식적 결단 때문이 아니라 그냥. 벽의 반 정도 높이에서부터 시작하여 천장에서 불과 한 뼘을 남겨놓은 곳까지 올라간 창문들을 통하여 흐릿하고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눈은 아직 멀지 않았구나, 그녀는 중얼거렸다.
소설 속 주인공은 홀로 눈이 보이는 우월함에도 불구하고 보지 않아도 될 것들을 고스란히 바라보게 됩니다. 그에게 세상은 수용소 안의 누구보다 비참하고 절망적으로 비춰집니다.
그때 한숨 소리가 들렸다. 신음, 처음에는 숨을 죽인 가운데 시작된 아주 작은 울음 소리, 언어처럼 들리는 소리, 언어여야 하는 소리. 그러나 언어의 의미는 점점 높아지는 소리에 묻혀 사라져버렸다. 그 소리는 외침으로,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로, 마침내 무겁게 씩씩거리는 숨소리로 바뀌고 있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소설의 자세한 내용을 담을 수는 없지만 그런 눈먼 양떼사람떼를 인도하는 단하나의 바라볼수 있는 자로부터의 증언을 통해 극심한 전염병이 드러낼 수 있는 적나라한 인간성을 보여줍니다.
사용되는 언어가 엄격성과 적합성을 제대로 갖출수록, 사실들은 더 확실하게 묘사되는 법이다. ...
정부는 원래 세웠던 가설, 곧 어떠한 잠복기 증상도 없이 즉각 발병하는, 미확인 병원균에 의한 전례 없는 전염병이 나라를 휩쓸 것이라는 가설을 폐기하게 되었다.
대신 정부는 ... 아직 해명되지 않은 불행한 상황이 우연적이고 일시적으로 동시에 발생하고 있을 뿐이라고 발표했다. ... 이 병은 소멸을 향해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음이 확인되었다고 강조했다. 즉 병이 쇠퇴하고 있는 징후들을 확인했다는 것이었다.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
한해하고 절반이 다가도록 확진자가 줄지 않는 요즘, 어디에 있든 누구를 만나는 기본으로 상대를 의심하며 거리를 두게되는 여러모로 숨막히는 요즘을 살아가면서,
올 초에 읽었던 이 책의 묘사들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이 모든 대란이 지나간 뒤에 우리들도 소설의 말미즈음 주인공이 묘사한대로 "나아졌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
그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삶과 운의 성쇠로부터 지혜를 배운 사람들이 간직해 온 탁월한 격언이었다.
이것이 눈먼 자들의 땅으로 옮겨지면 이렇게 번역될 수 있겠다,
어제는 우리도 볼 수 있었으나, 오늘은 볼 수 없다, 내일은 다시 볼 수 있겠지.
마지막 말은 약간 물어보는 듯한 느낌으로 해야 한다.
'책 > 소설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하영웅전설, 다나카 요시키 : 엘리트의 독재와 중우정치 사이의 딜레마 (0) | 2021.08.20 |
---|---|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며 읽는 책 3 : 페스트 - 알베르 까뮈 (0) | 2021.08.20 |
데미안, 헤르만 헤세 (feat. 그땐 미처 알지 못했지 - 이적) (0) | 2021.08.16 |
화성에 불시착한 로빈슨 크루소 : 마션 , 앤디 위어 (0) | 2021.08.13 |
그리고 신은 내게 도와 달라고 말했다, 한스 라트(그리고 신은 시리즈의 마지막) (0) | 2021.08.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