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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설에세이

이름 없는 자 - 도나토 카리시 : 활자의 한계를 넘어선 긴장감

by Caferoman 2021. 8. 31.

독서노트

‘속삭이는 자 사건’의 후유증에서 벗어나는 법을 깨닫기까지 7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늘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그 악몽은 밤에 찾아오는 게 아니었다.
잠이 들면 모든 게 사라지는 반면, 대낮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일 때가 종종 있었다.
위험을 미리 감지하는 고양이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가 그녀 곁에 붙어 다니는 느낌이었다.
결국 사건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워낼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밀라는 자기 자신과 일종의 타협점을 찾기에 이르렀다.
즉 자신만의 ‘안전선’을 예방책으로 설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엄격한 원칙을 세워 철저히 지키기로 했다.
첫 번째 원칙이 가장 중요하다. 악마의 이름을 절대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다.

   

활자의 한계를 넘어선 긴장감, 근래 읽은 가장 멋진 현대 추리소설

예를 들면 아동실종사건이 이에 해당한다. 불행하게도, 체계가 잘 잡힌 일상에 잠시 방심한 부모들이 작지만 근본적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에 이런 일이 발생한다.

아이는 성인에게 관심을 받게 되면 일종의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대다수의 부모가 입버릇처럼 가르치는 두 가지 충고사항이 서로 충돌하며 혼자 힘으로는 풀기 힘든 갈등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즉 어른 앞에서 예의를 갖춰 행동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낯선 이와의 접촉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명령 사이에서 접점을 찾아 적절하게 행동하는 건 아이 입장에서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는 뜻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아이는 자신의 한 가지 감정을 숨겨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이 책은 아동 실종사건을 두고 연쇄살인범을 추적해 가는 범죄소설입니다. 범죄학자 출신이라는 저자의 독특한 이력 때문인지 이 책은 읽는 내내 직접 현장에 뛰어들어 주인공들과 함께 사건을 관찰하는 듯한 긴장감과 몰입감을 줍니다.

 

전작 '속삭이는 자'의 연장선 상에서 펼쳐지는 이야기

연쇄살인범이 상대적으로 다소 긴 시간 간격을 두고 범행에 나서는 반면, 대량살인범들은 철저한 준비를 거처 단 한 건의 범행에 최대한 다량의 피해자를 만드는 식으로 범행을 벌이는 편이다.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사람들이 가장 흔히 보이는 반응은 두려움이 아니라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다.

 

참고로 이 책은 전편 '속삭이는 자'의 연장선 상에서 동일한 주인공이 유사한 흐름으로 사건을 풀어나갑니다. 따라서 두 작품 중에 두번째로 읽게되는 책은 어느정도 그 흐름을 예상할 수 있을법한 작가 특유의 스타일이 존재합니다.

 

연속살인범의 범행은 특정한 주기가 있다.
각각의 주기는 대략 12시간 동안 지속되고 세 단계로 나뉜다.
진정기, 잠복기, 폭발.
첫 단계인 진정기는 최초의 살인행위 직후 나타난다. 살인범은 일시적으로 만족감을 느끼고 뒤이어 다시 새로운 포란기抱卵期를 거치게 된다. 이때 증오와 분노가 뒤섞이는데 두 감정은 화학물질처럼 반응한다. 각각 떨어져 있을 때는 반드시 유해한 건 아니지만 서로 결합하는 순간 극도로 불안정한 혼합물로 돌변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 번째 단계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결론, 그건 곧 죽음밖에는 없다.

   

모든 게 눈에 보이는 그대로고, 아니라면 또 아닌 그런 상황입니다.

범죄인류학 서적을 통해 방화광이야말로 가장 사악하고 가학적인 천성을 가진 범죄자로 분류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바노비치 같은 인간들을 지칭하는 이름이 하나 있다. ‘불에서 태어난 존재.’ 이런 인간들이 위험한 이유는 궁극적인 목표가 살인을 넘어서는 파괴적 성향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의 경력을 증명이라도 하듯 소설 곳곳에 범죄 수사/분석 기법을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단 이러한 설명이 과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작가의 역량은 범죄에 관련된 지식보다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능력에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 관념운동효과라고 들어본 적 있습니까?”
“심리학적인 부분이라고 해야겠지요. 간단하게 설명하면 머릿속으로 생각한 이미지가 자신도 모르게 행동으로 표현되는 과정을 말하는 겁니다.”
“피조사인의 행동은 면담조사관의 행동이나 말에 따르는 법이지요. 그래서 아까 그 친구 앞에서 불을 가지고 장난을 쳤던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될 겁니다. 식탁에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음식을 먹는 대신 음식으로 장난을 치면 무의식적으로 어떤 모양 같은 걸 만들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전화통화를 하다가 눈앞에 메모지와 연필이 보이면 무의식적으로 뭐라도 끄적거리게 됩니다. 아무런 의미 없는 것들을 적거나 그릴 때가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그 무의식에 따라 어떤 의미가 담긴 걸 그리기도 합니다. 내가 당신이라면 일단 그것부터 찾아볼 겁니다…….”

   

스포일러 주의 : 인간의 의식을 조종하는 자

아래는 자칫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니 혹시 이 책을 읽어보실 분이라면 이 부분은 넘어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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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의식을 조종하는’ 사람들에는 여러 부류가 있습니다. 적대감을 전파하는 부류는 자신의 모습은 드러내지 않으면서 모두에게 해롭고 불건전한 이상을 수립해 자신을 따라오는 사람이 생기도록 선동합니다. 이들은 위조된 정보로 여론을 호도하고 날조된 이야기들을 전파하면서 대중이 결국 폭력까지 행사하게 교묘히 책동합니다. 다음으로 복수에 목마른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 부류는 불특정다수에게 적을 ‘섬멸’하라는 목표의식을 심어주는 일에 능한 자들입니다."

 

관리인: 방 안에 꼬마 여자애가 하나 있었는데, 비명을 듣고 그 방에 갔을 때 문을 열어준 게 그 꼬마였습니다.
교환원: 제가 방금 여쭤본 질문에 대한 답은 안 해주셨는데요.
관리인: 저기요, 제가 전화 받으시는 분을 무시해서 그러는 건 아닌데요, 방금 말씀드린 내용을 이해 못 하시는 건가요? 제가 사람들하고 317호에 갔을 때 방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고요.

   

신예 작가 도나토 카리시의 매력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열린 결말을 자주 선보이며 독자에게 궁금증을 던진다는 불평에 작가는 한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글쎄요. 제게는 그 질문이 마치 연쇄살인범에게 살인을 멈추고 ‘은퇴’할 생각이 있느냐고 묻는 것 같습니다. 전 살짝 열린 문틈으로 그 너머의 세상을 들여다보는 걸 좋아합니다. 무얼 발견하게 될지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이 마음에 드셨다면

아직 이 작가의 소설을 2권 밖에 읽어보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올해 들어서 읽었던 가장 멋진 추리소설이었습니다.

이 작품이 마음에 드셨다면, 그리고 혹시 아직 이 소설의 전편 "속삭이는 자"를 읽어보지 않으셨다면 이 또한 강력하게 추천드립니다.

 

Y의 비극 정주행 코스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 Y의 비극, 엘러리 퀸 - 속삭이는 자, 도나토 카리시 - 이름 없는 자, 도나토 카리시

 

세계 3대 추리소설을 꼽을 때 빠지지 않는 걸작 Y의 비극의 정주행 코스라고 할까요? 

앞서 소개드린  "속삭이는 자"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연장선 상에 있다면, 이름 없는 자의 경우 엘러리 퀸의 작품 "Y의 비극"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네 소설 중 어느 하나가 마음에 들었다면 나머지 세 소설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없는 필수 정주행 코스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각 소설의 장르가 다르고 시대가 다르고 작가의 출생지 또한 다르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과 전개, 이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 모두가 하나의 큰 흐름을 가지고 있는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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