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은 이렇게 썼다. “이종교배한 종들은 무조건 생식능력이 없다고도, 불임성은 창조주가 부여한 특별한 자질이자 창조의 신호라고도 주장할 수 없다.” 이윽고 다윈은 종이, 그리고 사실상 분류학자들이 본질적으로 불변의 것이라 믿었던 그 모든 복잡한 분류 단계(속, 과, 목, 강 등)가 인간의 발명품일 뿐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끊임없이 진행되는 진화의 흐름 주위에 인간이 우리 ‘편리’하자고 유용하지만 자의적인 선들을 그었다는 것이다. 그는 “나투라 논 파싯 살툼Natura non facit saltum”(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이라고 썼다. 다윈에 따르면 자연에는 가장자리도, 불변의 경계선도 없다.
우연히 발견한 논픽션 대작
뭔가 새롭게 읽을만한 책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알고리즘(+높은 순위)에 이끌려 별 기대 없이 E-Book 서재에 담아두었던 이 책은 막상 읽다보니 사실을 기반으로 쓰여진 책이라는 점과 깊은 여운을 주는 명작이었습니다.
(표지만 봤을 때에는 과학도서인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이름 짓는 창의력도 점점 발달했다. 못생긴 물고기의 이름은 적들의 이름을 따서 짓고, 예쁜 물고기의 이름은 친구들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자기네 대장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하와이 연안에서 건져 올린 작은 불꽃처럼 생긴 물고기는 ‘조던의 실용치’라는 뜻의 시르힐라브루스 요르다니Cirrhilabrus jordani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책은 실존하던 생물 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이야기로 주인공의 첫인상은 생물분류학에 미쳐있는 괴짜 학자정도였지만 소설을 읽어가면 읽어갈 수록 그러한 "분리주의" 와 "구조주의" 성향이 강한 한 사람이 얼마나 우생학에 빠져 무시무시한 괴물이 되어가는 흐름 속에서 자뭇 섬뜩함이 느껴졌습니다.
이 우주에서 아직은 미지의 한 조각에 불과한 새로운 물고기를 한 마리 한 마리 잡아나가고, 새로운 이름을 하나씩 붙일 때마다 믿을 수 없는 도취적인 감정이 몰려왔다. 혀에 닫는 그 달콤한 꿀, 전능함에 대한 환상, 그 사랑스러운 질서의 감각. 이름이란 얼마나 좋은 위안인가.
이름을 짓는 것을 넘어 존재를 규명하는 것의 위험성
철학에는 어떤 것들이 이름을 얻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사상이 있다. 이 사상은 정의, 향수, 무한, 사랑, 죄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이 천상의 에테르적 차원에 머물면서 인간이 발견해줄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군가가 그것들의 이름을 만들어낼 때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본다.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개념은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실재”가 된다. 우리는 전쟁, 휴전, 파산, 사랑, 순수, 죄책감을 선언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다. 이렇듯 아이디어를 상상의 영역에서 세상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운송 수단인 이름 자체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사상에 따르면, 이름이 존재하기 전까지 개념들은 대체로 불활성 상태에 있다고 한다.
새로운 물고기를 발견하고 이에 대한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책에서 드러내는 분류학자의 심리 및 사상의 저변에는 어느 존재를 다른 존재와 구분짓고 종간의 우열을 비교하고 더 나아가 그 가치를 평가하는 태도를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평가기준이 단순히 물고기라는 존재를 넘어 인종과 장애여부에 따라 인간을 단정짓고 평가하는 나치의 홀로코스트나 우생학과 다를바 없음을 이 책은 말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성스러운 완모식 표본 앞에 당도했다. 표본 번호 #51444. 아고노말루스 요르다니Agonomalus jordani.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1904년에 일본 연안에서 발견하여 명명한 것이다. 유리용기 바닥에 놓여 있는 그것은 작고 검은 용 같았다. ... 데이비드가 만난 수천 가지 물고기 중에서 자신의 이름을 붙이기로 선택한 단 하나가 왜 하필 이것이었을까.
실제로 그 속명인 아고노말루스Agonomalus는 “모서리가 없음”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왔다. A(없다) + gonias(각, 모서리). 분류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이 종의 물고기들이 물리법칙을 따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고노말루스 요르다니. 모서리가 없는 조던. 뫼비우스 띠처럼 두 개의 면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하나인 면. 두 면 사이의 경계는 결코 찾을 수 없다. 데이비드는 왜 하필 이 생물이 자신을 반영한다고 느꼈을까? 이 선택에 일종의 고백이 담겨 있는 것일까? 그토록 능숙하게 사람들의 마음과 일자리와 각종 상을 얻어냈던 친절한 남자의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어떤 어두운 면에 대한 고백일까? 그때 나는 그 답을 알지 못했다.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가 가져 마땅한 미치광이들이 생겨난다. - Roy Porter
가스라이팅(Gaslighting) : 말과 행동으로 상대방의 마음속에 교묘하게 자기 불신의 씨앗을 심어, 피해자가 자신의 기억, 판단, 인지를 의심하게 만드는 심리적 조작으로, 이러한 심리적 조작을 다룬 영화 〈가스등Gaslight〉(1944)에서 파생된 용어.
우생학 : 1883년 찰스 다윈의 고종사촌인 프랜시스 골턴이라는 영국의 과학자가 만든 단어. 그는 인류의 지배자 인종을 선별할 수 있도록 그 힘을 조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요컨대 가난, 범죄, 문맹, “정신박약”, 방탕함 등 그가 혈통과 관련된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특징들을 교배함으로써 말이다. 그는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의 집단을 말살시키는 이 기술을 “우생학”이라고 불렀다. “좋은”과 “출생”을 뜻하는 그리스어를 조합해 만든 단어다.
물고기를 분류하고 이를 규명하는 것 처럼 우생학이 성행하던 시절의 (특히 미국의) 풍경은 마치 규격에 적합한 물건과 그렇지 않은 물건을 평가하고 점수를 매기고 불량품을 걸러내는 듯 "우생학"이라는 미명하에 인간을 거르고 단정짓는 정도를 넘어선 모습을 보입니다.
우생학은 미국식 신여성과 포드 모델 T 못지않게 미국 문화의 두드러진 한 부분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비주류가 아니었고, 당파를 가리지 않았으며, 20세기의 첫 다섯 대통령이 모두 우생학의 밝은 전망을 찬양했고, 하버드부터 스탠퍼드, 예일, 캘리포니아 버클리, 프린스턴까지 전국의 모든 명망 있는 대학들에서 우생학을 가르쳤다. 우생학 잡지, 우생학 화장품, 심지어 우생학 경진 대회도 있었다. 주 박람회의 축제 분위기 물씬 나는 흰 천막 아래서 가장 적합한 가족과 최고의 아기를 뽑는 콘테스트가 종종 열렸다. 호박의 크기와 무게를 재듯 아기들의 무게와 치수를 쟀다. 흰 피부, 둥근 두상, 가장 대칭이 잘 이뤄진 이목구비에 파란 리본이 주어졌다.
1916년 매디슨 그랜트Madison Grant라는 한 미국 남자가 (나중에 히틀러라는 한 독일 남자가 자신의 “성경”이라고 부르게 될) 우생학 책 한 권을 출판했다. 《위대한 인종의 소멸》이라는 그 책에서 그랜트는 어떤 면에서는 골턴이 SF로 구상했던 비전과 유사한 정책을 제안했다. 전국의 모든 “도덕적으로 비뚤어진 자, 정신적 결함이 있는 자, 유전적 불구자들”을 자선의 명목으로 한데 모아 “불임화하자”는 것이었다. 미국의 우생학자들은 그것이 아주 훌륭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10여 년 뒤 독일에서 히틀러가 최초의 강제 불임화법을 통과시켰을 때 미국의 우생학자이자 의사인 조지프 드자넷은 “우리의 게임에서 독일인들이 우리를 이기고 있다”며 우는소리를 했다.
물고기(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적으로 좀 더 논리적인 일은 어류란 내내 우리의 망상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류”라는 범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비드에게 너무나도 소중했던 그 생물의 범주, 그가 역경의 시간이 닥쳐올 때마다 의지했던 범주, 그가 명료히 보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그 범주는 결코,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주인공이 그렇게 생을 다 바쳐 집착하던 어류라는 존재는 그저 인간이 멋대로 분류한 경멸적인 단어에 불과함을 저자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회 속에서 복잡한 문제들, 갈등들, 그러한 존재들을 권력자의 의도대로 단정짓고 차별하고 더 나아가 그러한 다양성을 짓밟기 위한 폭력적인 단어 중 하나라는 점입니다.
에모리대학의 유명한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은 이것이 인간이 항상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상상 속 사다리에서 정상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와 다른 동물들 사이의 유사성을 실제보다 과소평가하는 것 말이다. 어떤 인지 과제에서 동물들이 우리보다 뛰어나다면—예를 들어 특정한 새 종들은 수천 개의 씨앗이 있는 정확한 위치를 기억할 수 있다—그들은 그것을 지능이 아니라 본능이라고 치부한다. 이와 같은 수많은 언어적 수법을 드 발은 “언어적 거세”라고 표현했다.
이 이야기는 어느 물고기 분류학자의 생애에서 시작했지만 그의 삶이 보여준 비인간적인 척도로 타인을 평가하는 불합리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쓰는 척도들을 불신하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특히 도덕적·정신적 상태에 관한 척도들을 의심해봐야 한다. 모든 자(ruler) 뒤에는 지배자(Ruler)가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의 범주란 잘 봐주면 하나의 대용물이고 최악일 때는 족쇄임을 기억해야 한다. ... 이 사다리, 그것은 아직도 살아 있다. 이 사다리, 그것은 위험한 허구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그 허구를 쪼개버릴 물고기 모양의 대형 망치다.
충격적인 결말
이 책이 출간되고 여섯 달 뒤, 스탠퍼드대학과 인디애나대학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이름이 붙은 건물의 이름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두 학교 모두 학생들과 임직원, 교직원, 졸업생들이 편지와 기사, 온·오프라인 시위로 항의한 결과 내려진 결정이다.
실제 이 이야기는 주인공의 이름으로 지어진 미국 유수 대학의 건물들의 이름이 모두 사람들의 항의에 의해 변경되는 것으로 끝납니다. 학자로서 단순히 연구 결과가 맞고 틀리고의 문제를 떠나 그 저변에 있는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행태가 역사의 심판을 받은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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