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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철학종교

팡세 - 블레즈 파스칼 ch.3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by Caferoman 2021. 8. 27.

독서노트

만물은 무에서 나와서 무한으로 뻗어 간다. 이 엄청난 과정을 누가 따라갈 수 있겠는가? 이런 불가사의를 만들어 낸 주인공 말고는 아무도 그 신비를 이해할 수 없다.

철학자들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 이더러 하나님께 가야 한다고 외치는 것도 나쁠 것은 없다. 자신을 제대로 아는 이에게 그리 말하는 것 역시 나쁠 것은 없고.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이 인용구는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 물리학자 막스 보른(Max born)에게 쓴 편지의 일부로 아인슈타인은 "양자 이론은 많은 결과를 낳지만 신의 비밀에 가까이 다가가게 해 주지는 못한다"며 "어떤 경우에도 나는 신이 우주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라고 전했습니다. 물론 후에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이나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 등에 의해 이 언급은 부인되었지만 이 언급 가운데서 말하고 있는 신에 대한 관점은 파스칼이 바라보는 신에 대한 관념과 대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박하는 모든 사람은 불확실한 것을 얻기 위해서 확실한 것에 돈을 건다."

나는 기독교를 잘못 보고 참이라고 판단하는 쪽보다 그릇된 줄 알고 지내다 뒤늦게 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편이 훨씬 더 두렵다.


신의 존재를 믿느냐 마느냐에서 당위성과 그 증명의 문제를 떠나 "안믿는다고 큰일은 아니지만 믿는다고 손해 볼 건 없잖아?"라는 확률적 접근을 시도했던 철학자가 바로 파스칼입니다.

다음은 신의 존재를 두고 도박을 한다면? 에 관한 유명한 구절의 일부입니다.


신의 존재 여부를 이야기해 보자. 그러나 우리는 어느 쪽으로 기울 것인가? 이성은 이 문제를 결정하지 못한다. 무한한 혼돈이 우리를 갈라놓을 따름이다. 무한한 거리의 반대쪽 끝에서 동전이 던져지고 앞면, 또는 뒷면이 나올 것이다. 어느 쪽에 걸겠는가? 이성은 어느 한쪽을 선택하도록 만들 수 없다. 이성은 어느 한쪽이 틀렸음을 증명해 보일 수도 없다. 그렇다면 선택한 이를 잘못했다고 비난하지 말라. 당신 역시 거기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지 않은가! “옳다. 하지만 이 한 건의 선택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어찌 됐든 무언가를 선택했다는 점을 탓할 뿐이다. 앞면을 고른 쪽이나 뒷면을 택한 쪽이나, 똑같이 잘못했다. 둘 다 그릇된 행동을 한 것이다. 바른 처사는 어느 쪽에도 걸지 않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인간은 반드시 어느 쪽엔가 걸어야 한다. 이미 판에 끼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럼 어느 편을 선택하겠는가? 어차피 택해야 한다면 어느 편이 가장 적은 이익을 주는가? 잃을 수 있는 것은 진실과 선 두 가지다. 걸어야 할 것 역시 두 가지다. 하나는 이성과 의지이고, 다른 하나는 지식과 행복이다. 인간의 본성은 실수와 비참한 처지, 그 둘을 피하려 한다. 선택을 피할 길은 없으므로 어느 한쪽을 택하고 나머지를 버렸다고 해서 이성이 멸시당할 일은 이제 없다. 한 가지 사항은 말끔히 정리되었다. 하지만 행복은 어찌할 것인가? 동전 앞면에 걸 때, 즉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쪽을 선택할 때 따라올 득실을 따져 보자. 두 경우를 예측해 보자. 이기면 전부를 얻고 지더라도 잃을 것이 없다. 그렇다면 망설이지 말고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쪽에 걸라. “멋지다. 그래, 그쪽에 걸어야겠다. 하지만 너무 많이 거는 것 아닌가?” 찬찬히 살펴보자. 이기고 질 가능성은 똑같이 반반이므로, 한 생명으로 둘을 얻을 승산만 있어도 주저하지 않고 걸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셋을 얻을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럼 당신이 이 길을 택할 경우 어떤 손해를 보겠는가? 신실하고, 겸손하며, 감사할 줄 알고,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성심껏 돕고, 진실하고, 참된 친구가 될 것이다. 참으로 다시는 불건전한 쾌락과 영예, 근사한 생활을 즐기지 않는 반면, 전혀 다른 삶을 살지 않겠는가? 자신 있게 말하지만, 심지어 이생에서도 유익을 얻을 것이다. 걸음걸음 이 길을 내딛을 때마다 이득이 너무 확실하고 위험부담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미미해서 한마디로 아무 값도 치르지 않고 확실한 동시에 무한한 쪽에 삶을 걸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얼마나 황홀하고 기분 좋은 말들뿐인지!” “지금껏 들은 설명에 마음이 기쁘고 납득이 간다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모두가 이 무한하고 불가분 한 분에게 앞뒤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자신을 굴복시켰던 한 사람에게서 비롯되었고, 그분은 우리의 유익과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 또한 복종하게 하실 것이며, 그리하여 그 능력이 겸손함과 조화를 이루리라는 사실이다.”


 

고분고분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는 신

하나님의 지혜는 말한다. “진리든 위로든 인간들에게서 나오기를 기대하지 말거라. 너희를 지은 이가 바로 나이므로 너희가 누구인지 알려 줄 수 있는 이는 오직 나뿐이다.

“아무 생각 없이 고분고분 나를 믿게 할 뜻은 없다. 힘을 써서 억지로 복종하게 만들 계획도 없고. 그렇다고 만사를 시시콜콜 다 설명해 줄 마음도 없다. 이런 모순들을 조화시키기 위해 설득력 있는 증거, 즉 내가 어떤 존재인지 당신에게 확실히 알려 줄 내 위엄의 표징들을 뚜렷이 보이며,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기적과 증거들로 내 권위를 세울 것이다. 당신으로서는 내가 가르쳐 준 것들이 참인지 아닌지 가릴 능력이 없다는 것 말고는 부인할 근거를 찾지 못할 터, 자연히 그 가르침들을 믿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을 대속하여, 길을 찾는 이들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 주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은총을 받기에 한없이 합당치 않음을 스스로 드러내 보였으므로, 하나님이 어떤 이들에게는 값없이 자비로 베푸시는 은총을 다른 이들에게는 그 마음의 완고함으로 인해 거절하시는 것은 지극히 타당한 일이다.


파스칼에게 하나님이란 표정을 읽을수 없는 포커페이스의 갬블러, 혹은 가장 완벽한 등장과 계시를 소망하는 완벽주의자였을까요?
우리가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또 알 수 없는 신에 대한 진리는 구하는 자에게만 내려진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더없이 완악한 이들의 고집을 꺾으려 하셨다면, 자연계의 격변이 일어나 천둥번개가 삼엄하고, 죽은 이들이 일어나며, 앞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 눈을 뜨고 주님을 바라보게 될 마지막 날에 임하시듯, 그 본질에 관한 진리를 의심할 수 없을 만큼 명명백백하게 자신을 드러내시기만 해도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바라는 방식이 아니었다. 주님은 온유하게 오셨다. 숱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너그러운 처분에 합당치 않음을 드러냈으므로 그들이 바라지 않는 축복은 거두길 원하셨다. 그러기에 확연히 거룩하며 누구에게나 절대적인 확신을 줄 법한 방식으로 나타나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심으로 기다리는 사람들마저 감지할 수 없을 만큼 은밀하게 오시는 것도 마땅치 않았다. 그런 이들에게는 완벽하게 자신을 알리고 싶어 하셨다. 결국 전심으로 구하는 이들에게는 공개적으로 나타나시되 온 마음을 다해 피하는 이들에게는 드러나지 않고자 하셨다. 구하는 이들에게는 보이고 마다하는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증거들을 주셔서 자신을 정확하게 알리셨다. 오직 보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는 넉넉한 빛이, 정반대 성향을 가진 이들에게는 넉넉한 어둠이 있다.

 

자, 철학책인 줄 아셨겠지만 이제부터 설교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비참함을 아신다. 이 하나님은 그야말로 인간을 비참한 처지에서 건져 줄 구세주시다. 따라서 인간의 사악함을 알 때에만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스스로 얼마나 비참한 신세인지 모르는 채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주님이 아니라 자신을 영화롭게 한다. “이 세상은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고전 1:21, 새번역).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제대로 모르는 채 하나님을 알면 교만해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의 비참함을 알면 낙담할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균형을 잡을 수 있다. 그분은 하나님만이 아니라 우리의 비참함도 알려 주시기 때문이다.


팡세에서 줄곧 다루었던 인간의 비참함은 그 균형을 잡아줄 이가 예수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호메트가 인간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성공의 길을 따랐던 반면, 예수는 인간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죽음의 길을 좇았다. 한마디로 둘 사이의 차이가 너무 크다. 하지만 마호메트처럼 했더라면 예수도 성공했으리라고 결론짓기보다는 마호메트가 성공했기에 예수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고 해야 마땅하다.

모순의 근원 :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낮아지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두 가지 본성. 세상에 두 번 오심. 인간 본성의 두 가지 상태. 자신이 죽임 당함으로써 죽음을 이기신 메시아.


파스칼은 짧은 문장 속에 말하고자 하는 바를 위트 있게 압축하여 표현할 줄 원조 트위터리안이었습니다. 위의 글들은 모두 트윗 하나로 압축하기에 적합한 문법으로 저자의 생각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신은 숨어 있다. 따라서 신이 숨어 있다고 말하지 않는 종교는 참이 아니며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 종교 또한 아무런 가르침을 주지 못한다. 오직 기독교만 이 두 조건을 다 충족시킨다.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 45:15).

요한복음 8장. 〔30절.〕 “이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 말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아무에게도 종노릇 한 일이 없는데’ ”(새번역). 제자와 참제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진리가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스스로 자유로우며 제힘으로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장담하는 이들은 분명 제자이지만 참제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이 놀랍다.

이 종교가 쉴 새 없이 공격을 받으면서도 어김없이 살아남았다는 것은 놀랍고, 유례를 찾을 수 없으며, 온전히 거룩한 사실이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여러 차례 완전히 무너지기 직전까지 몰렸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이 놀라운 방식으로 권능을 보이셔서 도로 살려 내는 상황이 되풀이되었다. 압제자의 뜻에 머리를 조아리거나 굴복하지 않고 지금껏 살아 남았다는 것은 참으로 기가 막힌 노릇이다. 국가라면 필요에 맞춰 법을 바꿔 가며 생존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몽테뉴가 동그라미로 표시한 부분을 보라.)

초대교회가 올바르지 못했더라면 〔오늘날의〕 교회는 무너져 버렸을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가 잘못되어 있다면 그것은 사정이 다르다.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가장 중요한 원칙, 초대교회가 지녔던 믿음의 원칙이 언제나 자리 잡고 있어서 초대교회의 뒤를 따르고 순응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다 정리하고 교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초대교회를 전제하고 신경을 쓰지만, 초대교회는 미래교회를 상정하거나 염두에 두지 않는다.


파스칼은 종교의 형식적인 측면에서 그 원류가 되었던 초대교회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근본(Base)과 원조(Original)가 존재한다는 것은 교정 가능하고 회복 가능한 기준점이 존재하는 것임을 의미함을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희한하다. 스스로 악하고 무가치하며 심지어 혐오스러운 존재임을 인정하길 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같이 되기를 소망하라고 주문한다. 하지만 그런 균형추가 없다면, 한없이 자만해서 끔찍한 허영덩어리가 되거나 더없이 낮아져서 참혹하리만치 비참해질 것이다.

 

세상에는 딱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들과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죄인들이다.

인간은 정욕을 풀어놓아 제멋대로 날뛰게 하고 양심을 억누른다. 거꾸로 해야 마땅하건만.

유대인들은 그분을 죽였다.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을 셈으로 벌인 짓이었지만, 결과를 놓고 보면 그분이 메시아라는 결정적인 표식을 선사하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한사코 그분을 인정하지 않으려다가 스스로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증인이 되었다. 그렇게 죽이고 부인하는 유대인들을 통해 예언은 성취되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살아서 내일을 보는 쪽보다 신앙 쪽이 더 확실하다. 내일을 대할 수 있을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러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데는 두말이 필요 없다. 하지만 신앙은 경우가 다르다. 참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분명코 참이 아니라고 감히 장담할 수 있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내일을 바라보며 일하고 닥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을 합리적인 행동으로 본다. 이미 설명했듯이 저마다 확률에 따라 위험부담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팡세를 읽다 보면 "잘 모르겠지? 일단 여기에 걸어!"라고 약을 파는 파스칼의 논리에 묘하게 빠져들어 가는 것 같습니다.

이성, 습관, 감동(inspiration). 믿는 데는 이 세 가지 길이 있다. 이성을 지닌 유일한 신앙인 기독교는 감동 없이 믿는 이들을 진정한 자녀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성과 습관을 배척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겸손을 통해 감동에 우리를 맡기는 동안, 증거들에 마음을 열고 습관으로 입증해 보여야 한다. 그래야만 참되고 유익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

흔히 “신앙을 가지면 쾌락을 좇는 삶을 당장 집어치울 것”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나로서는 “쾌락을 좇는 삶을 내버리면 곧바로 신앙을 가질 것”이라고 말해 주고 싶다. 시작은 당신 몫이다. 신앙을 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하고 싶다. 하지만 내게는 그럴 힘이 없으며 당신이 하는 말을 검증해 볼 능력도 없다. 하지만 당신은 쾌락을 쉽게 포기할 수 있고 내가 진실을 말하는지 여부를 시험해 볼 수도 있다.


약을 파는 파스칼의 솜씨가 아주 대단합니다. 이 정도 말발이라면 전도왕이 되었어야 마땅할 텐데... 정작 당시에는 키보드 워리어로 논쟁에 힘쓰셨으니... 조금은 그 재능이 아깝기도 합니다.

그 외 항목에 포함되지 않은 깨알 같은 파스칼의 드립

하나님 말고는 달리 기댈 데가 없을 때 교회의 상태는 가장 좋아진다.

고집불통의 다른 말, 회의론자.
데카르트, 쓸모없고 불확실한.

작품을 쓰면서 가장 나중에 깨닫는 것은, 가장 앞에 무엇을 두어야 하는가이다.

"어째서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는 거요?"
"당신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소?"
A : "그렇소."
"참으로 뻔뻔스럽구려. 그러니 합당치 않소."
B : "그렇지 않소."
"그럼, 그냥 합당치 않은 게로 군요.”

함께하기 좋은 것들

이 책이 마음에 드셨다면

필로테라피 시리즈를 통해서 다룬 적이 있었던 니체와 키에르케고르의 개론서를 추천합니다.
팡세라는 작품에 좋아요를 누르고 싶으시다면 절망한 날엔 키에르케고르 - 다미앵 클레르제-귀르노
싫어요를 누르고 싶으시다면 우울한 날엔 니체 - 발타자르 토마스
를 추천합니다.

팡세 - 파스칼 지난 글 모아보기

팡세 - 블레즈 파스칼 ch.1 : 인간은 위대하고 비참하다
팡세 - 블레즈 파스칼 ch.2 : 정의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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