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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설에세이

심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 서유럽판 신과 함께

by Caferoman 2021.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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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 버전의 신과 함께

카롤린 : 그래, 오늘 당신의 운세는 뭐였어요?
아나톨 : 뜬금없는 말이었는데, <놀라움으로 가득한 긴 여행을 준비하세요>라나 뭐라나. 그래도 나쁜 얘기는 전혀 없었어요.
카롤린 : 운이 참 좋네요, 피숑 씨.


사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은 개미 시리즈와 죽음 정도밖에 읽어보질 못했는데요,
(사골육수의 결정체인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은 제외했음)
2020년에 출간한 이 책은 마치 "신과 함께"의 유럽버전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단지 죽음에 이른자가 귀인이라는 설정 대신 판사출신의 주인공이 재판을 받는다는 점과
주인공의 재판과정 가운데 함께하는 인물이 강림도령, 해원맥, 이덕춘 3인방 대신 전부부였던 카롤린과 베르트랑이라는 점 정도의 차이가 있겠네요.

베르트랑 : 있잖아요, 피숑 씨, 충만한 삶의 끝자락에는 반드시 운명의 순간이 와요. 그때 무대에서 퇴장할 줄 알아야 해요.

 

전직 이승판사가 받는 저승에서의 재판

가브리엘 세상에! 아나톨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가브리엘 이럴 수가. 2천 년 만이야. 아나톨 뭐가요? 가브리엘 판사? 당신 판사였어요? 베르트랑 그러지 않아도 제가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판사를 심판한다…… 역설적인 상황이죠.

 

아나톨 : 난 그저 행운이라고 믿었죠.
카롤린 : 행운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는 일에 무지한 자들이 붙이는 이름이에요.

저자는 이 책에서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요소가 유전 25%, 카르마 25%라는 선천적 요인과 자유의지 50%의 조합으로 이루어 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삶에서 간간이 주어지는 행운은 조력자(여기에서는 변호인단이자 수호천사인 카롤린과 베르트랑)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소설 속 세계관은 워낙 윤회와 저승의 심판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익숙한 한국독자에게는 다소 식상할 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이러한 사후세계에 대한 소재를 가지고 작가가 어떤식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할 것인가에 집중하며 계속해서 소설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가브리엘 (차분하게 또박또박 말한다) 그러니까 삶을 요리로 치자면 유전 25퍼센트, 카르마 25퍼센트, 자유 의지 50퍼센트가 재료로 들어가는 거예요. 아나톨 통 무슨 말인지. 카롤린 우리 모두는 태어나는 순간 그 세 가지의 영향하에 놓인다는 뜻이죠. 유전이라 하면 부모, 그리고 당신의 성장 환경을 말해요. 가브리엘 당신이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거나 그들이 갔던 길을 따라간다면, 그건 유전 요소가 강력하게 작용했기 때문이죠. 반대로 무의식이 당신의 선택을 좌우한다면, 그건 카르마가 지배적인 탓이에요. 카롤린 하지만 당신이 자유 의지를 최대한 활용하면 유전과 카르마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도 있어요.

 

7개의 지옥관문 대신 7개 항목에 대한 인생 검증

베르트랑 피숑 씨에게 지난 삶의 소회를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죠. 인용하겠습니다, <좋은 학생, 좋은 시민, 좋은 남편, 아내에게 충실했고, 좋은 가장, 좋은 가톨릭 신자, 좋은 직업인.> 자, 지금부터 항목별로 짚어 보겠습니다.


신과 함께에서 "천륜, 살해, 나태, 거짓, 불의, 배신, 폭력"의 총 7개의 지옥의 심판을 받았다면 이 책에서는 7가지의 관계적인 측면에서 죽은자의 삶을 평가합니다. 이부분은 인간이 가진 죄성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있다기 보다는 그저 하나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기위해 별 생각없이 가볍게 나열한 항목에 가까워보입니다. 그런면에서 이 소설은 단테의 신곡이나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같은 클래식 반열의 책들과 비교할 급은 아닙니다. 단지 사후세계라는 소재를 활용한 가벼운 읽을거리정도로 보는 것이 이 책에 실망하지 않는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베르트랑 이미 얘기했지만, 천국의 가치관은 지상의 그것과 같지 않아요. 사실 결혼은 남자가 자신의 핏줄을 인정하게 만들어 사생아와 고아의 수를 줄이려고 만들어진 제도예요. 가브리엘 사회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경험주의적 문제 해결 방식이죠. 베르트랑 신의의 의무가 만들어진 것은 오랫동안 여성의 경제 활동이 금지돼 왔던 사실을 고려해, 혼자 생계를 책임지기 힘든 여성들이 버려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어요. 어울리지 않는 상대에게 충실한 것은 그의 삶을 망치는 동시에 자신의 삶을 망치는 일이기도 하죠.

 

 

참을수 없는 윤회의 가벼움

이 소설이 전통적인 저승의 세계관이나 불교의 윤회관과 가지는 가장 큰 차이는 환생이라는 것이 이승에서의 삶이 충실성이 인정되지 않았을 때 거저 주어지는 형벌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너 인생 대충 살았구나, 그럼 다시 인간으로 환생 ㄱㄱ"라고 쉽게 던져지는 판결이라는 것이지요.

이 점은 윤회의 사슬을 끊고 해탈하는 것에 무엇보다 진심인 힌두교,불교의 세계관에 비했을 때,
신과 함께에서 최고평가를 받는 망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인간으로의 환생한다는 저승의 세계관과 비교했을 때,
이 소설은 그저 가볍고 실없는 꽁트로만 보입니다. 깊이 없는 블랙코미디라고나 할까요?

카롤린 잠깐만, 절 좀 바꿔 주세요. (카롤린이 수화기를 받아 든다) 여보세요…… 네, 안녕하세요, 저는 변호인이에요. 조금 난처한 일이 생겨서 그러는데, 무통 주사를 놓으세요. ……뭐라고요? 그녀가 믿는 종교에서 금지한다고요? ……이유가 뭐죠? ……이브가 사과를 깨물어서, ……그래서 뭐 어떻다는 거죠? 여자들이 고통 속에서 애를 낳아야 한다……! (기가 차다 못해 화가 치미는 듯) 한심하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산모한테 무통 분만에 대한 생각을 불어넣고, 지금은 21세기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줘요. (카롤린이 상대방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른 이들을 향해 몸을 돌린다)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하네요…… 우린 계속하죠!

 

전작에 비해 아쉬운 신작

소설 자체의 흡입력이나 이야기 자체는 워낙 내공이 있는 작가이니 만큼 훌륭해서 순식간에 읽을 수 있었으나,
전작들로 인해 기대가 과했던 탓인지. 죽음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이 정도 밖에 뽑아내질 못하다니..."라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수 없나봅니다.

분명 가볍고 즐겁게 읽을 소설입니다만 확실히 저자의 "개미"시리즈를 처음 접했을 때의 전율에 비하면 많이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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