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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철학종교

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 "존재하고 경험하고 사랑하라"

by Caferoman 2021. 9. 5.

독서노트

소유를 추구하는 삶 vs 존재를 추구하는 삶

사람이 생각해야 할 일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자기가 어떤 존재인가이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위대한 ‘인생의 교사들’은 소유와 존재 사이의 선택을 사상의 중심 문제로 삼아 왔다. 붓다는 인간 발달의 최고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소유를 갈망하지 말라고 설파했다. 예수도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누가복음 9장 24∼25절)’라고 가르쳤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아무것도 갖지 않고 자신을 열어 ‘공허(空虛)’로 하는 것, 자아(自我)에 방해를 받지 않는 것이 정신적인 부와 힘을 달성하기 위한 조건이라고 했다. 또한 마르크스는 사치가 가난 못지않은 악이며, 우리의 목적은 많이 존재하는 것이지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부동산 대책과 재산에 관련된 여러 말들 때문인지 달리 가진 것이 없는(따라서 이득 보거나 손해 볼 것이 없는) 저 역시 '가만히 있어도 되나?' 라는 불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우연인지 무엇에 이끌려서인지 예전에 감명 깊게 읽고 정리해 놓은 에리히 프롬의 책의 내용들을 다시 상기시켜보며 소유에 이끌려 살기보다 존재에 집중하겠다는 어린시절 치기 어린, 하지만 본질적이고 순수했던 의지를 되새겨 봅니다.

 

요컨대 소비는 소유의 한 형태이며, 그것도 오늘날의 풍요한 산업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소유 형태일 것이다. 소비의 특질은 다의적(多義的)이다. 그것은 우선 불안을 제거해 준다. 갖고 있는 것은 빼앗길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많이 소비할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전의 소비는 욕구충족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현대의 소비자들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것이다. ‘나는 존재한다〓나는 갖고 있다〓나는 소비한다.’

존재양식에서의 신념은 우선 어떤 관념을 믿는 것이 아니라(그런 경우가 있을 수도 있지만) 하나의 내적지향이며 태도이다. 사람이 신념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사람이 신념 ‘속에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저 사랑 안에서 존재하는 것

‘사랑’이란 사물은 없다. 사랑이란 추상 개념이며, 아마도 여신이고, 이방인(異邦人)일 것이다. 그러나 이 여신을 본 사람은 없다. 실제로는 ‘사랑한다는 행위’만이 존재할 뿐이다. 사랑하는 것은 생산적이고 능동적인 움직임이다. 그것은 인물, 나무, 그림, 관념을 존중하고, 알며, 반응하고, 확인하고, 누리는 행위이다. 또한 생명을 주며, 상대의 생명력을 증대시키는 활동이다. 아울러 자신을 새롭게 하고 확장시키는 하나의 과정이다. ...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에서 나는 ‘사랑에 빠진다’는 구절 속의 ‘빠진다’는 말 그 자체가 모순임을 지적했다. 사랑이 생산적인 능동성인 이상 우리는 사랑 속에 ‘있거나’ 사랑 속을 ‘걸을’ 수 있을 뿐이며, 사랑에 ‘빠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빠진다는 것은 수동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자꾸만 소유의 방식으로 이를 접근하려고 합니다. 가정을 바라보는 문제도 계승되거나 추가되는 부양가족에 대한 문제에서도 자꾸만 이를 소유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면 그런 제 자신을 충분히 행복하지 못하다고 자책하게 됩니다.
그렇게 살지 않기로 이 책을 읽었을 때에도 그 뒤에도 여러차례 다짐을 했었는데 말이죠.

 

그들은 서로가 사랑하던 때의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즉 사랑을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이 사랑을 버리게 한 훼방꾼임을 모르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대신에 함께 소유하는 것, 즉 돈‧사회적 지위‧가정‧자식 등을 공유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리하여 사랑에 바탕을 두고 시작한 결혼이 사이가 좋은 소유 형태로 변모해 버린다. 그것은 두 개의 자기 중심주의를 하나의 합동 자본으로 삼은 회사, 즉 ‘가정’이라는 회사이다.

가부장제(家父長制) 사회에서는 가장 미천한 계급의 가장 비참한 남자일지라도 재산의 소유자가 될 수 있었다. 그가 절대적인 지배자로서의 기분을 맛볼 수 있는 아내, 자녀들, 동물과의 관계에서 말이다. 적어도 가부장제 사회의 남자에게는 자녀를 많이 두는 것이 소유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일하거나 자본을 투자할 필요 없이 인간을 소유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이들을 낳는 모든 고통이 여자의 몫임을 고려할 때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이를 만든다는 것은 여성에 대한 노골적인 착취라는 점을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어머니는 또 어머니대로 독자적인 형태의 소유권, 즉 아직 어린 자녀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끝없는 악순환이었다. 남편은 아내를 착취하고, 아내는 어린 자식을 착취하며, 청년기의 남자는 이윽고 연장의 남자들에게 끼어 여자를 착취했다.

인간에게 두 가지 상반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하는 듯하다. 한편은 ‘소유’-갖는-경향이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생존에 대한 욕망이라는 생물학적 요인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다른 한편은 ‘존재’-나누어 갖고, 주고, 희생을 치르는-경향이며, 이것은 인간 존재의 독특한 조건과, 다른 사람과 일체가 됨으로써 자기의 고립을 극복하려는 본능의 요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모든 인간 속에는 이 두 가지 모순된 노력이 존재한다.

 

존재하고 경험하고 사랑하라

존재는 반드시 시간 밖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시간이 존재를 지배하는 차원은 아니다. 화가는 물감, 캔버스, 붓과 씨름해야 하며, 조각가는 돌, 끌과 씨름해야 한다. 그러나 창조 행위, 그들이 창조하려는 것의 비전은 시간을 초월한다. 그것은 한순간에 혹은 많은 순간에 일어나지만, 그 비전 속에서 시간은 경험되지 않는다. 사상가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사상을 적는 행위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지만, 사상을 마음에 품는 것은 시간 밖에서 일어나는 창조적 사건이다. 존재의 모든 현상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사랑의 경험, 기쁨의 경험, 진리를 파악하는 경험은 시간 속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일어난다. 이 ‘지금 여기는 영원이다’. 즉 시간을 추월하고 있다. 그러나 영원은 일반적인 오해처럼 무한히 잡아늘인 시간은 아니다.

“사유 재산은 우리를 너무나도 어리석고 편협한 인간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어떤 대상이 우리의 것이 될 때는, 단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할 때이고, 그것이 우리의 자본으로서 존재할 때이고, 혹은 그것을 직접 먹고, 마시고, 입고, 그 속에 사는 등 요컨대 어떤 방법으로 ‘이용’하는 시간뿐이다…… 이리하여 ‘모든’ 육체적이고 지적인 감각은 ‘모두’ 다 소외된 감각, 즉 ‘소유’ 감각으로 대치되었다. 인간은 그의 모든 내적인 부(富)를 낳기 위해서 이 절대적인 빈곤에 빠져야만 했다.” - 마르크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러나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은 사랑할 줄도 주목할 줄도 인식할 줄도 안다.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이 늘면 늘수록 그것에 대한 사랑도 또한 커진다. ……딸기가 익을 때 다른 모든 과일도 같이 익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포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 파라셀수스

 

이 책의 요약

 

"존재하고 경험하고 사랑하라"
이것이 제가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한줄요약입니다.

 

"소유 양식의 삶보다는 존재 양식의 삶을 추구하고
표현 가능한 죽은 언어보다는 형용할 수 없는 살아있는 경험에 집중하고
소유하기 위함이 아닌 존재 자체를 사랑하라"


세 줄로 요약하면 위와 같이 풀어 쓸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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