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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정치사회

민족주의와 애국심, 진보와 보수 : 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by Caferoman 2022. 1. 18.

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진보와 보수등 국가에 관한 개론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민족주의와 애국심

인간은 어떤 외적인 기준의 강요로 공동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어딘가에 귀속될 수 있다. 인간은 인종의 노예도, 언어의 노예도, 종교의 노예도, 강물의 흐름의 노예도, 산맥의 방향의 노예도 아니다. 인간의 건전한 정신과 뜨거운 심장이 민족이라고 부르는 도덕적 양심을 창출한다. 이 도덕적 양심이 공동체를 위해서 바친 희생을 바탕으로 자신의 힘을 증명할 때 민족은 정당하게 존재할 권리가 있다. − 에르네스트 르낭, 『민족이란 무엇인가』

 

피히테 : 본캐가 철학자인데 부캐인 국가주의자가 더 떠버린

민족주의와  애국심의 경계는 어디즈음일까요? 이 책은 원래 본캐가 독일의 관념론 철학자이지만 오히려 그의 저서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 더 유명해지면서 극단적인 국가주의자의 상징이 되어버린 피히테의 사상을 통해 민족주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에게 애국심은 외부의 힘에 맞서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기 위한 민족의 단결을 의미한다. 그런데 피히테의 세계에는 민족만 존재할 뿐 인간이 보이지 않는다. 국민 개개인은 삶의 주체가 아니라 민족 또는 국가의 구성원일 뿐이다. 국가가 만든 획일적 규칙에 따라 민족의 영원성과 위대함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개인적 충동을 억제하면서, 국가가 제시한 목표를 자기 삶의 목표로 여기며 살아가는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

 

피히테의 이러한 사상은 근현대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들에게 큰영향을 끼쳤습니다. 독일에서는 나치 시절 ‘히틀러 유겐트’와 같은 청소년 세뇌교육 조직을 통해 부분적으로 실현되었고 우리나라 유신시대에도 "국민교육헌장"과 같은 방식을 통해 일부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은 ‘민족중흥’이라는 국가의 목표가 곧 나의 개인적 인생목표라고 강요당한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톨스토이 : 민족주의의 대척점에 서다

세계적인 대문호이자 사상가인 톨스토이는 제1차 세계대전과 인류 역사 최초의 사회주의혁명이 눈앞에 다가왔던 시기 제정 러시아와 유럽의 사회 상황을 보며 애국심이라는 인위적이고 유해한 감정을 근절해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그는 애국심은 자기 국민만을 사랑하는 감정일 뿐이며 자기 마음의 평정과 재산을 희생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치면서 적의 침략과 학살에서 국민을 보호한다는 신조라며 애국주의를 비판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애국심이 인위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유해한 감정이라고 확신하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인류가 겪는 병폐 가운데 많은 것들이 애국심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애국심을 조장해서는 안 된다. 이성적 존재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애국심을 억누르고 근절시켜야 한다. 사람들을 궁지로 몰아넣은 세계적 군비확장과 파멸적 전쟁은 바로 이 애국심에서 야기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도 애국심이 퇴행적·시대착오적이고 유해하다는 주장에 대해서 사람들은 침묵하거나 왜곡으로 대응한다. 옳지 못한 애국심, 호전적이거나 맹목적인 애국심은 나쁘지만 참되고 올바른 애국심은 매우 고양된 감정이며, 이를 비난하는 것은 비이성적일 뿐 아니라 악의적이라는 반론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참되고 올바른 애국심이 무엇인지 아직까지 들은 바가 없다. 이렇게 말할 때 톨스토이는 비뚤어진 애국심이 아니라 애국심 그 자체를 악으로 보았음에 분명하다.

 

민족주의와 애국심이 보여준 전쟁과 갈등의 참상을 몸소 체험한 톨스토이는 결국 종교적 해결책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고 "각자 욕망을 줄이자, 사람들에게 진정한 행복을 계시하자, 부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임을 보여주자" 라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결국 그는 사람들을 훌륭한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스스로 훌륭한 삶을 살기로 결심합니다. (실제로 그러한 삶을 살다가 돌아가셨구요.) 그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삶을 정착시키는 데 이바지하고자 한다면 스스로 수양하면서 복음서의 다음 구절을 실천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한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 마태복음 5장 48절”

 

르낭 : 전쟁과 평화의 원인은 무엇인가?

르낭은 유럽의 모든 국가들이 자유주의적 국가관으로 회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앞선 포스팅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유주의 국가관/철학은 개인을 집단보다 우선 존중하여 집단의 결정보다 개인의 자유롭고 주체적인 결정을 중시합니다. 그의 관점에서 민족이란 이미 치러진 희생과 여전히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 희생의 욕구에 의해 구성되는 인간의 거대한 결속이자 함께 공동의 삶을 계속하기를 명백하게 표명하는 욕구의 집합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처럼 피히테와 톨스토이, 르낭은 애국심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해했습니다. 피히테에게는 ‘살아 있는 언어’가, 르낭에게는 ‘함께 귀속되고자 하는 의지’가, 톨스토이에게는 민족애, 조국애 또는 애국심은 이성으로 근절해야 하는 유해하고 근거 없는 허위의 감정이었습니다. 

 

급진주의와 점진주의

플라톤과 마르크스는 사회 전체를 급진적으로 변모시키는 계시적 혁명을 꿈꾸었습니다. 이런 급진주의는 지금보다 좀더 낫고 좀더 합리적인 정도가 아니라 추함이 전혀 없는 세계, 낡은 쪼가리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는 지저분한 옷이 아니라 완전한 새 옷, 참으로 아름다운 새 세상을 건설하고자 하는 욕망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에 이를 유토피아주의 혹은 비타협적 급진주의(radicalism)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반면 카를 포퍼는 ‘점진적 공학’(piecemeal engineering)이라는 방법론을 제시합니다. 포퍼는 사회 전체를 개조하는 유토피아적 공학의 청사진이 정말 좋은 것인지, 만인을 행복하게 할 것인지, 어떤 실현방법이 있을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점진적 공학의 청사진은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조정하기도 쉽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이상적인 선과 선을 실현하는 수단에 대한 합의보다 현존하는 악과 악을 퇴치하는 방법에 대한 합의가 더 수월하기에 민주적 방법으로 문제를 개선할 수있다는 점을 점진적 공학의 장점으로 꼽았습니다.

 

점진적 공학이란 어떤 것인가? 포퍼의 표현에 따르면 ‘민주적 간섭주의’다. 포퍼는 19세기 유럽 자본주의 체제를 ‘방만한 자본주의’로 규정하면서, 이것이 정의롭지 못하며 비인간적이라는 점은 논쟁할 여지가 없다고 했다. 그의 진단에 따르면 노동자들의 극심한 궁핍과 제한 없는 장시간노동, 폭행과 인권유린, 유아노동 같은 사회악이 창궐한 것은 ‘자유의 역설’ 때문이다. 여기서 포퍼는 마르크스와 같은 견해를 표명했다. “제한되지 않는 자유는 자멸한다.”

 

유토피아적 공학과 점진적 공학중 하나를 양자택일 할 수 있을까? 포퍼는 그럴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최악의 긴급한 악"을 해결하는데에 있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경우가 있음을 저자는 지적합니다.

 

포퍼에게 물어보자. 기원전 73년 검투사 양성소를 탈출해 로마제국의 군대에 맞섰던 스파르타쿠스에게 노예제도라는 ‘최악의 긴급한 악’을 제거할 수 있는 그 어떤 ‘점진적 공학’이 있었을까? 1894년 조선왕조를 붕괴 위기에 몰아넣었던 갑오농민전쟁의 지도자 전봉준에게는 엄격한 신분제도에 기초를 둔 봉건제도를 타파할 그 어떤 ‘점진적 공학’이 있었을까? 1789년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왕을 단두대에서 처형했던 파리 시민들에게 부르봉 왕가의 전제정치를 무너뜨릴 그 어떤 ‘점진적 공학’이 있었을까? 1905년 황제에게 고통을 하소연하려고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 광장에 모였다가 총탄 세례를 받았던 러시아 노동자들에게 차르의 압제를 이겨낼 그 어떤 ‘점진적 공학’이 있었을까? 모두가 불가능한 이야기다. ‘점진적 공학’은 사회혁명의 불벼락이 국가권력을 덮치기 전에 이미 권력 내부에 들어와 있었던 사람들의 몫일 뿐이다. ‘최악의 긴급한 악’으로 인해 숨이 넘어가기 직전 상황에 몰려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오로지 사회혁명의 길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진보와 보수 : 새는 좌우 두 날개로 난다

진보와 보수는 사유습성과 생활방식, 제도의 변화에 대응하는 정신적 태도를 가리키며 진보는 생활환경의 변화가 요구하는 새로운 사유습성과 생활방식, 그에 따르는 제도의 조정 필요성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려는 정신적 태도이며, 보수는 익숙한 것을 지키려 하다보니 변화를 거부하게 되는 태도라고 저자는 정의합니다. 

 

새는 좌우 두 날개로 난다. 보수주의는 생물학적 본능이고 진보주의는 목적의식적 지향이다. 보수가 구심력이라면 진보는 원심력이다. 사회는 진보와 보수가 있기에 유지되고 발전한다. 진보주의자만 있는 사회는 안정성이 없을 것이다. 생활환경의 사소한 변화조차도 통제할 수 없는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혁명으로 번져나갈지 모른다. 반면 보수주의자만 사는 세상에서는 혁신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 사회는 존립을 위협하는 심각한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몰락할 것이다.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하려면 둘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주장이 있다. 조금 더 부드럽게 표현하면 진보는 단결하는 능력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는다. 현존하는 지배적 사유습성을 지키는 보수주의는 익숙한 것을 수용하고 낯선 것을 배척하는 인간의 본능에 부합한다. 쉽게 단결하며 잘 무너지지 않는다. 무너져도 단시간에 수월하게 복원된다. 반면 진보주의는 새로운 사유습성을 창조하여 지배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운동이다. 진보는 본능을 거슬러 간다. 그래서 쉽게 단결하지 못하며 작은 오류만으로도 쉽게 무너진다. 한번 무너지면 복구하기 어렵다. 진보는 바람을 거슬러 나는 새,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는 물고기와 같다. 열정과 신념이 무너지면 바람에 날리고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게 된다. 평생 진보주의자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대한민국이 유능한 안보국가가 된다는 것, 자본에 있어 발전국가가 된다는 것, 진정한 민주국가가 된다는 것 끝으로 복지국가가 된다는 네가지 지향점이 서로 상충되지 않고 모두 훌륭한 국가를 구성하기 위한 필수 구성물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국가는 외부 침략과 내부 범죄의 위협에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그러나 단지 안보와 치안을 잘한다고 해서 훌륭한 국가라고 할 수는 없다. 기껏해야 유능한 안보국가(安保國家)일 뿐이다. 훌륭한 국가는 국민의 물질적 생활을 풍요롭게 만든다. 그러나 물질적 부의 증진만으로 훌륭한 국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작해야 자본주의 발전국가(發展國家)에 지나지 않는다. 훌륭한 국가는 만인에게 자유를 보장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계급지배의 도구라는 비난을 모면한 민주국가(民主國家)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훌륭한 국가라고 하기는 어렵다. 훌륭한 국가는 실업과 빈곤, 질병, 고령, 재해와 같은 사회적 위험에서도 시민을 적극 보호한다. 시민들이 스스로 연대하여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런데 안보와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를 토대로 삼지 않고 만들 수 있는 복지국가(福祉國家)는 없다. 이 네 가지 국가는 서로 다르지만 상호 배척하지 않는다. 훌륭한 국가는 네 가지 모두여야 한다. 대한민국은 그 모든 것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절차와 제도를 가지고 있다.

 

다소 따분할 수 있는 국가론개론을 한국현대사에 빗대어보면서 과연 어떠한 국가관을 우리는 가지고 있으며 지향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해주어서 비교적 어렵지 않게 완독을 할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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