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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철학종교

팡세 - 블레즈 파스칼 ch.2 : 정의란 무엇인가

by Caferoman 2021. 8. 19.

독서노트

힘이 없는 정의는 무기력하고, 정의가 없는 권력은 폭압적이다.

정의를 따르는 것은 옳고, 권력을 따르는 것은 필연이다. 힘이 없는 정의는 무기력하고, 정의가 없는 권력은 폭압적이다. 힘이 없는 정의는 도전받는다. 사악한 자들은 언제 어디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의가 사라진 권력은 맹렬한 비난에 맞닥뜨리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정의와 권력을 조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정의의 힘을 세게 하고 권력을 정의롭게 해야 한다.

정의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권력은 쉬 알아볼 수 있어서 논쟁할 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의는 힘을 받지 못한다. 권력은 올바름을 불의라고 부르고 스스로 정당하다고 주장하면서 정의에 도전하는 까닭이다.
이처럼 정의에 힘을 싣기가 어려우므로 권력을 정의롭게 해야 한다.

"정의는 (휘두를) 힘이 없다. 정의가 권력을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권력이 정의롭게 되는 것이 더 쉽지 않을까?"라고 파스칼은 말합니다. 부조리하고 억압적인 세상을 바라보는 파스칼의 열정과 동시에 약간은 포기한 듯한 파스칼의 체념이 느껴집니다.

인간은 이성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진리를 알게 된다.

인간은 마음으로 진리를 깨달을 때 아무 상관이 없는 이성이 그 원리들을 반박하느라 헛심을 빼기도 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이성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는 지식이 존재한다는 것이 인간 이성의 연약함이나 모든 인간 지식의 불확실성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며, 공간, 시간, 운동, 수와 같이 마음이 인식하는 것들은 이성을 통해 얻어 낸 어떤 지식 못지않게 확고함을 보여준다고 주장합니다.

공간 속에 삼차원이 있으며, 수가 무한하다는 것을 마음으로 느끼고 나면, 이성이 이어받아 한쪽이 다른 한편의 곱절이 되는 제곱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원리를 느끼고 나서 명제를 입증하는 식인데, 이성과 마음이라는 다른 수단을 통하기는 하지만 둘 다 확실하게 제 몫을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러한 (마음과 이성의)역할 가운데서 끊임없이 파스칼이 이성에게 경고하는 것은 "함부로 나대지 말라"입니다.
즉, "인간 스스로를 겸손하게 만드는 구실을 할 뿐 확실한 진리를 흔들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무능은 만사에 재판관 노릇을 하겠다고 덤비는 이성을 겸손하게 만드는 구실에 오로지할 뿐, 확실한 것들을 흔들려 해서는 안 된다. 마치 이성이 무언가를 학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라도 한 것처럼! 도리어 이성 따위는 눈곱만큼도 필요 없고 본능과 감성만으로 만사를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자연은 그런 축복을 베풀기를 거절했다. 대신 이런 종류의 지식은 아주 조금만 허락했다. 그 밖에 다른 지식들은 전부 이성을 통해서만 체득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마음을 움직여 신앙적인 믿음을 심어 주신 이들은 복받은 인간일 수밖에 없으며 그야말로 정당하게 확실하다는 느낌을 갖는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이들로서는 하나님이 마음을 움직여 믿음을 허락하실 때까지 이성적인 추구를 통해서만 그런 신앙을 가질 수 있다. 주님이 베푸시는 믿음이 아니라면 그저 인간적일 뿐 구원에는 보탬이 되지 않는다.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나약한 인간이여

인간의 위대함을 지적하지 않은 채 인간이 짐승과 얼마나 비슷한지 지나치게 낱낱이 설명하는 것은 위험하다. 저열함을 말하지 않고 위대함만을 과하다 싶게 이야기하는 것 역시 위험하다. 양쪽을 다 모르게 내버려 두는 것은 더더욱 위험하지만, 둘 다 제시하는 것은 더없이 유익하다.

비참함과 위대함은 서로가 서로의 매조지(단도리)가 될 수 있으므로, 한편에서는 인간은 그 위대함을 이용해 비참하다는 결론을 내리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비참에 근거를 둔 증거를 제시하면서 위대함을 힘주어 강조하는 쪽으로 더 기울곤 한다. 이쪽에서 위대함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거론하는 사안들이 다른 쪽에서 인간은 비참하다고 결론짓는 논거로 쓰일 따름이다. 높은 데서 떨어질수록 더 비참하고 그 반대 역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둘이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돌아간다. 통찰이 깊어질수록 내면에 비참함과 위대함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까닭이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인간은 비참한 사실을 알기에 비참하다. 하지만 비참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진정 위대하다.

'비참함과 위대함이 공존하는 인간' 이것이 팡세에서 말하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참함 가운데 곰곰히 생각을 거듭할 수록 함께 존재하는 위대함을 발견하게 되는, 스스로 비참한 존재임을 알기에 위대한 인간이라는 존재를 보며 예레미야 애가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나는 늘 말하였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 - 예레미야 애가 3:21-24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부모들은 혹시라도 자녀들의 태생적 사랑이 말끔히 사라질까 봐 걱정한다. 이렇게 지워지기 쉬운 본성이라면 그 실체는 무엇일까? 습관은 첫 번째 본성을 망가뜨리는 제2의 본성(천성)이다. 하지만 본성이란 무엇인가? 어째서 습관은 태생적이 아닌가? 습관이 제2의 본성이듯, 본성 자체가 그저 첫 번째 습관은 아닌지 몹시 두렵다.

인간의 본성은 두 가지 방식으로 헤아려 볼 수 있다. 존재 목적에 비추어 인간은 위대하며 견줄 데가 없다고 생각하든지, 달리거나 낯선 이들을 경계하며 짖는 모습을 보고 말과 개의 본성을 판단하듯 인간을 덩어리로 파악해서 극도로 비참하고 저열하다고 보든지, 둘 중 하나다. 이 두 접근 방식은 서로 상대편의 가설을 부정하는 탓에 철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시각과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회의론자들의 말 가운데 자잘한 논점들은 제쳐 두고 제일 강력한 주장을 꼽는다면, 태생적인 직관을 통하지 않고는 (믿음과 계시를 떠나서는) 이러한 원리들이 참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태생적인 직관 역시 스스로 참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단 한 점도 내놓지 못한다. 신앙을 떠나서는 인간을 선한 하나님이 창조하셨는지, 악한 마귀가 지었는지, 아니면 그저 우연히 태어났는지 확신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타고난 원리들이 참된지, 거짓인지, 또는 불확실한지는 어디에 기원을 두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의심의 문제일 뿐이다.


신의 존재를 믿든 믿지 않든 그 양 극단이 존재할 뿐이며 그를 위해서 우리는 독단론자의 편을 들든 회의론자의 편을 들든 어느 한편에 서야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중립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대단한 회의론자이다. 저자는 "맞서지 않는 이는 확고한 지지자"라고 하며 진리 앞에 분명하고 당당한 자세를 취할 것을 요구합니다.

함께하기 좋은 것들

이 책이 마음에 들었다면

과학과 공학계에서는 핵인싸인 파스칼이지만 철학분야에서는 상대적으로 그만한 대우와 추종자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종교를 옹호하기 위한 철학이라는 선입견이 꽤나 떨쳐지지 않아서일까요?
그런면에서 파스칼을 보면 뭔가 비슷한 업계 비주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떠오릅니다.
그래서 파스칼의 종교를 옹호하는 태도가 불편하다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파스칼 같은 아싸 철학자를 좀 더 알아보고 싶다면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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