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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정치사회

기레기 탐구생활 : 나쁜 기자들의 위키피디아, 강병철

by Caferoman 2022. 1. 13.

이시대 기레기들의 언어를 탐구해보는 책 : 나쁜 기자들의 위키피디아, 강병철

 

기레기들의 프레임과 진영논리를 살펴보자

자극적인 제목과 오보, 속보 경쟁, 베껴 쓰기 등은 21세기 들어 새롭게 생겨난 언론의 행태가 아니다. 부끄럽지만 기레기라는 단어가 보편화되기 전부터도 언론은 그런 일들을 반복적으로 해왔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라면 과거 우리 언론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잘 기억한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기, 또 민주화•산업화시기 등 역사의 고비를 지나는 동안 언론이 권력에 고개를 숙이고 진실을 외면한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 책의 저자는 대한민국 언론인의 입장에서 자성적인 시각으로 '기레기'라고 폄하되고 있는 한국 언론의 실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한국 언론의 이러한 행태가 비단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정보의 공유와 전달을 독점하다시피하던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 독자들은 고도화된 정보화 사회에서 기사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기사의 프레임에 감춰진 사실은 직접 확인해 보는 시대가 되었기에 기사의 내용보다 의도를 더 따지며 기사 내용을 받아 들일 정도로 영리하고 그만한 역량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즉 저자의 표현대로 이제 "기사는 정보의 원천이 아니라 검증의 대상이며 수준 이하의 기사를 쓴 기자들은 여지없이 기레기라는 낙인을 받아야 하는 심판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저자가 정리한 이시대 언론이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은 아래 4가지로 정리해 볼수 있습니다.


1. 특정 신념이나 가치관을 마치 ‘정통’, ‘정상’인 것처럼 포장하면서 부당한 담론의 권력을 만들어낸다.
2. 편 가르기를 부추긴다. 여기 노출된 사람들은 보수나 진보 같은 특정 세력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스스로 도움될 것 없는 편 가르기에 기꺼이 동참한다. 

3. 사람들이 사안의 본질을 볼 수 없도록 만든다.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을 교묘하게 감추고 굳이 집중하지 않아도 될 부분에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쏟게 만든다.

4. 합리적인 논의의 장을 닫아버린다. 

 


포퓰리즘

포퓰리즘 : 표票 + 퓰리-즘 [명사] 대중 영합주의. 오로지 표를 얻기 위해 실현 가능성이 낮거나 정부의 재정건전성을 해치는 선심성 공약을 남발하는 행위를 뜻한다. 주로 복지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쓰이지만 다른 모든 정책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언론에서 사용하는 포퓰리즘이라는 단어의 가장 큰 문제점은 치밀한 근거 없이 진짜 포퓰리즘인 것, 포퓰리즘이 아닌 것, 포퓰리즘인지 아닌지를 따지기 애매한 것들을 입맛에 따라 포퓰리즘으로 싸잡아서 포퓰리즘 딱지를 붙이고 비판인 여론을 선동한다는 점에서 가장 주되고 저질적인 전략임을 저자는 첫번째 주제로서 포퓰리즘을 꼽으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를 버리고 전제정치나 귀족정을 채택하지 않는 한 이 정쟁의 언어는 때때마다 언론에 등장할 것이다. 그렇다고 뉴스에서 포퓰리즘이란 단어가 등장할 때 “또 쓸데없는 정쟁을 하네”라며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 사실 시민들의 삶과 별 관계가 없는 문제에는 포퓰리즘이란 표현이 동원되지 않는다. 자기들 밥그릇 싸움인 선거구 획정이나 국회 상임위원회 구성 같은 것을 놓고 포퓰리즘을 운운하는 정치인은 본 적이 없을 것이다. 포퓰리즘이란 비판이 가해졌다면 그건 그 정책이 좋든 나쁘든 우리의 실생활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뜻이다. 이 표현이 자주 나올수록 우리는 더욱 철저히 그 쓰임에 대해 살펴보고 내용을 따져들 필요가 있다. 그리고 언론이 입맛대로 쓰는 포퓰리즘의 왜곡된 쓰임새를 의식적으로 거부한다면 이 기레기의 언어도 언젠가는 긴 수명이 끝나는 날이 올 것이다.

 

시위꾼과 촛불집회

시위꾼 : [명사] 집회 현장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활동가들을 일컫는 말. 주로 정부에 비판적인 집회의 폭력성과 불법성 등을 부각시킬 때 쓰인다.

 

역사적으로 집회와 폭력은 어떻게 보면 불가분의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촛불집회"와 같이 특정 집회를 다룰 때에 그 현장에서 폭력이 있었느냐 없었느냐를 중요하게 보는 관점을 중시하는 언론의 프레임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촛불집회에서 이런저런 폭력 사건이 발생했다면 언론의 논조는 달라졌을 것이고 집회의 결과도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지 않았겠냐는 저자의 논조처럼요.)

 

 

2016년 촛불집회는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돋보인 비폭력 평화집회였지만 당연히 그곳에도 시위꾼들이 존재했다. 촛불집회의 공식 주최자는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 국민행동’(퇴진행동)이란 단체였다. 여기에는 1,500여 개 시민단체가 참여했는데 기존에 보수 언론이 시위꾼이라고 이름 붙인 인사들이 수두룩하게 이름을 올린 것은 물론이다. 촛불집회에 참가한 대부분 시민들은 이들이 누군지 큰 관심이 없었을 수 있지만, 매번 성명을 발표하고 집회 참가자 수를 집계해 언론에 알리고 행진을 기획하고 무대를 설치해 문화 공연의 판을 열어준 게 바로 이들의 일이었다. 당시 보수 언론은 물론 진보 언론에서도 이 시위꾼 단체를 크게 조명하지 않았다. 이념 지향을 떠나 언론들이 공히 이들은 부차적인 존재이며 촛불의 진정한 주체는 ‘평범한 시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2016년 촛불집회가 폭력적 저항의 양상을 띠었다면 아마 퇴진행동과 소속 인사들의 이름은 연일 신문 지면을 도배했을지 모른다.

 

여기서 시위꾼이란 표현은 다분히 악의적인 갈라치기로 악용될 수 있는 표현인데 평범하고 건전한 시민과 뭔가 다른 목적에서 집회시위에 참가한 불순한 자들을 "누가, 어떤 기준으로 가를것인가"의 문제에서 정략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을 더하는 권력층과 언론에 문제가 있음을 고발합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잘못된 결정을 하고 언론이 이를 바로잡지 못해 시민들이 직접 저항에 나섰는데 다름 아닌 그 저항의 대상이 올바른 저항의 방식을 정해놓고 건전한 저항과 불건전한 저항을 가르고 있는 셈이다." 라는 저자의 표현처럼...

 

시위꾼이란 표현은 결국 이런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적 저항에 대한 권력의 반격이자 억압이다. 변화를 거부하고 현상을 유지하려는 누군가가 고안해냈을 것이 분명한 이 단어는, 현실에 불만을 토해내며 변화를 주도하려는 자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우는 역할을 지금도 여전히 잘해내고 있다.

 

내로남불

내로남불 [명사]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준말. 똑같은 행위를 두고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평가를 내리는 정치인들의 이중 잣대를 비난할 때 주로 쓴다. 도덕적 자질에 대한 문제 제기처럼 보이지만 실은 ‘정치인은 모두 똑같다’는 인식을 확산시키고 결국 강도 높은 정치혐오와 무관심을 유발한다.

 

내로남불은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 나무라는' 전략으로 삼십육계의 전략 중 혼전계(混戰計)의 일종이라고 볼수 있는 전략입니다. 보통은 더 지저분하고 더 나쁜쪽이 사용했을 때에 전략적인 이득이 큰 전략이라는 점에서 더 발끈하는 쪽이 더 뒤가 구리다고 판단할 수 있는 판독기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혼전계(混戰計) : 상대방과 혼전 상태일 때 상대의 허점을 노려 상대를 파악하여 혼란을 유도한 뒤 승기를 잡는다.

 

내로남불은 겉으로는 대상의 도덕적 자질에 대한 문제 제기처럼 보이지만 분명 다른 층위의 전략적 계산이 존재한다. 우선은 ‘물 타기’다. 내가 비판을 받았던 잘못을 너도 저지르고 있다는 이야기다. ... 진흙탕싸움이라면 흰옷보다는 이미 더러워진 옷을 입은 사람의 마음이 더 편할 것이다. 유권자들의 뇌리 속에 부정부패와 비리로 얼룩진 기득권 세력으로 각인돼 있는 진영에게 내로남불은 별 부담 없이 꺼내 쓸 수 있는 카드인 셈이다.

 

어느 한쪽에서 내로남불에 언성을 높일 때 이를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경계해야할 것은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른지에 대한 판단 자체를 거부하는 "양비론"적인 자세로 논쟁의 내용은 뒤로 미뤄두고 논쟁 자체만을 문제 삼는다면 논쟁의 장 자체가 열릴 수 없다는 점이며 이런 자세로 인한 정치 혐오와 무관심이 가득한 사회는 기득권 정치인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정치 환경을 만들어 줄 뿐임을 저자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종북과 적폐

종북과 적폐 [명사] 종북(從北)은 북한의 집권 세력을 맹목적으로 추종한다는 뜻이고, 적폐(積弊)는 오랫동안 이어져온 잘못된 관행이나 폐단을 의미한다. 종북은 주로 보수 진영에서 진보 세력의 대북 정책 등을 비판할 때, 적폐는 반대로 진보 진영이 보수 기득권 세력의 부패 등을 저격할 때 쓴다. 두 단어 모두 언론과 정치권에서 본디 뜻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에서는 종북과 적폐라는 두 단어를 하나의 연장선상에 두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마치 "보수의 품격"에서 표창원이 박정희와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상호 이해가 없이 화합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 것 처럼요.

 

종북과 적폐, 두 단어를 한 장에서 다루는 것에 대해 대부분 독자들은 불쾌감을 느낄 것이다. ‘종북 척결’을 자주 입에 올리는 사람은 그런 사람대로, ‘적폐 청산’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사람은 또 그 나름대로 종북과 적폐는 전혀 질이 다른 문제라고 여길 것이 틀림없다. ... 종북과 적폐는 두 세력 간의 대결 구도에서 상대 진영을 특정 프레임으로 가두는 전략적 표현들이다. 두 단어가 가진 다양한 용법에도 불구하고 종북은 보수 세력이 진보 세력에게, 적폐는 진보 진영이 보수 진영에게 특정한 이미지를 덧씌우고 상대를 옭아맬 때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종북은 진보 진영 내부에서 북한과의 관계를 문제 삼아 쓰는 표현에서, 적폐는 군사독재의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회운동 구호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두 단어는 보수와 진보 양 진영이 서로의 근본적인 정체성에 관해 시비를 거는 비방의 도구로 자리 잡았다는 점을 이 책은 마지막 챕터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의 한줄 평

민주주의, 국가, 공동체, 정치에 대한 굵직굵직한 언론의 키워드들을 다루면서 그 끝에 저자는 결국 언론역시 하나의 도구일 뿐이며 이 도구를 제대로 사용하고 제기능을 하도록 감시하고 바로잡는 일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해야하는 일임을 강고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도구의 유용성을 잘 알고 있는 정치 권력, 자본 권력 등 힘 있는 자들이 이를 독점하게 될테니까요.

 

이 시대 기레기라고 폄하되는 언론들이 남발하는 프레임과 진영논리를 다루고 있다.
그런의미에서 어느쪽에서나 불편해 할만한 책일 수 있다.
살충제에 반응하는 집단은 크게 두 부류이다.
박멸해야할 해충이거나 그 해충에게서 빨아먹을 것이 있는 기생충이거나
- 이 책을 읽고 난뒤 작성한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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