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역사

다른 역사가가 바라본 같은 역사 : 거꾸로 읽는 세계사, 유시민

by Caferoman 2022. 1. 4.

거꾸로 읽는 세계사 - 초판본과 비교했을 때 개정판은 새로운 책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25년만에 다시 읽은 책

중학교 2학년 때, 첫번째 국사시간에 선생님께서 수업을 시작하자마자 본인의 이름을 적으시면서 추천도서 목록을 칠판에 가득 적으셨습니다. 당시 선생님의 말을 참 잘들었던 저는 곧이 곧대로 선생님께서 써주신 추천도서를 찾아서 읽기 시작했고 그렇게 처음 접하게 된 책이 바로 유시민씨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 였습니다.

 

당시에는 이 책의 제목이 왜 거꾸로 읽는 세계사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역사책이라고 하길래 뭔가 정복하고 영토를 확장하고 전쟁의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는 거시적인 역사이야기가 나올 것으로 기대했으나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드레퓌스 사건으로 시작해서 뭔가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은 이야기들 투성이였습니다. 결국 반쯤 읽다가 "이 책은 읽어봤자 성적에 별 도움이 안되겠다"라는 판단에 이 후 내용은 대충 훓어보고 고스란히 책장에 모셔두었던 책이었는데 25년이 지나서 다시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나는 최후의 승리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더욱 강한 확신으로 거듭 말씀드립니다. 진실이 전진하고 있으며, 아무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진실이 땅속에 묻히면 조금씩 자라나 엄청난 폭발력을 획득하며, 마침내 그것이 터지는 날 세상 모든 것을 날려버릴 것입니다. 오늘 나의 행위는 진실과 정의의 폭발을 앞당기기 위한 혁명적 수단일 뿐입니다. 나의 불타는 항의는 영혼의 외침입니다. 부디 나를 중죄 재판소로 소환해 푸른 하늘 아래에서 조사하기를 바랍니다. 기다리겠습니다. -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나는 고발한다』, 책세상, 2005, 106·108쪽.

 

30대의 끝자락에 다시 펼쳐본 이 책은 뭔가 서문과 맺음말부터 시작해 상당 부분이 증보되고 2020년대를 살아가는 저자의 견해와 회고를 담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책으로 다가왔습니다.

 

다시 읽다보니 왜 "거꾸로" 읽는 세계사였는지도 알것 같구요.

 

이 책의 제목이 말하는 "거꾸로"의 의미는

1. 거시적인 전쟁/정복사가 아닌 미시적인 사람들의 역사

2. 연대기순으로 고대부터 정렬된 역사가 아닌 근대사

3. 제국주의와 전체주의, 민족주의의 승자의 관점에서 쓰여진 역사가 아닌 이에 대한 투쟁의 역사

가 아닐까 싶네요.

 

전쟁의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20세기까지 살아남았던 역사의 괴물, 갈 수만 있었다면 ‘달도 삼켰을 제국주의’였다

 

자본주의에 대한 회고 : 경제 대공황

대공황은 시장경제의 특성과 결함을 명백하게 드러냈다. 시장은 인간의 ‘필요(need)’가 아니라 지불능력이 있는 소비자의 ‘수요(demand)’에 응답한다. 아무리 절박해도 가난한 사람의 요구는 경청하지 않으며, 돈을 가진 고객의 요구는 무엇이든 들어준다. 무일푼의 실업자는 아이들 먹일 감자를 구할 수 없었지만 부자가 반려견에게 스테이크를 먹이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이 책에서는 크게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근대사에 미친 영향과 그 저항의 움직임들을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저 이러한 사상이 절대 선이고 그 반대 축을 이루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모두 악이고 배척의 대상이다라고 경계하던 시기에 쓰여진 책이었기에 이 책의 파장이 크지 않았을까 싶네요.

 

자본주의체제와 주류 경제학은 파산했다. 긴급한 과제는 경제학이 아니라 경제를 살리는 일이었다. 국가 운영을 책임진 권력자들은 경제이론의 뒷받침 없이 그 일을 해야 했는데,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이는 루스벨트와 히틀러였다. 그들은 과감한 ‘대증요법’으로 경제의 활력을 되살려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가를 ‘최후의 보증인’으로 내세워 금융 산업의 혼란을 잠재웠다. 대형 토목건설 사업을 벌여 사회의 총수요를 늘렸다. 노동조합의 교섭력을 북돋우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함으로써 소비지출을 자극했다. 병의 원인을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해열제와 영양제를 투입해 환자를 일으켜 세운 것이다.

 

자본주의가 세계의 체제를 독점하다시피 군림한 것이 고작 30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지금은 절대적이고 영원할 것만 같은 자본주의가 보여주는 장밋빛 미래가 과연 계속해서 인류의 유일한 대안이 될수 있을 것인가는 시간을 두고 지켜볼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무너진 1990년 이후 자본주의는 ‘더 나은 대안이 없는’ 경제체제가 됐다. 컴퓨터와 정보통신기술의 혁명,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사회의 생산력은 더욱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주기적으로 찾아드는 불황과 ‘승자독식’으로 흐르는 양극화 현상에서 보듯, 인간은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임의로 통제하지 못한다. 대공황은 사람들이 더 많은 상품의 생산에 열광하고 물질적 부의 축적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던 시기에 세상을 덮쳤다. 인간은 자신이 요술램프에서 불러낸 거인을 다루지 못하는 소년과 같았다. 오늘 우리는 그때와 얼마나 다를까?

 

제국주의와 파시즘이 만들어낸 참상 : 제 1,2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이 ‘제국의 무덤’이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파시즘의 무덤’이었다. 나치 독일, 파시스트당의 이탈리아, 천황제 일본이 패전함으로써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기본질서로 삼는 공화정이 문명의 대세가 됐다. 추축국이 승리했다면 나치즘과 같은 ‘모든 악의 연대’가 세계를 지배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가 인류 문명의 진로를 결정했다고 할 수 있다.

 

홀로코스트(Holocaust)

국가권력으로 범죄를 저지른 인물은 인류 역사에 숱하게 많았지만 민족 집단 하나를 완전히 말살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수백만 명을 체계적으로 학살한 사례는 나치밖에 없었음을 강조하며 저자는 히틀러와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한 쳅터로 다루고 있습니다.

 

홀로코스트라는 말은 본래 구약에서 희생물을 통째로 태워버리는 특수한 종교의식을 가리키는데, 1948년 이스라엘공화국을 수립한 시온주의자들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지칭하는 용어로 공식 사용했다. 홀로코스트의 저변에는 인종주의·우생학·반유대주의 등 연관된 사상과 이론이 깔려 있었다. 나치당은 독일인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인종우월주의를 부추겨 독일 국민을 결속했고, 인종을 개량할 수 있다는 우생학을 동원해 병자와 장애인과 동성애자를 죽였으며, 유대인을 ‘부도덕한 기생충’이고 ‘극히 위험한 적’으로 보는 반유대주의를 선동해 홀로코스트를 저질렀다. 유대인을 말살하고 슬라브인을 노예로 삼아 게르만족의 세계 지배를 이룬다는 망상을 추구했다. 독일 보수 세력과 군부·지주·대자본가들은 나치의 인종주의를 예찬했고, 독일 국민은 홀로코스트의 실상을 몰랐거나 모른 체하며 히틀러를 지지했다. 나치즘은 ‘모든 악의 연대’였다.

 

이 책에서는 우리가 교과서에서는 볼 수 없는 민족, 이념간의 갈등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데요, 이를테면 팔레스타인 분쟁이나 베트남 전쟁과 같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거나 편향된 입장에서만 다루어졌던 역사에 대해서 재조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건국은 곧 팔레스타인에 대한 침략이었다. 유럽 유대인은 2천 년 동안 혹독한 차별과 박해를 받았다.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본 유럽·미국의 기독교인과 정부가 시오니즘운동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인 사정도 이해할 만하다. 자신의 국가를 세워 안전한 삶을 도모하려 한 유대 민족의 동기도 정당하다. 그러나 그들에게 팔레스타인 땅을 빼앗고 거기에 살던 사람들을 내쫓을 권리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만약 모든 민족이 수천 년 전 조상이 한때 살았다는 이유로 남이 사는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폭력을 행사한다면 세계는 당장 전쟁터가 되고 말 것이다. 팔레스타인은 그곳에서 땅을 경작하고 자손을 낳고 나름의 역사와 문화를 일군 아랍인의 것이었다.

 

북베트남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로 보였지만 미군은 이기지 못했다. ... 제2차 세계대전까지 미군은 참전한 모든 전쟁에서 이겼다. 한국전쟁에서는 이기지 못했지만 진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베트남에서는 군사적으로 패배했을 뿐 아니라 도덕적·정치적으로 큰 상처를 입었다. 베트남은 굴복하지 않는 민족의 땅이다. 중국과 국경이 맞닿아 있어서 고대부터 한자를 사용하는 등 문화적으로 깊고 넓은 영향을 받았고 종종 정치적 간섭과 군사적 침략에 시달렸지만 베트남 민중이 싸우지 않고 항복한 적은 없었다. 그들은 민족의식이 강하고 외세에 맞서 투쟁한 민족영웅을 높이 받든다. 미국 대통령과 국방부 장군들은 베트남 민중을 과소평가했다.

 

세계 근대사는 100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동안 공산주의의 태동과 멸망, 인종 차별의 철폐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발생한 역동적인 기간이었습니다. "20세기의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은 볼셰비키혁명이었고 가장 중대한 ‘기술적 사건’은 핵무기 개발이었다." 라는 엘런 튜링의 평가 처럼요.

 

20세기는 태양 아래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은 ‘역사의 시간’을 체감하기에 좋은 100년이었다. 그토록 많은 것이 사라지고 생겨난 100년은 없었다. 무엇보다 ‘제국’이 사라졌다. ... 어떤 제국도 20세기의 강을 살아서 건너지 못했다. 청과 러시아는 사회혁명에 무너졌고 오스만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전쟁의 포화에 스러졌다. 제국의 자격이 없으면서 제국을 참칭했던 독일과 일본은 ‘패전의 축복’을 받아 민주공화국이 됐고 ‘사회주의 제국’ 소련은 20세기에 태어나고 죽었다.

 

이 책이 처음 세상에 나온 뒤 30여년이라는 기간 또한 그에 못지 않게 격동의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저자는 개정판의 에필로그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우주의 시간’에서 보면 모든 것이 ‘헛되고 또 헛된’ 일이지만 ‘역사의 시간’에서는 그렇지 않다. 인간은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고 믿으면서 불합리한 제도와 관념에 도전했다. 때로 성공했고 때로는 실패했지만, 그렇게 부딪치고 싸우면서 짧고 부질없는 인생에 저마다의 의미를 부여했다. 20세기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사는 거야. 불가능은 없어.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아! 그렇지만 나는 의심한다. 영원한 건 없어도 지극히 바꾸기 어려운 것은 있지 않나? 나는 ‘역사의 시간’과 ‘우주의 시간’ 사이에 ‘진화의 시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은 ‘진화의 시간’ 속에서만 달라질 수 있다. ‘역사의 시간’에서는 바꾸기 어렵다.

 

에필로그의 끝에서 저자는 21세기 역사학자 유발하라리가 사피엔스와 호모데우스에서 다룬 인간종족의 위험성을 언급하며 이러한 상황에 대한 자각과 회고가 있는한 인류의 미래(역사)는 개선할 여지가 있지않겠냐는 여운과 함께 마무리 합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Harari)는 지구의 주인이자 생태계 파괴자인 호모사피엔스가 신이 되려고 한다면서, 힘은 세지만 책임의식은 없는 신이 가장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인간이 당장 신이 된다면 틀림없이 그런 신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인간이 신이 되리라고 보지 않는다. 인류가 유전자를 조작해 생명을 창조하고 파괴하는 능력을 확보할 때까지 살아남을 확률이 핵전쟁이나 기후변화로 그 이전에 절멸할 확률보다 높다는 보장이 없다. 만약 절멸의 운명을 피하는 데 성공할 만큼 인류가 현명해진다면 어느 정도 책임의식을 지닌 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예상치 못한 결론에 이르렀다. 어떤 경우든 우리가 아는 ‘역사의 시간’은 머지않아 끝난다. 논리적으로는!

 

확실히 2022년이 개정판으로 읽은 이 책은 20세기 초판으로 접했던 책과는 달리 많은 것을 다시보게 해준 책이었습니다. 세월이 지나도 곱씹을 거리를 주는 책은 새롭게 탄생한 개정판이라고 하더라도 "클래식"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작품으로 보입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