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훌륭한 삶이란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이다. - 버트런드 러셀
오늘 독서노트를 작성할 책은Bertrand Russell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Why I am not a Christian)>입니다. 참고로 저는 기독교인인데요, 제목에 낚여서 우연히 읽게 된 이 책은 기대 이상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진지하게 유신론 혹은 무신론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 방향성에 관계 없이 고민해야 하는 질문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과 사유의 시작점은 무신론자인 저자에게도 유신론자인 저에게도 의미 있었기 때문에, 물론 이 작가의 결론에 동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결론을 이끌어 가는 과정에서 묘한 공감을 했다고 할까요?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 1872년 5월 18일 영국 출생 ~ 1970년 2월 2일 사망
- 수학자, 철학자, 수리논리학자, 역사가이자 사회 비평가
- 1950년 노벨 문학상 수상
한마디로 이상하게 내 주위에만 흔하지 않은 엄친아/엄친딸 계열의 멀티 플레이어형 천재입니다.
그런 그가 풀어내는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한 (파토스를 잠시 배제한) 논리적 고찰은 분량이 많지 않은 책이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었습니다.
코끼리 잔등에 얹혀진 세상
세계는 코끼리의 잔등에 얹혀 있었으며, 코끼리는 거북의 잔등에 얹혀 있었다는 힌두교도의 생각과 꼭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거북은 어떻게 되었소?” 하면, 그 인도인은 “화제(話題)를 바꿔 봅시다”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종교 철학에 접근할 때 피해갈 수 없는 세상 모든 존재의 근원은 어디서 유래하는가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게 단백질 수프가 되었든 하나의 인격체가 되었든 최초의 존재가 어디서 기인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지나야 비로소 각자가 주장하는 신이라는 존재와 그 의미를 고민할 수 있습니다.
코는 안경을 끼기에 알맞도록 만들어졌다는 볼테르의 말을 다 아시지요. 이러한 재담은 18세기에는 엉뚱한 논리로 들렸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은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다윈 이후로 우리는 생물이 왜 주위 환경에 적응하게 되는가를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환경이 생물에 적합하도록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생물이 환경에 적응하여 갔기 때문이며, 이것이 적응의 기본 원리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목적의 증거도 없습니다.
비슷하게 질문을 던진다면 인간은 종교적인 행위(혹은 신앙이라고 표현되는 일종의 신념)에 알맞도록 만들어 진 것일까요?
아니면 인간보다 늦게 형성된 어떤 행위와 신념을 위해 인간이 맞춰서 만들어졌다는 말은 그저 억지일까요?
세계관의 차이와 무관하게 흥미로운 질문이 될 수 있는 구절입니다.
옳고 그른 것에 차이가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서 생겨났는가 그렇지 않은가? 만약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서 처음 생겨났다면, 그때는 하느님 자신에게는 그 차이가 없다는 이야기이니까, 하느님이 이야기한 선(善)이라는 말은 벌써 뜻이 없는 말이 되고 맙니다. 신학자들이 말하듯이 하느님을 선이라고 한다면, 옳고 그른 것은 하느님의 명령과는 상관없는 어떤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까닭은 하느님의 명령은 하느님이 단순히 이런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선한 것이며 악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위의 질문 역시 무/유신론자에 관계 없는 클래식이자 스테디 셀러(?) 질문입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왜 악을 허용하는가?"
"선과 악이 구분가능하다면 이 모두를 허용하는 신은 과연 선하거나 절대적이라 할 수 있는가?"
세상을 돌이켜 볼 때, 여러분은 인간 감정의 조그마한 발전도, 형법상의 모든 개정(改正)도, 전쟁을 적게 하는 모든 방안도, 유색 인종의 대우 개선을 위한 모든 대책도, 또는 노예제도의 완화나 이 세상의 모든 도덕적 진보도 세계의 조직화된 교회에 의하여 철저히 반대되어 왔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많은 교회로 조직된 기독교도의 종교가 세계의 도덕적 진보의 으뜸가는 적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는 것을 신중히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입니다.
기독교는 정말 그 경쟁자나 반대자보다 더 훌륭한 덕성을 표상(表象)하여 왔는가? 나는 정직한 역사학도라면 어떻게 그렇다고 주장할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보다도 박해를 더 쉽사리 가하는 것으로서 특색이 되어 왔다. 불교는 결코 박해를 가한 적이 없는 종교이다. 칼리프의 제국은 기독교 국가들이 유태교 민족이나 이슬람교 민족에게 대하던 것보다는 훨씬 친절하게 유태교 민족과 기독교 민족을 대하였다. 이 제국은 유태교 민족과 기독교 민족이 공물(貢物)만 바치면 괴롭히지 않았다. 반(反)셈족주의는 로마제국이 기독교화하던 순간부터 기독교에 의하여 촉진되었다. 십자군(十字軍)의 신앙적 열정은 유태인 학살로 나타났다. 드레퓌스*를 부당하게 고발한 것은 기독교도들이었으며, 그를 복권시킨 것은 자유사상가들이었다. 현대의 증오심은 유태인이 희생자일 때만 기독교도가 변호한 것이 아니라, 다른 관계에서도 그러하다. 콩고에 대한 레오폴드 황제 정부의 증오는 교회에 의하여 은폐되고 축소되었으며, 마침내 자유사상가들에 의한 선동으로 끝나고 말았다. 기독교가 도덕적 강화력을 향상시켰다는 주장은 오직 역사적 증거를 덮어놓고 무시하거나 날조하는 것으로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작가의 주장에 대해서 정말 입이 열개라도 할 말 없이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구문입니다.
기독교가 주장하는 바를 실행하고 증명해야 하는 교회와 교회권력은 (현대의 교회와 마찬가지로) '중간도 못하는','없으니만 못한' 부끄러운 역할을 했기에, 만약 러셀이 그런 이유로 기독교인이 되길 거부했다면 그것은 기독교인의 책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라고 생각하려는 찰나에 러셀은 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들이 교회에서 자기 자신을 비하(卑下)하며 가엾은 죄인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들을 때, 그것은 경멸해야 할 것으로 자존심이 있는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어서서 솔직하게 이 세상과 대면해야 하겠습니다.
책의 흐름을 따라 고민하면서 읽다보니 어느 순간 20세기 철학자와 티키타카를 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그렇다고 제가 러셀의 상대가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종교가 우리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나 자신은 도덕의 종교에 대한 의존도가 종교인들이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크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나는 어떤 극히 소중한 미덕(美德)들은 교리(敎理)를 받아들이는 사람들 속에서보다 이를 배격하는 사람들 속에서 더 찾아보기 쉽다고까지 생각한다. 이것은 특히 진실성이나 지적 성실성(知的誠實性)의 미덕에 해당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말하는 지적 성실성이란 말썽 있는 문제들을 증거에 따라 결정짓거나, 증거가 확실치 못할 때는 결정을 짓지 않고 두는 습성을 말한다. 이 미덕은 비록 독단적인 제도를 지키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과소평가를 받고 있지만, 내 마음에는 가장 큰 사회적 중요성을 띤 것으로서 기독교나 어떤 조직화된 신앙제도보다 세계를 더 이익되게 할 것으로 느껴진다.
러셀은 삶에서 우리의 고민으로 해결되지 않을 문제들을 신앙은 난해한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신이라는 존재에게 유보하는 태도를 지적합니다. 하긴 종교인으로서 "불가지론(不可知論)"을 남발하는 경향이 있지요.
(당장 저부터 그러한...)
모든 유대(紐帶) 중에서 가장 강한 공동운명체(共同運命體)의 유대에 의해서 동포와 결합된 자유인은, 새로운 시야가 항상 자기와 함께 있고 모든 일상의 일에 사랑의 빛을 던진다는 것을 발견한다. 인간의 일생은 밤새우며 먼 길을 걷는 것과 같은 것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적에 둘러싸여 피로와 고통에 괴로와하면서 소수의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누구도 오래 그곳에 머무를 수 없는 목적지를 항해 나아가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아감에 따라 우리의 동지는 한 사람씩 전능(全能)한, 말없는 죽음의 명령에 따라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우리가 동지를 도울 수 있는 것은 불과 잠깐 동안이며, 그 동안에 그들의 행복 혹은 불행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들의 길 위에 햇빛을 비추어 그들의 슬픔을 동정의 향기로 가볍게 하고, 부단한 애정과 순수한 희열을 주어 쇠진한 용기에 힘을 주고, 절망할 때 신념을 불어넣는 것이 우리의 생애가 되도록 하자.
음... 갈수록 러셀이 권유하는 인생관이 부담스러워 집니다.
뭔가 멋있어 보이기는 한합니다만 의외로 사람들은 러셀 당신처럼 강인하고 용감하고 이상적이지 않단 말입니다.
그렇게 인식으로 존재하지 않는 신(?)을 초월한 자유인으로서 저자는 말미에 이런 글을 남깁니다.
인간의 일생은 짧고 무력하다. 그와 모든 인류 위에, 더디기는 하지만 확실히 숙명이 무정하게 그리고 어둡게 내리누른다. 선악은 맹목적이고, 파괴는 무모하며, 전능의 물질은 그 잔학의 길을 뒹굴며 간다. 오늘은 가장 사랑하는 것을 잃도록 운명지어졌고, 내일은 내 몸도 암흑의 문을 빠져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아직 폭풍이 휘몰아쳐 오기 전에 그의 짧은 일생을 고매하고 고아(高雅)한 사상을 품고, 숙명의 노예가 갖는 겁많은 공포를 무시하고, 자기의 손으로 세운 전당에서 예배하고, 우연성의 제국(帝國)에 두려워함 없이 외부의 세계를 지배하는 변덕스러운 전제(專制)에서 해방된 정신을 유지하고, 인간의 지식과 비난을 잠시 동안 인정하는 불가항력에 당당히 도전하여 피로하기는 하겠지만 불굴의 아틀라스처럼 비정한 힘의 난폭한 행진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이상이 쌓아올린 세계를 혼자서 떠받치는 일이 앞으로의 일로서 남아 있을 뿐이다.
책을 다 읽고나서 내린 저의 결론은...
'저에게는 무신론자로 살 용기/능력이 없다'는 점입니다.
역설적으로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그냥 기독교인으로 살아야겠다'라고 결론이 나네요.
종교를 가지지 않는 것은 특정 종교를 가지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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