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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철학종교

능동적인 허무주의에 빠져보자 : 우울한 날엔 니체, 발타자르 토마스

by Caferoman 2022. 6. 16.

자음과 모음 필로테라피 시리즈 : 우울한 날엔 니체

차라투스트라가 전해준 능동적 허무주의란 복음

이 책에 대한 짧은 평을 우선 하자면
본 책은 니체의 명성과 그의 저서를 빌려 자기 하고 싶은 말을 신나게 휘갈겨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필로테라피 시리즈 중에서는 최악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책 덕분에 다른 니체의 저서와 니체에 관련한 책들을 찾아보게 해주었다는 점은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네요.
아무튼 이 책은 말하고자하는 바가 니체의 견해인지 아니면 니체를 등에 업은 작가의 생각인지를 구분해서 읽을 필요가 있는 책입니다.

신은 죽었다. 그러나 신의 그림자는 죽지 않았다

“당신은 아직도 당신 자신을 찾지 못했다. 대신에 당신은 나를 발견했다. 믿는 자들은 모두 다 이렇게 된다. 그래서 믿음은 그토록 가치가 없는 것이다. 지금 나는 당신에게 나를 버리고 당신을 찾으라고 명령한다. 당신이 나를 완전히 부인할 때 비로소 내가 되돌아올 것이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 서문, 4)

 

질병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 니체와 욥 그리고 파우스트

니체가 질병의 고통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이 책뿐 아니라 다른 책에서도 여러 차례 접할 수 있었는데요, 질병 가운데에서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강인한 인간성을 지키려는 그의 사투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구약 성경에서의 "욥"이 생각났습니다. 물론 질병의 고통 끝에 각자가 내린 결론과 결말은 달랐지만요.

“질병은 우리를 서서히 자유롭게 만든다. 질병은 나에게 모든 단절, 모든 폭력적이고 불쾌한 과정을 허용해준다. (……) 질병은 그와 동시에 내게 모든 습관을 뒤엎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 준다. 질병은 나에게 태만을 허용하는 동시에 명령한다. 질병은 나에게 늘어진 자세, 여가, 기다림과 인내에 대한 의무를 선사한다. 그러나 사유로 인도하는 것이야말로 질병의 가장 큰 선물이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4)

 

질병은 우선순위를 바꿔준다 우리가 약해져서 고통으로 꼼짝하지 못할 때 관점이 변화하게 된다. 이전에 우리가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이제는 우스꽝스럽게 보이고 반면에 사소하게 여겼던 것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무시했던 것들이 이제 중요한 문제가 된다. 질병은 우리를 우리 자신과 숨 막힐 정도로 가깝게 만드는 동시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과 가장 멀리 떨어지게 만든다. 이제 사물은 가장 간결하고 냉정한 관점에서 보이게 된다. 고통의 프리즘을 통과한 이 관점은 우리가 사물을 충분히 명료하고 정확하게, 더구나 객관적으로 보게 해준다.

“질병은 촉발하는 힘이다. 그러나 이 활기를 위해서는 충분히 건강해야 한다.”(『유고(1888)』, 15, [118]).

“삶은 추와 같이 고통과 권태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1. c. § 57).

니체의 저서에서 볼수 있는 그의 질병에 대한 태도는 질병에게 잠식되지 않고 오히려 질병을 도구로써 이용하겠다는 의연한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신은 죽었다. 그러나 신의 그림자는 죽지 않았다.

“광인이 그들 가운데로 뛰어들어 매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신은 어디로 갔는가?’라고 그는 소리를 지른다. 나는 당신에게 그것을 말하려고 한다! 우리는 신을 죽였다. 당신과 내가. 우리는 모두 신의 암살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했는가? 우리는 어떻게 마지막 한 방울의 바닷물까지 마실 수 있었는가? 누가 우리에게 모든 수평선을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해면을 주었는가? 우리는 무엇을 이 지평선에서 떼어놓았는가?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니체를 상징하는 단 한문장을 꼽으라면 단연 이 문장이 아닐까요?
그가 언급한 신의 죽음과 함께 그럼에도 여전히 죽지 않은 신의 그림자에 이 책은 좀 더 접근하고 있습니다.

니체에게 신의 첫 번째 그림자는 사회주의였다. 니체에게 신의 두 번째 그림자는 과학이다. 실험에 대한 기호, 대담한 가설과 의심의 기술─니체가 스스로 주장했던 과학적 문화의 본질적 양상─이 아니라 맹목적 믿음,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 믿는 절대적 진리에 대한 맹신이 바로 그것이다.

 

능동적 허무주의 : 니체에게 행복이란 무엇이었을까?

능동적 허무주의는 우리 가치의 붕괴 현장을 새로운 가치의 실험 현장으로 이용하는 반면, 수동적 허무주의는 가치를 잃어버린 것에 대해 만족스러워할 뿐이다.

행복은 그 자체로는 지속성이 없는 공허한 상태에 불과하다. 행복에서 목표, 내용, 목적을 박탈한다면 행복은 단지 그것이 아닌 것에 의해서만 정의되는 무에 불과할 뿐이다. 행복은 고통, 욕망, 흥분, 위험의 부재이지만, 그 자체로는 긍정적인 것은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는다.

“삶의 모든 굴곡과 굴절을 대패로 깎아버리려 하는 끔찍한 계획으로는 인간성을 모래로 변질시키기 위한 지름길을 갖게 되지 않겠는가? 모래, 가늘고 부드럽고 둥글고 무한한 모래!”(『여명』, Ⅲ, 174)

 

가 말하는 행복은 '지독히도 아름다운 허무의 한가운데' 서 있는 듯 합니다. 삶의 고통과 굴절이 공존하는 가운데에서 그 존재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 다시 말해 고통이라는 것이 행복한 삶의 조연이 아니라 중요한 하나의 주연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책의 주제의 질문에 한 발 더 다가가게 됩니다. 당신이 우울해 하는 그 원인은 당신의 삶의 행복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단순히 행복에 방해가 되는 요소라고 단정할 수 있는지를 되물어야 함을 니체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피하고 싶은가? 우리가 모든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없애거나 소멸시키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이 두려움의 이름으로 삶을 위축시켜 평온하고 예측 가능하고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가? 왜 우리는 두려움의 이름으로 삶에서 가장 바람직하고 가장 만족감을 주는 측면을 동시에 희생하려고 하는가?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삶에서 고통이 차지하는 역할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 우울한 날엔 니체 중

만일 당신이 안온한 의기소침, 시시한 행복에 안주하게 된다면 당신은 수동적 허무주의자다. 반대로 당신이 가치의 추락을 기회로, 즉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유희적이고 경멸스러운 삶의 방식을 시험하기 위한 기회로 삼는다면 당신은 능동적 허무주의자이다.

 

순간은 영원하다 : 영원 회귀사상

“가장 무거운 무게─만일 어느 날 낮이나 밤에 악마가 비밀리에 너의 가장 큰 고독 속으로 들어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네가 살고 있고 살았던 이 삶을 너는 한 번 더 그리고 무한히 다시 살아야 한다. 모든 고통과 모든 쾌락과 모든 생각과 탄식, 네 삶에서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작았던 모든 일이 다시 네게 돌아와야 한다. 모든 것은 똑같이 이어지고 연결된다─거미와 나무 사이의 이 달빛도 마찬가지로, 그리고 이 순간과 나 자신도 마찬가지로. 존재의 영원한 모래시계는 끊임없이 뒤집힌다. 그 시계와 더불어 너도 먼지 중의 먼지여!’ 너는 이렇게 말하는 악마를 저주하면서 이를 악물고 지상으로 뛰어내리지 않겠는가? 네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그 가공할 순간을 이미 경험했는가? ‘너는 신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은 신성한 것에 결코 귀 기울이지 않겠다’고.”(『즐거운 학문』, Ⅳ, 341)

“나처럼 오랫동안 비관주의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하느라 애썼던 사람은 전도된 이상을 향해 눈을 뜰 것이다. 가장 왕성한 인간, 가장 삶에서 벗어난 인간이라는 이상. 이 인간은 세상을 향해서 가장 크게 예라고 말하며 존재했고 존재하는 것에 단순히 굴복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 인간은 존재했고 존재하는 것을 다시 소유하기를 원한다. 완전한 영원성을 위해 ‘처음부터 반복해서’라고 외친다.”(『선악을 넘어서』, Ⅲ, 56)

 

니체의 유명한 영원 회귀 사상을 담고 있는 구절입니다. 니체는 한순간의 변화 없는 무한한 반복의 끔찍함을 통해 오히려 "영원 회귀되어도 좋을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이 영원회귀의 관념이 우리를 유한한 시간과 화해하게 합니다.

 

니체의 생애

오늘날 우리는 에즈쉬르메르, 알프마리팀 지역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한 영감을 불러일으킨 ‘니체의 길’을 발견할 수 있다. 실마리아에 있는 그리송의 땅에는 그에게 영원회귀의 관념을 고무시킨 바위가 있다. 니체는 태양, 프랑스의 북동풍, 프로방스의 음유시인, 피에몬테의 요리를 발견하고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비제의 음악을 ‘아프리카’의 정신, 퇴락의 무거움과 바그너가 드러낸 독일인의 우둔함에 대한 완전한 해독제라고 찬미했다. 니체는 자신의 고향을 단지 ‘알프스 너머’의 관점에서만 고찰했다.

 

확실한 것은 그가 앓은 질병이 그의 사유의 결과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니체에게서─상기해보자─정신을 일깨우는 것은 신체 상태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니체의 독자적 철학이 치료, 방어, 건강 이상의 대책임을 알아야 한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통해 잠복해 있던 질병에 오랫동안 저항할 수 있었다.

 

생애 말년에 니체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자신의 철학 작업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피아노로 즉흥 연주를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은 그가 작곡한 음악이 오히려 평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대인들이 들려준 모든 증언에 의하면 그가 즉흥 연주에 비범한 재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확실히 그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 한 명이 될 수 있는 것은 독일어로 쓴 산문, 분절되고 색조 있고 선율이 아름답고 장난기 있는 산문 때문이다.

 

함께하면 좋은 것들

이 책에서 추천하는 니체의 다른 저서

  • 『즐거운 학문』 가장 통찰력 있고 풍요로운 니체의 저작
  • 『선악을 넘어서』 가장 철학적인 니체의 저작으로 니체의 성숙한 관념을 가장 완전하고 가장 엄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 『우상의 황혼』 가장 간결하고 충격적인 저작으로 생애 후반기 니체가 가장 확고하게 취한 입장을 요약해준다.

이 책이 조금 불편했다면

대체로 니체의 저서들이 분량/내용면에서 모두 무겁고 부담이 되는 만큼 좀 더 부담 없이 니체라는 철학자에게 대해 알고 싶으신 분들은 며칠 뒤에 리뷰를 할 『클래식 클라우드 002 - 니체 - 이진우 저』를 추천합니다.

다른 필로테라피 시리즈

무력할 땐 아리스토텔레스 - 다미앵 클레르제-귀르노

비참한 날엔 스피노자 - 발타자르 토마스

괴로운 날엔 쇼펜하우어 - 셀린 벨로크

우울한 날엔 니체 - 발타자르 토마스

절망한 날엔 키에르케고르 - 다미앵 클레르제-귀르노 Part.1 , Par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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