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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정치사회

서가명강 : 한국 정치의 결정적 순간들, 강원택

by Caferoman 2021. 12. 30.

주요 용어 정리

 

사사오입 개헌

1954년 11월 29일, 대통령의 3선 제한을 철폐하는 것을 핵심으로 집권당 자유당이 사사오입의 논리를 펼치며 정족수 미달의 헌법 개정안을 불법으로 통과시킨 2차 헌법 개정을 말한다. 국회 표결 결과 찬성이 1표 부족해 135표로 부결되었으나, 여당은 재적 인원 203명의 3분의 2를 반올림하면 135명이 되어 의결 정족수를 충족한다며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87년 체제

한국 사회의 현재 모습을 형성하는 데 1987년의 민주화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인식에서 만들어진 개념으로, 6월 민주항쟁을 통해 출현한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체제의 복합적 특성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권위주의 체제의 종식과 형식적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의미한다.

 

3당 합당

1990년 1월 22일,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야가 합당하며 한국 정치 지형의 재편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다.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야당인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야합하여 지금까지 국내 보수 세력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민주자유당이 탄생했다. 당 총재는 노태우 대통령, 사실상 대통령을 대신하여 당 운영을 책임지는 대표 최고위원은 김영삼, 최고위원은 김종필과 박태준이 맡았다. 여소야대 국회에서 사상 첫 여당 72퍼센트의 국회가 되면서 표면적으로 노태우 정권은 절대 다수의 의석을 확보한 여당을 갖게 되었다. 합당을 거부한 김대중의 평화민주당만이 유일한 야당으로 남게 된다.

 

혼합형 선거제도

다수대표제와 비례대표제를 결합한 형태.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 지역구 후보 단계에서 후보들 간의 경쟁에 의한 결과로 의석 배분이 이루어지면 정당명부 단계에서 지역구 선출 결과와는 별개로 정당별 득표율에 비례하여 비례의석을 배분한다.

 

정당정치

정당정치는 정당이 정권을 잡고 정치적 실권을 가지는 정치를 말하며, 일반적으로 복수정당제를 전제한다. 각 정당은 정치 과정에서 일반 대중이나 이익집단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집약함에 더불어 결집된 의사를 정부에 전달하는 대변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정당은 선거를 통하여 일반 대중의 참여를 조직화하는 한편, 의회뿐만 아니라 정부까지도 장악함으로써 정권 담당의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정당정치는 의회정치와 민주정치를 실제로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제왕적 대통령

대통령의 권한이 다른 정부 기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막강해 제왕의 지위와 비견됨을 비유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이 용어는 미국의 역사학자 슐레진저 2세가 1973년 출간한 『제왕적 대통령제(The Imperial Presidency)』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닉슨 행정부의 막강한 권위를 언급하면서 “미국의 대통령은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헌법에서 제한된 범위를 넘었다”라고 지적했다.

 

포퓰리즘(populism)

대중을 중시하고 반엘리트적인 관점에서 정치 및 사회 체제의 변화를 주장하는 수사법, 또는 그런 변화로 보통 사람들의 요구와 바람을 대변하려는 정치사상 및 활동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한국 사회에서는 ‘정책의 현실성이나 가치판단, 옳고 그름 등 본래 목적을 외면하고 대중적 인기에만 영합해 목적을 달성하려는 정치 행태’, ‘인기 영합 주의’ 등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다.

 

패권 정당

체제 여러 개의 정당 가운데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한 지배 정당이 정치를 주도하는 정당 체제를 말한다. 지배 정당 이외의 정당은 단지 민주적 제도를 포장하는 역할에 그치며, 지배 정당을 견제하거나 지배 정당과 경쟁하는 기능은 가지지 못한다.

 

헌법 제 1조 :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

"수천 년 동안 왕조하에 있던 나라에서 돌연 1919년 이후에 공화정을 구상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헌법 1조에 명시된 민주공화제라는 명제에 의문을 던지는 것으로 책을 시작합니다. 당시 대부분의 독립운동은 새 나라의 정체를 공화정으로 삼았으며 이는 제대로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고 세상의 변화에 둔감해, 결국 나라를 빼앗긴 왕조에 대한 불신이 담겨있음을 시사합니다.

 

1919년 9월 이승만의 주장에 따라 대통령제로 개정되었지만, 1919~1925년 사이에 이승만은 겨우 6개월 정도 상해에 머물렀을 뿐이다. 또한 미주 지역의 독립운동 자금이 이승만의 외교 활동비로 집행되면서 송금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것이 임시정부 측과 갈등을 빚게 되었고, 과거 이승만이 미국의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에게 한국을 위임 통치해달라는 청원서를 보냈던 것도 논란이 되었다. 이 때문에 1925년 3월 이승만에 대한 탄핵안이 임시의정원에서 통과되었다. 그 이후 4월 7일 개헌을 통해 정부 형태는 내각책임제로 바뀌게 된다.

 

대통령제 vs. 내각제

대통령제의 대표적 국가 : 미국

미국의 헌법 제정자들은 정치 권력 자체를 불신하여 사람이 아무리 양심적이고 선의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권력은 그렇지 않기에 권력은 분산되어야 하고 나눠진 권력 간의 견제를 통해 균형이 유지되어야 함을 주장했습니다. 권력을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세 개로 나누고 상호 견제를 통해 균형을 맞추는 것이 대통령제의 중요한 원칙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의원 내각제 : 국왕과 의회간의 갈등과 대립 속에서 진화한 제도

내각제는 역사적인 진화의 소산으로 국왕과 의회 간의 갈등과 대립 속에서 발전해왔습니다.

내각제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의회가 행정 권력을 선출한다는 점 입니다. 따라서 내각제는 의회의 다수 의석을 차지해야만 행정 권력을 장악할 수 있어 권력 융합의 성격을 갖습니다. 미국 대통령제가 입법부와 행정부를 엄격하게 분리하는 것과 달리, 내각제는 입법부를 장악해야 행정부를 장악할 수 있는 구조인 셈입니다.

 

대통령의 권한이 날로 강화되어온 우리 정치 역사

헌정 왜곡은 이승만 대통령 첫 임기 말인 1952년 7월 7일의 개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제헌국회는 의원의 임기를 2년으로 정했기 때문에, 1950년 5월 30일에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그런데 이 선거 결과 이승만 대통령의 지지 세력이 크게 줄어들고 만다. 한편 대통령 임기는 4년이었기에 1952년 8월 5일 제2대 대통령 및 제3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하는 간접선거였으므로,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은 국회 내 다수를 차지하는 반이승만 의원들 때문에 그 가능성이 매우 낮은 상황이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해 모든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한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백골단’, ‘땃벌떼’ 등 깡패 조직들을 동원해서 관제 데모하는 것을 넘어, 국회 통근 버스를 헌병대를 동원해 끌고 가 야당 국회의원 10명에게 국제공산당의 자금을 받았다는 혐의를 씌워 구속하는 등 공포 분위기로 야당 의원들을 압박했다. 이것이 바로 1952년 5월 25일에 일어난 ‘부산정치파동’이다.

 

첫단추를 잘못 끼워도 아주 잘못 끼운 이승만의 헌정 왜곡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제의 흑역사를 여는 전주곡이 된듯 합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헌법을 끼워 맞추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통령의 권한은 날로 커지게 됩니다.

 

2년 뒤 또 다른 헌정 왜곡이 1954년 11월 29일에 일어난다. 이른바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대통령의 3선 제한을 철폐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이를 통해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를 4년으로 하고, 재선에 의해 1차 중임할 수 있도록 했는데, 부칙으로 공포 당시의 대통령의 경우는 1차 중임의 제한을 적용하지 않도록 해 사실상 이승만은 평생 대통령을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다. ... 이승만 대통령의 3선 개헌을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자유당은 1954년 5월 20일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엄청난 선거 부정을 저질렀다. 금품, 향응 등이 난무했고 정부 기관이나 공무원들의 선거 개입도 빈번했다. 특히 경찰의 선거 개입이 심해서 ‘몽둥이 선거’라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이었다. ... 그런데 투표 결과는 찬성 135, 반대 60, 기권 7표였다. 의결 정족수는 재적 인원 203명의 3분의 2인 136표인데 여기에서 1표가 모자라는 135표가 나온 것이다. 이에 따라 자연히 헌법 개정안은 부결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은 부결된 개헌안을 가결로 만들기 위해 억지 논리를 들고 나왔다. 재적 인원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인데 0.333···은 0.5보다 적은 수이기 때문에 사사오입하면 의결 정족수는 135라는 것이다. 이러한 억지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수학자까지 강제로 동원되었다.

 

이승만의 두번째 헌정 왜곡은 그 유명한 사사오입입니다. 박수칠 때 떠나는 법을 모르는 이승만은 권력에대한 욕심을 놓지 못해 초대 대통령의 중임제한을 무제한으로 풀어버리려는 시도를 감행합니다. 하지만 온갖 비리와 꼼수에도 불구하고 1표 차이로 과반수를 넘지 못하고 결국 "과반수의 3분의 2는 정수로 떨어지지 않으니 반올림한다"라는 신박한 논리로 개헌을 강행합니다.

 

사사오입 개헌으로 임기 제한이 없어진 이승만은 1956년 5월 15일 제3대 대통령 및 제4대 부통령 선거에서 세 번째 잇달아 집권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4년 뒤 네 번째 집권을 향하던 이승만은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및 제5대 부통령 선거에서 부정선거를 저지른다. 그리고 이에 항의하며 일어난 4ㆍ19 혁명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제헌헌법에서 의도했던 견제받는 대통령제는 이승만의 집권 이후 점차 무너져내렸고, 한 사람에게 권력이 온통 집중되는 형태로 왜곡되어 갔다. 그러나 그러한 독재 체제는 결국 민주주의를 외친 국민의 힘에 의해서 붕괴되고 말았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이후 허정 내각수반이 과도 정부를 이끌며 대통령제 중심의 헌법을 내각제로 고쳤다. 이후 1960년 7월 29일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대통령 윤보선과 국무총리 장면이 이끄는 제2공화국이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민주당 정부는 극심한 당내 파벌 갈등 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쿠데타에 의해 9개월 만에 붕괴되고 말았다.

 

어느정도 적당히 해먹고 내려왔으면 좋았을 것을 결국 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까지 어떻게든 권력을 잡아보려고 부정선거까지 저지른 이승만은 결국 4.19혁명에 의해 쫒겨나게 됩니다.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제가 생기고 난 뒤에 처음 보여진 모습이 이와 같이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이었다는 점음 무척 유감입니다.

 

계속되는 제왕적 대통령제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은 쿠데타를 일으켜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했다. 제도적으로 강력한 대통령제의 특성이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부터로,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던 만큼 박정희는 강한 리더십을 원했다. 그만큼 처음부터 권력을 나눈다거나 협치적인 방식으로 통치를 하려는 생각은 아예 없었다. 이후 우리나라 대통령제는 더욱더 강력한 권력 집중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 5ㆍ16 군사 쿠데타와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비사가 많은데, 당시 쿠데타 계획은 장면 총리를 비롯해서 국내 정치 인사들이나 미국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운과 우연, 제2공화국 정권 담당자의 비겁함, 오판 등이 겹치면서 결국 성공하고 말았다.

 

이승만이 제왕적 대통령을 추구하며 첫단추를 잘못 끼웠다면 박정희는 이에 방점을 찍게 됩니다. 이후에도 막상 대통령 후보들 자신의 권력이 자신의 임기 중 축소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이 제왕적 대통령의 구조는 계속해서 이어지게 됩니다.

 

제왕적 대통령의 카리스마 리더십 한국에서 대통령제가 도입되고, 복원되고, 유지되어온 배경에는 대통령이 되고자 했던 강력한 정치인들이 있었다. 제헌국회에서 내각제로 만들어져 있던 초안을 대통령제로 바꾼 건 이승만이었다. 제2공화국 때 내각제로 바뀌었던 통치 구조를 다시 대통령제로 바꾼 것은 박정희였다. 민주화 과정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들고 나와 대통령제가 지속되도록 한 것은 김영삼과 김대중이었다. 한국의 대통령제가 만들어지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대통령이 되고 싶어 했던 매우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정치 지도자의 존재와 관계가 깊다. 따라서 민주화 이후 이들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을 뿐, 대통령의 권한을 약화시키거나 분산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1987년 민주화 당시 개헌은 대통령 직선제라고 하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회복에서는 소기의 성과가 있었으나 근본적으로는 유신 체제, 전두환 체제와 맞닿아 이후에도 대통령은 ‘제왕적’으로 존재하고 청와대의 규모와 권한은 더욱 커졌다는 점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차이

박정희와 전두환 대통령은 모두 쿠데타를 통해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했지만 두 군인 출신 대통령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보면 대부분 박정희 대통령을 전두환 대통령보다 높게 평가하는데요.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 경제 성장에 대한 성과, 전두환 대통령의 경우 광주 시민에 대한 학살을 떠올린다는 차이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쿠데타 이후 대통령직에 어떻게 올랐느냐의 차이가 크다는 점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박정희는 5ㆍ16 군사 쿠데타로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군정을 실시한 후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윤보선 후보와 매우 치열한 선거전을 거쳐 대통령이 되었다. 두 후보 간의 표 차이는 불과 15만 표였다. 아주 공정한 선거는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매우 경쟁적인 선거를 통해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었다. 이에 비해 전두환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 조치 이후 유신 체제의 유산인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그리고 그 이후에는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선거인단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올랐다. 두 번 다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이 된 것이다. 선거인단 선거는 통일주체국민회의처럼 체육관에 한데 모여 투표하지 않았지만 체육관에 모이지 않았을 뿐 사실상 의미 없는 형식상의 선거라는 점에서 이 또한 체육관 선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박정희와 전두환이 대통령직에 오르면서 갖게 된 정치적 정당성에는 차이가 컸다. 이처럼 심지어 권위주의 통치자들에게까지도 국민적인 동의를 얻는 절차를 가졌느냐, 그렇지 못했느냐의 차이가 매우 큰 것이다.

 

물론 이후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도입시키며 대한민국 민주주의라는 시계를 정지시킵니다. (김대중에 대한 지지가 거센 상황에서 박정희는 유세에서 “여러분에게 표를 달라고 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이 선거 이후 유신 체제가 도입되었기 때문에 박정희의 말은 지켜진 셈이다.)

 

유신 체제 몰락 이후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전두환은 12월 12일 군사 반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듬해 5ㆍ17 비상계엄 확대 조치라는 사실상의 쿠데타를 통해 전두환을 필두로 하는 신군부가 ‘박정희 없는 유신 체제’를 이어갔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의 제5공화국에서도 유신 체제와 마찬가지의 선거제도를 채택한다. 대통령 선거는 형식적으로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없애고 선거인단 투표제도를 도입했지만 이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또 다른 체육관 선거였다.

체육관 선거에 거세게 저항했던 민심은 1986년 ‘직선제 개헌을 위한 1000만인 서명 운동’을 통해 민주화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고 결국 1987년 6월 전국적 규모의 민주화 운동과 민주화를 받아들인 6ㆍ29 선언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앞서 이승만 정권이 1956년 정ㆍ부통령 선거를 통해, 박정희 정권이 1978년 총선거를 통해 정권에 대한 민심 이탈의 시그널을 확인했던 것처럼, 전두환 정권 또한 1985년 총선거를 통해 그와 같은 시그널을 받았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선거 정치는 민심의 이반을 보여줌으로써 다가올 정치적 격변을 예고해왔다.

 

극우부터 극좌까지, 해방 후의 정당정치 1945년

정당정치 쳅터에서 저자는 해방과 함께 정치적 공간이 열리면서 다양한 정치 세력이 등장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념 지형의 맨 오른쪽에는 이승만, 김성수, 김구, 중도우파 안재홍, 중도파 김규식, 중도좌파 여운형, 그리고 맨 왼쪽의 박헌영 등 극우부터 극좌까지 상당히 다양한 정치적 지형이 형성되었으며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 결정의 소식이 알려진 후, 우익과 좌익은 각각 신탁통치 찬성과 반대로 입장이 갈리면서 이후 좌우익 간의 이념 대립이 본격화되었습니다.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 미소 간 냉전의 격화 등 국내외 상황의 변화 속에 남로당은 불법화되었고 단독정부 수립 여부를 두고 중도파와 김구 등 민족주의 우파가 1948년 총선거에 불참하면서 한국의 정당정치는 한민당 중심의 반공주의에 입각한 강경 우파를 중심으로 출발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1950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는 더욱 공고화되어 수십 년 동안 한국 정치에서 이어져온 보수 정당 지배 체제의 출발점이 된다.

 

결국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해방되었고, 미소 양국의 이해관계, 냉전 등 국제 정치적인 영향에 결국 남과 북은 분단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대한민국은 반공국가,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두 가지 중요한 정체성을 가지게 됩니다. 이후 군부정권과 극우주의 정당들이 반공주의를 전략적으로 이용했다면, 시민들은 교육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정체성을 공고히 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일으킬수 있는 원동력을 확보하게 됩니다.

 

시민들이 4ㆍ19 혁명을 통해 정의롭지 못한 권력에 대해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교육의 힘 덕분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운 자유민주주의가 현실 정치에서 실현되지 않는 현실에 시민들은 분노했고, 부정한 권력에 대해 저항했다. 4ㆍ19 혁명의 성공은 이후 중요한 정치적 유산으로 뿌리내리게 되었다. 4ㆍ19 혁명은 기본적으로 도시 중심의 사건이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게 되면서 이제는 시골을 포함한 전국의 모든 사람들이 ‘나라님’이라도 법을 지키지 않고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면 저항해야 하는 것이고 물러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서구의 낯선 자유민주주의 개념이 4ㆍ19 혁명을 거치면서 우리 안에 점차 내재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헌법 첫 문장에 3ㆍ1 운동과 더불어 4ㆍ19 혁명의 이념을 계승한다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4ㆍ19 혁명이 지닌 역사적 중요성을 증명해준다. 이후 유신 정권이나 전두환 정권의 억압하에서도 국민들이 끊임없이 저항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바로 4ㆍ19 혁명에서 찾을 수 있다.

 

민주주의 확립 : 아직도 가야할 길

대한민국 민주화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내용적으로 결코 혁명적 변화라고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입니다.

정작 투쟁을 통해서 얻어낸 것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라는 절차적 민주주의 복원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합의(consensus)란 절대 만장일치(unanimity)일 수 없다. 이 복잡한 사회가 같은 생각을 갖는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합의는 여러 가지 형태의 토론과 협의에 의해서 만들어지며, 모두의 뜻이 합치되었다 하더라도 토론과 양보와 타협을 통해 이뤄진 다원적 만장일치(pluralistic unanimity)의 형태다. 사회란 원래 불일치나 다양성으로 구성되며 합의는 만들어지는 것(consensusーbuilding)이다. 정당정치는 이처럼 민주주의의 발달과 함께 비로소 자리 잡게 된다.

 

저자는 대한민국의 선거에 대한 쳅터를 마무리 하며 "이제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립이라는 소극적 목표를 넘어 개방적이고 공정한 대표성의 확립, 정치적 표현과 선거운동의 자유, 비례성의 확보 등 민주적 가치가 보다 적극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 방향으로 선거 정치를 개혁해나가야 할 때다."라며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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