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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설에세이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 사람은 그렇게 괴물이 되는 거야

by Caferoman 2021. 9. 11.

독서노트

병적인 상태에 있을 때 꾸는 꿈은 가끔 이상한 입체성과 뚜렷한 선명함, 놀랄 만한 현실과의 유사성을 그 특색으로 한다. 때로는 기괴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 꿈의 상황이나 그 과정 전체가 장면의 내용을 충실케 한다는 뜻에서 예술적으로 완전히 부합하는, 지극히 섬세하면서도 기상천외한 상세함을 지니고 있다. -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초인사상-니체>, 《속삭이는 자-도나토 카리시》의 원형

그의 옳고 그름 판단력은 면도날같이 날카로워서, 이미 자기 내부의 의식적인 반박론은 발견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최후 단계에 접어들면 그는 점점 자기 자신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무언가가 그를 강제로 그쪽으로 끌고 가기라도 하는 듯이 노예 같은 비굴한 태도로 모든 것에 끈덕지게 반론을 찾아 헤맸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찾아와서 만사를 금방 해결해버리고 만 최후의 날은, 그야말로 기계적으로 그에게 작용한 것이다. 마치 누군가가 그의 손을 잡고 무조건 맹목적으로, 초자연적인 힘으로 강제로 끌고 가는 것과 같았다. 그것은 흡사 옷자락이 기계 바퀴에 걸려서 그 속으로 말려 들어가는 것과도 비슷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이어서 두번째로 읽게 된 도스토예프스키의 두번째 작품입니다. (참고로 그 다음에는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읽어볼 예정입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작가의 작품을 유작부터 시작해 역순으로 읽게 되었네요.)

소설 속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니체의 초인사상에 흠뻑 빠진 듯한 서구 무신론적인 합리주의자입니다. 인간을 선과악을 초월한 정의를 구현하는 심판자로서 소수의 초인(소설에서는 나폴레옹을 예로 듭니다.)과 관습에 얽매이는 약하고 평범한 다수의 범인(凡人)(소설에서는 이(기생충)에 비유합니다)으로 구분짓고 자신을 그 선과 악, 법과 관습을 초월한 초인으로 인식하고 범인(凡人)인 고리대금업자 노파와 그의 여동생을 살해하는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전개됩니다.


그러나 극도의 자포자기, 이를테면 극심한 멸망의 시니시즘(自嘲心)이 불현듯 그를 사로잡고 말았다. 여기서 그는 될 대로 되라고 한 손을 내젓고는 그대로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발, 한시바삐 끝나주었으면··· ···.’

범죄 스릴러와 철학의 만남 : 걸작은 괜히 걸작이 아니다

“바로 그 점이 모든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한단 말이야. 내가 보기엔··· 교묘하지도 않고, 상습적인 것도 아니고, 분명히 처음 한 짓이야! 빈틈없이 계획된 범행, 교활한 악당의 짓이라기엔 어딘지 애매한 점이 있거든. 그러나 처음 하는 놈의 짓이라고 생각한다면, 단지 우연이란 것이 놈을 불행에서 구해냈다고 볼 수 있지. 우연이란 무슨 짓인들 못하겠나? 생각해보게, 놈은 어떤 방해가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았거든! 더구나 그 솜씨를 보란 말이야. 겨우 10루블이나 20루블쯤밖에 안 되는 물건을 꺼내어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노파의 트렁크에서 누더기를 뒤졌을 뿐이야. 그런데 옷장 윗서랍의 상자 속에는 증권 같은 것을 빼고도 현금만 1천500루블이나 있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제대로 훔치지도 못하고 그저 사람들만 죽인 거야! 처음 한 짓이야, 처음 한 짓이 틀림없어! 그래서 정신이 나갔던 거지! 계획적으로 도망친 것이 아니라, 우연 때문에 도망칠 수 있었던 거야!”


주인공은 자신의 사상대로 법과 관습을 초월하여 성공적인(경찰에 붙잡히지 않고)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이 죄를 지었지만 벌을 받지 않는 상황속에서 주인공 내면에서의 갈등이 시작됩니다. 아무렇지 않게 살인을 감행할 수 있도록 내면에 자리한 초인이 명령했다면, 이 후 그의 마음을 계속해서 괴롭히는 양심의 명령 역시 내면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언제나 영원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관념으로서 무언가 크고 거창한 것으로 상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째서 반드시 거창한 것이어야만 합니까? 어디 한번 그런 것 대신에, 시골 목욕탕같이 그은 좁다란 방이 있고 구석구석에 거미가 줄을 치고 있는 그런 것이 바로 영원이라고 상상해보십시오. 실은 이따금 그런 것이 내 눈에 가물거릴 때가 있거든요.”


이 대목에서 니체의 무한회귀 사상을 연상시키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분명 《죄와 벌》(1866) 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878)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5) 보다 10년 이상 먼저 쓰여졌다는 점을 미루어 봤을 때 어찌보면 무한회귀에 대한 고민을 앞서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최후의 순간까지도 이러한 결말을 전혀 예기치 못했다는 점이다.

절망 가운데 희망이라는 모순적인 존재 소냐를 만나고

라스콜니코프는 살인을 저지른 뒤 그의 구원을 돕는 조력자이자 고해성사를 받아주는 존재, 죄와 벌에 대한 반대되는 입장을 가진 주인공 소냐를 만나게 됩니다. 그가 바라본 소냐는 ‘이 여자(소냐)에게 세 가지 길이 있다 운하에 몸을 던지든지, 정신병원에 들어가든지, 그렇잖으면 음탕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라고 묘사할 정도로 절망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가장으로 폐병에 걸린 계모와 동생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창녀로 살고 있는 소냐는 죽고싶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그 절망 가운데 하나님의 기적을 바라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마치 진흙 속에 피어나는 연꽃과 같은 존재로 묘사됩니다.

절망할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끝내 사랑을 실천하고 실현하며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은 라스콜니코프의 삶의 모습과 대조되고, 라스콜니코프는 결국 그의 죄를 자수하기로 결심합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이게 전부에요"
...
비뚤어진 촛대에 꽂힌 타다 남은 촛불은 이 초라한 방에서 영원한 책을 읽기 위해 기묘하게 만난 살인자와 매춘부를 희미하게 비추면서 이미 오래전부터 꺼지려고 가물거리고 있었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수를 결심한 그날 밤 소냐가 그에게 읽어준 성경구절이 "죽은 나사로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이는 '나사로의 병이 죽을 병은 아니라고 했다면 과연 인간에게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키에르케고르의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의 모티브가 되었던 구절이기도 한데요,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절망, 곧 인간의 자기 소외이며 이를 통한 신과의 단절로 인한 영원한 죽음을 의미하는데, 이 소설에서 소냐는 인간성을 상실하고 절망하는 라스콜리니코프의 고통을 공감하고 위로하며 신 앞에 있는 그대로 나아가 용서를 구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돕습니다.

불행한 사나이에 대한 최초의 감성적인 괴로운 동정이 가라앉자, 다시금 살인자라는 끔찍스런 관념이 그녀의 가슴을 때렸다. 돌변한 그의 어조에서 그녀는 문득 살인자의 음성을 들었다

그녀는 그에게 최종선고이자 구원이었다.

소냐는 그에게 확고부동한 선고였고 변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네거리에 서서 모든 사람 앞에 고개를 숙이고 땅에 입을 맞추세요. 당신은 대지에 대해서도 죄를 범했으니까요. 그리고 온 세상을 향해 큰 소리로, 나는 살인자입니다, 하고 말하세요.’


소냐의 도움으로 그는 자수를 통해 그동안 그를 짓누르던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이 소설은 초인사상과 기독교 신앙의 대립 끝에 결국 신앙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들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으나 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 다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두 사람 다 파리하게 야위어 있었으나, 그 병들어 지친 창백한 얼굴에는 새로운 미래로의 서광, 새 생활에 대한 완전한 부활의 서광이 빛나고 있었다. 그들을 부활시킨 것은 사랑이었다. 그리고 한 사람의 마음은 또 한 사람의 마음을 위해서 영원한 삶의 원천이 된 것이다.

클래식은 죽지 않는다, 다만 계속 우리에게 흐르고 있을 뿐

“톨스토이라는 거대한 산봉우리가 아직도 지평선을 가로막고 서 있다. 그러나 산악 지대에 가면, 산에서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눈앞에 가로막은 산봉우리로 인해 보이지 않던 더 높고 웅대한 준봉이 그 뒤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될 때가 있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진취적인 정신을 가진 몇몇 사람들은 이미 거인(巨人) 톨스토이의 배후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웅장한 모습이 점점 커져감을 느낄 것이다. 아직도 반은 가려져 있는 준봉, 신비에 넘친 연산(連山)의 하나, 이것이 바로 도스토옙스키다. 오늘날 유럽의 갈증을 면하게 해주는 가장 큰 대하 중의 몇몇은 거기에 하원(河源)을 박고 있다. 입센이나 니체와 비견할 수 있는 것은 톨스토이가 아니라 도스토옙스키다. 그는 입센과 니체와 마찬가지로 위대하고, 아마 이 세 사람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물이리라.” - 앙드레 지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의 가치는 무엇보다 그의 깊이있는 철학과 통찰력을 담아낸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기까지 하다는 점입니다. "신 앞에 선 단독자"와 "신을 죽인자"를 대비시키며 이러한 장편소설을 완성한 그는 어쩌면 키에르케고르나 니체의 철학서보다 더욱 영향력있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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