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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글쓰기

스티븐 킹 스러운 글쓰기 강의 : 유혹하는 글쓰기, 스티븐 킹

by Caferoman 2023. 6. 15.

뻔한 문장론이나 작법론이 아닌 스티븐 킹 스러운 유쾌함과 신박함이 가득한 글쓰기 강의 : 유혹하는 글쓰기, 스티븐 킹

물론 쉽게 나처럼 많은 소설책을 팔아먹은 사람은 글쓰기에 대하여 ‘뭔가’ 할 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쉬운 답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가령 샌더스 대령[‘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의 조리법 개발자-옮긴이]이 엄청난 양의 닭튀김을 팔아치웠지만 그 과정에 대해 알고 싶어 할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하다. 주제넘게 글쓰기에 대해 말하겠다고 나서려면 적어도 대중적인 성공보다 더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 책의 본문 중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  "글은 이렇게 쓰는 것이다"라는 문형론, 구조론, 방법론 등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책의 초반은 글쓰기가 아닌 저자의 어린시절에서 시작한 자전적인 이야기들이 거진 3할을 차지하고 있었는데요. 처음에는 '서론이 너무 장황한 것 아닌가?' '도대체 얼마나 두꺼운 책이길래 이렇게 잡답이 길지?'라고 생각하며 (E Book)페이지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서론이 장황할 만한 분량의 책은 아니라는 점에 우선 첫 번째로 경악했습니다.

 

‘좋은 작품입니다. 우리 잡지엔 안 맞지만 훌륭해요. 당신에겐 재능이 있군요. 다시 투고해주십시오.’ 만년필로 휘갈겨 써서 여기저기 큼직한 얼룩이 남아 있던 이 짤막한 네 문장은 내 열여섯 살의 우울한 겨울을 환히 밝혀주었다. - 책의 본문 중

 

책의 말미에 언급된 대로 이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스티븐 킹 자신이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자서전 형식으로 서술한 부분이 이 책의 3할을 차지하고 창작에 필요한 자세와 작가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도구들을 이야기한 부분, 창작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부분이 이 책의 중심에 그리 많지 않은 분량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끝으로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진정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을 쓰는 도중에 일어났던 교통사고와 그 결과로 얻은 깨달음"을 이야기하며 이 책은 마무리되는 일반적인 글쓰기 지침서와는 다른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든 소설이든 단 한 줄이라도 발표한 사람은 반드시 누군가에게서 하늘이 주신 재능을 낭비한다는 비난을 듣게 마련이라는 것을 내가 비로소 깨달은 것은 아마 마흔 살 때였던 것 같다. 글을 쓰는 사람이 있으면(그림이나 무용이나 조각이나 노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남의 기분을 망쳐놓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다.
- 책의 본문 중


문제는 그런 기형적인 글쓰기 참고서가 일단 재미있었다는 점인데요. 저자의 괴짜스러운 어린시절과 작가 데뷔 이전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키득키득거리며 읽다 보니 어느덧 페이지의 30%가 넘어가 있었습니다. '유혹하는 글쓰기'가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런 해결책을 받지 못한 채로... "글쓰기란 무엇인가", 드디어 이 책의 제목다운 쳅터가 나타난 것은 86페이지 즈음이었습니다. 책의 전체 페이지가 243페이지인데 말이죠.

 

중요한 것은 문장이야

나는 에이미에게, 작가와의 만남이 끝날 무렵이면 거의 빠지지 않는 질의 응답 시간에 지금껏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질문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에이미는 매우 신중하게 생각해 보더니 이윽고 이렇게 대답했다.
“문장에 대해서는 아무도 안 묻더군요.”

 

자칫 스티븐 킹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보일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저자는 어떻게 그의 작법론을 완성해왔는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안 좋은 부분만 지워버린 거야. 대부분은 제법 훌륭했어.”
“알아요.”
내 말은 두 가지 뜻을 담고 있었다. 대부분은 제법 훌륭하다는 것을 안다는 뜻, 그리고 그가 오직 안 좋은 부분만 지웠다는 것을 안다는 뜻이었다.
“다시는 그런 실수를 안 할 거예요.” 그러자 굴드가 폭소를 터뜨렸다.
“그게 정말이라면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을 거다. 이 짓만 해도 될 테니까. 고친 부분에 대해서 설명해 줄까?”
“필요 없어요.”
“어떤 이야기를 쓸 때는 자신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생각해라. 그리고 원고를 고칠 때는 그 이야기와 무관한 것들을 찾아 없애는 것이 제일 중요해.”
- 책의 본문 중 저자의 어린 시절 은사와의 대화

학창 시절에 만난 굴드라는 선생님을 통해 저자는 원고를 쓰고 고치는 방식을 배우게 됩니다. "글을 쓸 때는 문을 닫을 것, 글을 고칠 때는 문을 열어둘 것. 다시 말해서 처음에는 나 자신만을 위한 글이지만 곧 바깥세상으로 나가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그의 가장 오래된 감수자이자 편집자이자 독자인 그의 아내가 있었기에 그가 작가로서 성공할 수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나는 폰드 스트리트의 셋집 현관이나 허먼의 클래트 로드에 있던 임대용 트레일러의 세탁실에서 소설을 썼는데, 만약 아내가 그것을 시간 낭비라고 말했다면 나는 용기를 잃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태비는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 놓고 당연시할 수 있는 요소가 그리 많지 않던 시절에 그녀는 언제나 변함없이 나를 격려해 주었다. 아내에게 (혹은 남편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적어놓은 처녀작을 볼 때마다 나는 미소를 머금고 이런 생각을 한다. ‘이 사람도 나 같은 심정이었구나.’ 글쓰기는 외로운 작업이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굳이 믿는다고 떠들지 않아도 좋다. 대개는 그냥 믿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글쓰기를 위한 연장통을 준비하라

자주 쓰는 연장들은 맨 위층에 넣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쓰는 연장은 글쓰기의 원료라고 할 수 있는 낱말들이다. 이 경우에는 여러분이 이미 갖고 있는 것들만 잘 챙겨도 충분하다. 죄책감이나 열등감을 느낄 필요는 조금도 없다. 쑥스러워하는 선원에게 창녀가 하는 말처럼, ‘돈이란 얼마나 가졌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니까.’ 어떤 작가들은 굉장한 어휘력을 갖고 있다. 그들은 ‘불건전한 열광시(insalubrious dithyramb)’나 ‘기망적인 담화가(cozening raconteur)’ 따위의 낱말도 빠짐없이 알고 있는 사람들, 지난 30년 동안 윌프러드 펑크의 ‘어휘력을 키웁시다’에 연재된 낱말 퀴즈 칼럼에 나오는 문제들을 단 한 개도 틀린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글을 쓰는데에 없어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연장은 어휘(낱말)지만 이는 반드시 현학적이고 화려할 필요는 없음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래와 같은 소설의 일부를 예로 들며 초등학교 1학년 수준의 어휘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문장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주인들은 자기들이 해야 하는 일이 싫었기 때문에 친절했고, 어떤 이들은 잔인해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화를 냈고, 또 어떤 이들은 냉정해지지 않으면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오래전에 깨달았기 때문에 냉정했다. (Some of the owner men were kind because they hated what they had to do, and some of them were angry because they hated to be cruel, and some of them were cold because they had long ago found that one could not be an owner unless one were cold.) ─ 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

 

특히 흥미로운 것은 스타인벡의 문장이다. 여기서 사용된 낱말은 모두 50개이다. 그 50개 중에서 39개는 음절이 하나뿐인 낱말들이다. 나머지는 11개인데, 이 숫자조차도 오해의 소지가 있다. 스타인벡은 ‘because’를 세 번, ‘owner’를 두 번, ‘hated’를 두 번 썼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장 전체에서 음절수가 2개를 넘는 낱말은 단 한 개도 없다. 문장 구조는 복문이지만 사용된 낱말은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 수준을 넘지 못한다. 물론 《분노의 포도》는 빼어난 소설이다. 나는 《핏빛 자오선》도 빼어난 소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책에는 내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꽤 많다. 그렇다고 그게 문제일까? 내가 좋아하는 대중 음악의 노랫말도 무슨 뜻인지 모를 때가 많은데 말이다.
- 책의 본문 중

 

저자는 글쓰기에 있어 어휘야말로 연장통 제일 위층에 넣어야 하는 연장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굳이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려고 하지 말고 평이하고 직설적인 표현을 쓰라고 강조하며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가 생생하고 상황에 적합한 것이라면 당연히 그 단어를 써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글쓰기에서 정말 심각한 잘못은 낱말을 화려하게 치장하려고 하는 것으로, 쉬운 낱말을 쓰면 어쩐지 좀 창피해서 굳이 어려운 낱말을 찾는 것이다. 그런 짓은 애완 동물에게 야회복을 입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애완동물도 부끄러워하겠지만 그렇게 쓸데없는 짓을 하는 사람은 더욱더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다.... 이 의미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믿지 못하겠다면 여러분이 누군가에게서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든지 ‘내가 하려는 말은 그게 아닌데’ 따위의 말을 들은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상기해 보라. 여러분 자신이 그런 말을 한 적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생각해 보라. 낱말이란 의미를 담는 그릇일 뿐이다. 제아무리 글을 잘 써도 대개는 본래의 의미를 온전히 표현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자기가 정말 쓰고 싶은 낱말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 낱말을 선택하여 상황을 더 악화시킬 필요가 있을까?
- 책의 본문 중

 

그 다음으로 저자가 강조하는 두 번째 연장은 바로 문법입니다. 항상 완전한 문장에 집착할 필요는 없지만 정석을 따르는 것은 최소한 중간은 가기 때문이라는 점이지요.

 

그렇다면 언제나 완전한 문장만 써야 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다. 여러분이 순전히 문장의 파편들만 가지고 작품을 써도 경찰이 와서 잡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수사학 분야의 무솔리니라고 할 만한 윌리엄 스트렁크조차도 언어의 즐거운 유연성을 인정해주고 있다. “최상급 작가들도 간혹 수사학의 규칙을 무시하곤 했다.” 그러나 그가 여기에 덧붙인 말도 유념해야 한다. “잘 쓸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규칙을 따르는 편이 나을 것이다.”
- 책의 본문 중

 

또한 좋은 문장을 소개하기보다 저자의 관점에서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문장/표현들을 언급하면서 저자는 좋은 문장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는데요, 저자는 나약한 수동태와 무의미하며 불필요한 부사의 사용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싫어하는 말들은 나에게도 있다. 나는 ‘그거 정말 쿨하네(That’s so cool)’라는 말을 쓰는 사람은 구석에 세워놓아야 하며 그보다 훨씬 더 역겨운 ‘지금 이 시점에서(at this point in time)’나 ‘하루가 끝날 무렵에(at the end of the day)’ 따위를 쓰는 사람은 저녁도 먹이지 말고 (또는 글을 쓸 종이도 주지 말고) 그냥 재워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수동태를 절대로 쓰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부엌에서 죽었는데 어딘가 다른 곳에서 나타났다고 치자. 이럴 때는 ‘시체가 부엌에서 옮겨져 거실 소파 위에 놓였다(The body was carried from the kitchen and placed on the parlor sofa)’라고 써도 괜찮겠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옮겨져(was carried)’와 ‘놓였다(was placed)’도 여전히 눈에 거슬린다. 인정해 줄 수는 있지만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내 마음에 드는 문장은 ‘프레디와 마이라는 부엌에서 시체를 들어다가 거실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시체를 문장의 주어로 삼는단 말인가? 시체는 어차피 죽은 게 아닌가! 집어치워라!
수동태로 쓴 문장을 두 페이지쯤 읽고 나면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수동태는 나약하고 우회적일 뿐 아니라 종종 괴롭기까지 하다. 다음 문장을 보라. ‘나의 첫 키스는 셰이나와 나의 사랑이 시작된 계기로서 나에게 길이길이 기억될 것이다(My first kiss will always be recalled by me as how my romance with Shayna was begun).’ 맙소사, 이게 무슨 개방귀 같은 소리인가? 이 말을 좀 더 간단하게 ─ 그리고 더욱 감미롭고 힘차게 ─ 표현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셰이나와 나의 사랑은 첫 키스로 시작했다. 나는 그 일을 잊을 수가 없다(My romance with Shayna began with our first kiss. I’ll never forget it.).’ 낱말 두 개를 사이에 두고 ‘with’가 두 번이나 들어갔으니 이 표현도 썩 흡족하지는 않지만, 그 끔찍한 수동태를 떨쳐버린 것만 해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부사는 여러분의 친구가 아니다.’ 여러분도 영어 시간에 배웠겠지만, 부사라는 것은 동사나 형용사나 다른 부사를 수식하는 낱말을 가리킨다. 흔히 ‘…하게(-ly)’로 끝나는 것들이다. 수동태와 마찬가지로 부사도 소심한 작가들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낸 창조물인 듯하다. 수동태를 많이 쓰는 작가는 대개 남들이 자기 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봐 걱정한다. 수동태는 구두약으로 수염을 그린 소년들, 또는 엄마의 하이힐을 신고 뒤뚱거리는 소녀들에게나 어울린다. 한편 부사를 많이 쓰는 작가는 대개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할 자신이 없다. 자신의 논점이나 어떤 심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수많은 부사들로 뒤덮여 있다고 나는 믿는다."라는 표현대로 저자는 쓰지 않아도 되는 부사의 사용을 지극히 혐오하고 있습니다. 독자들이 수동태나 그 못된 부사를 쓰고 싶어 하는 이유는 아기코끼리 덤보는 마술 깃털의 도움으로 날아오른 것 같은 심리적인 안정수단이 되겠지만 애당초 덤보에게는 그 깃털이 꼭 필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라는 일침과 함께 좋은 글을 쓰기 위한 마법의 힘은 이미 그 마음 속에 깃들어 있다고 강조합니다.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만 연달아 쓰다 보면 글이 너무 딱딱해져 유연성을 잃게 된다. 언어의 결벽주의자들은 이런 말을 듣기 싫어하고 죽을 때까지 부정하겠지만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언어도 날마다 넥타이를 매고 정장 구두를 신을 필요는 없다. 소설의 목표는 정확한 문법이 아니라 독자를 따뜻이 맞이하여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자기가 소설을 읽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드는 것이다.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문단은 글보다 말에 더 가까운 것이고 그것은 좋은 일이다. 글쓰기는 유혹이다. 좋은 말솜씨도 역시 유혹의 일부분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그토록 많은 남녀가 저녁 식사를 마치고 곧장 침대로 직행하겠는가?

 

글쓰기를 위한 연장으로 여러 항목을 언급하며 위 구절에서는 왜 이 책의 번역된 제목이 "유혹하는 글쓰기"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좋은 글을 쓰려면 기본을 (어휘력, 문법, 그리고 문체의 요소들을) 잘 익히고 연장통의 세 번째 층에 올바른 연장들을 마련해둬야 한다. 둘째, 형편없는 작가가 제법 괜찮은 작가로 변하기란 불가능하고 또 훌륭한 작가가 위대한 작가로 탈바꿈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스스로 많은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고 시의적절한 도움을 받는다면 그저 괜찮은 정도였던 작가도 훌륭한 작가로 거듭날 수 있다.
여러분이 죽어라고 열심히 노력하기가 귀찮다면 좋은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 차라리 제법 괜찮은 수준에서 만족하면서 그나마 그것도 다행으로 여기도록 하라. 뮤즈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전통적으로 뮤즈는 여신이라고 하는데 왠지 나의 뮤즈는 남자이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가 여러분의 집필실에 너울너울 날아들어 여러분의 타자기나 컴퓨터에 창작을 도와주는 마법의 가루를 뿌려주는 일은 절대로 없다. 뮤즈는 땅에서 지낸다. 그는 지하실에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오히려 여러분이 뮤즈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내려간 김에 그의 거처를 잘 마련해줘야 한다. 다시 말해서 낑낑거리는 힘겨운 노동은 모두 여러분의 몫이라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훌륭한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열렬한 독자가 되어야 함을 말하며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사실 독서가 주는 즐거움과 효용성을 떠나서 "고기도 먹어본 놈이 안다."는 점은 글쓰기에도 예외가 없습니다.

 

독서가 정말 중요한 까닭은 우리가 독서를 통하여 창작의 과정에 친숙해지고 또한 그 과정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사람은 작가의 나라에 입국하는 각종 서류와 증명서를 갖추는 셈이다. 꾸준히 책을 읽으면 언젠가는 자의식을 느끼지 않으면서 열심히 글을 쓸 수 있는 어떤 지점에 (혹은 마음가짐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미 남들이 써먹은 것은 무엇이고 아직 쓰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진부한 것은 무엇이고 새로운 것은 무엇인지, 여전히 효과적인 것은 무엇이고 지면에서 죽어가는 (혹은 죽어버린) 것은 무엇인지 등등에 대하여 점점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책을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여러분이 펜이나 워드프로세서를 가지고 쓸데없이 바보짓을 할 가능성도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결국 저자가 강조하는 방법론은 두가지 결론으로 귀결됩니다. 하나는 연습이 중요하다는 점과 전하고자 하는 바(이야기)를 명료하고 진실되게 써야 한다는 점입니다.

 

초고는 눈내린 들판을 홀로 걷는 것

이 초고 ─ 스토리만 있는 원고 ─ 는 누구의 도움도 (또는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서 써야 한다. 간혹 집필 중인 원고를 가까운 친구에게 (흔히 한 침대를 쓰는 친구가 제일 먼저 떠오르게 마련이다) 보여주고 싶을 때도 있을 텐데, 그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작품이 자랑스럽거나 혹은 미심쩍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충동을 억누르라고 충고하겠다. 긴박감을 계속 유지하라. 자기 작품을 ‘바깥세상’의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그들의 의견을 듣게 되면 ─ 불신의 말이든 칭찬이든 호의적인 질문이든 간에 ─ 긴박감이 줄어든다. 아무리 힘들어도 성공에 대한 희망을 (그리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품은 채 계속 나아가라. 작품을 끝마치고 나면 자랑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웬만하면 초고를 완성한 뒤에도 조심하는 것이 좋다. 방금 눈이 내린 들판처럼 작품 속에 오직 자신의 발자국만 찍혀 있을 때 좀 더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작품을 얼마나 오랫동안 묵히느냐 ─ 이것은 빵 반죽을 대충 주무른 뒤에 한동안 그대로 놓아두는 것과 비슷하다 ─ 하는 문제는 순전히 여러분 자신이 판단해야 할 일이지만 적어도 6주는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하여 어느 적당한 날 저녁에 비로소 서랍 속에서 원고를 꺼낸다. 이때 그 원고가 어느 고물상에서 구입한 골동품처럼 낯설어 보인다면 정말 준비가 된 것이다. 가능하다면 한자리에서 전체를 다 읽어보도록 하라. 메모는 마음대로 해도 좋지만 주로 오자를 고치거나 앞뒤가 안 맞는 말들을 찾는 데 집중하라. 아마 꽤 많을 것이다. 단번에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는 분은 오직 신뿐이고, ‘에라 모르겠다, 그냥 넘어가자, 이건 편집부에서 할 일이니까’ 하고 말하는 사람은 게으름뱅이다.

 

실용적인 글쓰기론을 말하는 책의 중반부를 지나가게 되면 후반부는 저자가 겪게된 사고와 그로 인해 깨닫게 된 삶의 통찰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글쓰기의 본질은 오히려 한결 담백해지는 데요, 저자는 사고 이후 글쓰기의 목적을 아래와 같이 정의합니다.

 

글쓰기의 목적은 살아남고 이겨내고 일어서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것.
글쓰기는 마술과 같다. 창조적인 예술이 모두 그렇듯이, 생명수와도 같다. 이 물은 공짜다. 그러니 마음껏 마셔도 좋다. 부디 실컷 마시고 허전한 속을 채우시기를.

 

방망이를 거꾸로 잡아도 3할은 칠것 같은 전설의 타자들처럼 저자는 "글쓰기 방법론"이라는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주제를 신박한 방법으로 풀어냅니다. 분명 나는 스티븐 킹의 자서전 혹은 그의 시시콜콜한 잡답을 들은 것 같은데 읽고 나니 내가 읽은 것은 하나의 완벽한 글쓰기 이론이었다고 깨닫게 되는 묘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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