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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철학종교

팡세 - 블레즈 파스칼 ch.1 : 인간은 위대하고 비참하다

by Caferoman 2021. 8. 12.

독서노트

블레즈 파스칼 Blaise Pascal, 1623-1662

길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수학, 물리학, 신앙적인 변증과 문학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열두 살에 혼자 힘으로 유클리드 기하학 12번 명제를 증명해 냈으며, 몇 년 뒤 파스칼정리를 담은 수학 논문 《원추곡선론》을 발표했다. 컴퓨터의 기초가 된 계산기를 발명하고, 근대 확률 이론의 기초를 세운 천재 수학자다. 또한 오늘날 자동차나 비행기 기술에 꼭 필요한 이론인 ‘파스칼의 원리’를 발견한 물리학자요, 후대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 철학자였으며, 합승 마차 체계라는 오늘날의 대중교통 개념을 창시한 사람이기도 하다. 파스칼은 1623년, 프랑스 오베르뉴 지방의 클레르몽페랑에서 지방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 살 때 어머니를 잃고, 교육열이 높고 엄격한 아버지, 누나와 여동생 사이에서 외아들로 자랐다. 1646년에 첫 번째 회심을 경험했으나 아버지의 죽음 이후 천재적인 활약으로 높아진 명성에 기대 한동안 귀족 사교생활에 빠졌다가, 1654년에 결정적인 두 번째 회심을 했다. 그 이후로 그는 자신의 천재성을 신과 인간에 대한 탐구에 쏟아부었다. 가톨릭교회의 내부개혁주의 운동에 참여하면서 더욱 치열하게 참신앙과 교회를 고민했으며, 거기서 《팡세》와 더불어 문학적 명성의 토대를 이루는 작품인 《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가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대단한 문장가(文章家)였던 파스칼을 프랑스 문필가들 가운데 단연 으뜸으로 꼽는다. 긴 투병 끝에 1662년 39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파스칼 : 핵인싸가 되지 못한 아웃사이더 철학자

이 책을 종교라는 카테고리에 넣어야 할지 아니면 철학이라는 카테고리에 넣어야 할지 잠깐 고민했습니다만 삶과 존재를 다루는 측면에서 이 둘의 구분은 무의미할 것이라는 판단에 이책을 철학이라는 카테고리에 분류했습니다.

철학자의 계보를 보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한 철학자들의 경우 이후의 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며 그 철학의 사조와 계보를 이어가는 것을 볼수 있는데요, 그에 반해 앞서 다루었던 키에르케고르나 파스칼의 경우 종교적인 색채가 짙은 이유에서인지 철학사에서 다소 아웃사이더 취급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만 이렇게 《팡세》라는 걸작을 남긴 것만으로도 이 철학자는 진지하게 다룰 필요가 있는 핵심인물입니다.

사실 그의 철학이 저평가를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종교적인 색채 외에도 잡학다식했던 그의 앒에 대한

오지랖

열정도 한 몫을 했는데요, 서두에서 언급한 파스칼의 약력대로 명석한 수학자이자 과학자, 컴퓨터 공학자이기까지 했던 그였기에 그의 다른 수 많은 업적이 그의 철학의 가치를 퇴색시킨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다재다능한 또다른 파스칼의 팀킬이라고 할까요?)

 

“인간은 위대하고 비참하다.”

인간은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온 자연을 통틀어 가장 연약한 존재다. 하지만 생각하는 갈대다.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데서 시작한다. 비참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비참하지만, 비참하다는 점을 안다는 데 위대함이 있다.

 

인간을 바라보는 파스칼의 시선은 늘 일관적이었습니다.
인간은 위대하고 비참하다. (그 각각이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그러한 인간의 본성에 비추어 신과 인간을 설명하는 논리는 간략히 아래와 같습니다.

 

1부: 하나님 없는 인간의 참상. - 본성의 타락. 본성 자체가 증명함.
2부: 하나님을 가진 인간의 행복. - 구주의 존재. 성경이 입증함.

 

여기서 기독교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독자에게 그의 철학이 그저 기독교를 옹호하기 위한 종교철학 정도로 폄하될 여지가 존재하는데요. 파스칼은 예수라는 존재를 떠나서 기독교와 더 나아가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역설합니다.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뿐만 아니라 소용없는 짓이기도 하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 비참한 까닭은 마음 한복판에 스스로를 둔 탓이며,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사람의 행복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고 완벽한 사람이셨던 그분의 삶을 따라가기 위해 힘쓴 덕이다. 우주의 창조주는 유한한 피조물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며, 인간을 지으신 그분 안에는 누구나 따라야 할 ‘자기애와 독선에 눈멀지 않은’ 본보기가 있다.

인간은 얼마나 슬기롭지 못한지 제 몫이 아닌 시간 속을 헤매고, 반면에 유일하게 스스로 어찌해 볼 수 있는 시간에 관해서는 조금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는 수단이며 미래만이 목표가 된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사는 게 전혀 아니며 살기를 바랄 뿐이다. 어떻게 행복해질까 늘 계획만 세우고 있으니, 당연히 정말로 행복해질 리가 없다.

 

성경의 증거로써의 가치

증거의 유용함을 보여주는 편지, 기계적인 논리로 믿음은 증거와 다르다. 증거는 인간의 소산이지만,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이는 하나님이 친히 인간의 마음에 심으신 믿음이며, 이 믿음은 흔히 증거를 도구로 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롬 10:17). 이 믿음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으며 “나는 안다”가 아니라 “나는 믿는다”고 고백하게 만든다.

 

무언가를 증명하여 이해하는 영역과 무언가를 믿어서 이해하는 영역에는 종교를 이해하는데에 있어서 중요한 차이가 된다는 점을 파스칼은 언급합니다. 이는 키에르케고르가 『철학적 단편에 붙이는 비문학적 해설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종교는 불확실성을 염두해두고 믿기로 선택하는 용기에서 나온다는 점이 논리와 증거에 의해 발생하는 믿음과 구분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불확실한 것만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내면에서 탐구를 향한 열정이 높아져간다. 진실은 객관적으로 불확실한 것을 대상으로 삼아 과감하게 무한히 탐구하는 것이다. (……) 그런데 진실의 정의는 신앙의 정의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위험이 없으면 신앙도 없다. 신앙은 무한한 내면의 열정과 객관적인 불확실함 사이의 모순이다. 만일 신을 만질 수 있다면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신을 믿어야 한다. 내 신앙을 계속 간직하고 싶다면 객관적인 불확실함이 여전이 있다는 점을 끝없이 염두에 두어야 한다.”(『철학적 단편에 붙이는 비문학적 해설문』, 키에르케고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존재

더러는 말한다. “당신은 어려서부터 상자 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빈 상자라고 믿어 왔기에 진공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감각이 빚어내고 습관이 힘을 보탠 착각에 지나지 않아서 반드시 과학으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또 한쪽에서는 말한다. “학교에서 진공은 없다고 배우면서 당신의 상식은 변질되고 말았군요. 그릇된 인상이 주입되기 전까지 당신은 분명 선명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원래 상태로 되돌려 상황을 바로잡아야겠어요.” 누가 속이고 있는가? 감각인가, 아니면 교육인가?

인간은 은혜를 통해서가 아니면 뿌리 뽑을 수 없는 태생적인 오류로 가득한 존재다. 아무것도 인간에게 진리를 알려 주지 않는다. 다들 속이려 들 뿐이다. 진리의 두 원천은 이성과 감각이지만, 어느 쪽도 진짜가 아니며 서로 기만하는 일에 골몰한다. 감각은 거짓된 겉모습으로 이성을 속인다. 그러나 감각 역시 영혼을 속여 넘긴 그대로 영혼에 속아 넘어간다. 되갚음을 당하는 것이다. 열정은 감각을 뒤흔들어 그릇된 인상을 빚어낸다. 양쪽 다 앞다투어 상대를 홀리고 기만한다. 하지만 이렇게 이질적인 기능들이 이해에 이르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오류는…… (기만의 힘에 관한 글은 바로 이 대목에서 시작해야 한다.)

인간의 인식의 틀 안에서 또는 오감으로 느끼는 범주 안에서 세상을 이해하는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과학만능주의 시대를 살아가던 파스칼은 주장합니다. 단순한 불가지론으로 볼수도 있으나 저는 이 구절을 보면서 성서의 아래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것이 아니니라 - 히브리서 11:1-3 KRV

“내 양을 치라(요 21:16). 네 양 말고”

 

팡세의 출발점은 나약한 인간의 지성을 인정하는데에서 시작한다

성경의 전도서는 하나님 없이 사는 인간은 무지하며 어쩔 수 없이 불행하다고 말한다. 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으되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누구라도 불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행복해지길 바라며 진리를 확인하기를 바라지만 하나같이 진리를 알 능력이 없으며 알고자 하는 욕구를 버리지도 못한다. 심지어 회의를 품을 수도 없다.

 

트위터의 아버지라고 할수 있는 팡세는 짧게짧게(때로는 길게) 적어 둔 파스칼의 단상을 모은 책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는 하나의 큰 흐름을 따르는 장편 소설이라기 보다는 그날 기분따라 자신의 생각을 적어둔 파워블로거의 블로그 같은 느낌입니다. 그래서인지 책에 대한 리뷰를 중간에 끊어도 뭔가 불편함이 없네요.

단문단문이긴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이 상당한 만큼 글의 호흡이 너무 길어지지 않는 선에서 앞으로 계속 리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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