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원동 브라더스 - 고스트 라이터즈 - 불편한 편의점
"만화가 - 웹툰작가 - 소설가"의 시선과 삶을 소재로 하는 이 3부작은 망원동 브라더스라는 소설로 만화가의 시선에서 본 망원동의 풍경을 그려냅니다. 최신작인 불편한 편의점을 통해 김호연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고 다른 작품들은 어떨지 궁금한 마음에 그의 데뷔작을 찾아서 읽게 되었습니다.
역시 ‘닥치는 대로 하고 싶은 일’은 없는 법. ‘닥치는 대로 해야 하는 일’이 있을 뿐이다.
그가 그려내는 주인공은 소일거리를 가지고 옥탑방에서 근근히 살아가는 35세의 무명 만화가로 그에게 다가온(빌붙은) 남자들과의 기묘한 동거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기러기 아빠, 고시촌 장수생, 그리고 곧 이혼 예정인 선배가 옥탑방에 붙어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통해 우울하지만 또 마냥 우울하지만은 않은 삶을 그려냅니다.
잠깐 들춰보려던 것을 다 읽고 말았다. 데자뷰. 내 작품을 다시 읽을 때마다 기시감을 느낀다. 대체 이게 나의 어디서 나온 건지 궁금하다. 나는 뭘 제대로 끝내본 적도 없고 주인공처럼 대담무쌍하지도 않지만, 만화는 만화대로 살아서 수조 같은 네모 칸 안에서 펄떡이고 있었다. 새삼 반가웠다.
식구(食口) -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
명사
1. 같은 집에서 살며 끼니를 함께 하는 사람.
2. `한 조직체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을 친밀감을 가지고 이르는 말.
당시 나는 아무것도 못 하고 괴로워만 했는데, 그때 전화를 걸어온 싸부가 내게 말했다. 지금부터 24시간 안에 털어버리라고. 넌 지금 한 방 먹고 링에 쓰러진 권투 선수라면서, 한 방을 먹을 순 있지만 일어나지 않으면 진다고. 심판이 지금 카운트를 세고 있다고. 너에게 카운트 텐은 24시간이라며, 그는 어서 일어나라고 내게 말했다. 다음 날 나는 견뎌내고 일어설 수 있었다.
사연 많은 네 남자들이 집결한 옥탑방은 부유하진 않아도 사람사는 냄새가 나는 공간으로 거듭나는데요, 아직 못다핀 꽃과 같은, 또는 재기를 꿈꾸는 이들은 한솥밥을 먹으면서 가족이나 다름없는 식구가 됩니다.
며칠 뒤 저녁. 삼척동자는 바둑판 두 개를 붙인 크기의 평면 TV를 가지고 옥탑으로 왔다. 어차피 고시원에선 둘 곳도 없고 시끄러워 못 보던 거라며, 여기 두고 같이들 보시라는 녀석. 우린 TV 잘 안 보니 그냥 가져다 팔라고 내가 말하는데, 어느새 싸부가 침대 방 한쪽에 위치를 잡고 있다. 케이블 신청하면 돈이 든다고 하자, 이번엔 김 부장이 옥탑 구석에 늘어져 있는 케이블 TV 선을 살피곤 자기가 선 정도는 딸 수 있단다.
30분이 채 안 돼 내 방에선 프로야구 중계가 나오고 있다. 다들 야구광인가보다. 그동안 야구 중계 안 보고 어떻게 버텼는지 의아할 정도로 셋 모두 아나운서와 해설자가 되어 수다들이다. 으으, 응원하던 팀의 희망고문을 견디다 못해 몇 해 전 야구를 끊은 나로서는 더욱 골치 아프게 됐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삼척동자가 TV를 가져온 건 세 남자의 작전이었다. 삼척동자가 TV를 가져오면, 싸부와 김 부장이 맞장구쳐서 이곳에 TV를 안착시키는 작전. 싸부는 스포츠 채널과 바둑TV 팬, 김 부장은 각종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 마니아였다.
삼척동자는 무슨 이득이 있느냐고? 녀석은 이제 TV 핑계로 매일 우리 집에 들른다. 침대에 누워 바둑TV를 보는 싸부 옆에 앉아서 아다리니 단수치기니 용어를 들먹이며 아는 척을 하다 한소리 듣는다. 김 부장과는 오디션 참가자들 순위를 놓고 내기를 하고, 연예프로에 나오는 걸그룹 멤버들과 그들의 소속사까지 알려준다. 한마디로 공부는 안 하고 우리 집에 와서 노닥대는 거다.
어느새 백수들의 놀이터가 된 나의 옥탑방. 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됐을까. 더 이상 고요한 옥탑의 아침은 사라지고 없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일제의 침략에 점령된 뒤 겪은 식민지 백성의 슬픔이 이러했을 터. 실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원룸 살던 시절 친구와 한 잔을 떠올리게 하는
이렇게 시꺼먼 남자들의 소굴이 된 망원동 옥탑방은 주인공에게는 벗어나고 싶은 곳임과 동시에 추억과 애정이 묻어있는 애증의 장소가 됩니다. 정말 어느 서평의 표현대로 이 책을 읽다보면 망원동에서 오랜 친구들과 술 한잔 하고 싶어지는 뭔가 훈훈한 소설인듯 합니다.
이 집을 나가기로 마음먹자 모든 게 새롭게 보였다. 누군가 그랬지. 사랑하기는 쉽다고. 그것이 사라질 때를 상상할 수만 있다면. 덥지만 햇살만큼은 마음껏 쪼일 수 있었던 창문, 2주일치 빨래를 한 번에 널어도 충분한 길고 튼튼한 빨랫줄, 그 빨랫줄이 있는 넓디넓은 마당, 괴팍하고 잔소리는 많지만 그만큼 잔정도 많은 주인할아버지와 할머니 내외, 서울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재래시장인 망원시장, 아직도 사람 사는 냄새가 그득한 망원동 구도로와 아기자기한 골목들, 산책하러 가기 딱 좋은 시야가 탁 트이는 한강 둔치까지……. 벌써부터 망원동의 모든 것이 그리워진다.
그나마 예전에 옥탑 마당에서 찍어놓은 한강 쪽 전망 사진을 발견했다. 망원동이라는 이름이 원래 조선시대 왕족이 지은 ‘먼 경치도 잘 볼 수 있는 정자’라는 ‘망원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니, 내가 찍은 사진도 그럴듯해 보였다. 그래 이 옥탑은 망원정이다. 주안상 같은 평상도 있고 연못 같은 반신욕조도 있고 대책 없는 한량도 넷이나 되는 호사스런 곳. 떠나는 마당이 되니 감상적이다.
책의 말미에 등장하는 작가의 말이 참 따뜻하네요. 아무튼 불편한 편의점과 마찬가지로 모처럼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 좋은 소설이었습니다.
책이 나오기까지 도움을 주신 소중한 분들의 이름이 엔딩 크레딧에 올라오고 있다. 잘 봐요. 당신 이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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