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에 이은 서가명강("서울대에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 시리즈의 두번째 책입니다. 저자의 전공인 "과학기술학"의 관점에서 소설,영화와 같은 예술작품 속에 담긴 과학기술과 그 의의를 풀어냅니다. 전체적인 감상평을 앞서 말하면 SF영화를 통해 철학을 풀어낸 마크 롤렌즈의 저서 "SF철학"과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었습니다.
가치판단이 결여된 과학의 위험성 : 홀로코스트 그리고 핵전쟁
우생학(eugenics)
진화가 인간에게도 적용되며 생존에 적합한 인간은 살아남고 그렇지 않은 인간은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이 자연의 순리라는 견해이다. 1920년대 미국의 이민 제한법, 2차 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 등이 이것을 기반으로 시행됐던 나쁜 정책들이다.
홀로코스트(Holocaust)
본래 구약에서 희생물을 통째로 태워버리는 특수한 종교의식을 가리키는데, 1948년 이스라엘공화국을 수립한 시온주의자들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지칭하는 용어로 공식 사용했다.
자칫 기술과 과학은 사실 관계나 세상의 법칙을 밝히는 데에만 국한된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히틀러와 나치당원들이 감행한 홀로코스트와 냉전체제에서의 무분별한 핵무기 확산과 그로 인한 핵전쟁 위험과 같은 역사적인 사례를 볼 때 가치판단이 결여된 과학기술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냉전체제에서의 핵전쟁 위험
1960년대 소련과 미국간에는 ‘쿠바 미사일 위기’처럼 거의 핵전쟁 일보직전까지 갔던 역사적인 위기상황이 실재 했습니다. 미국의 핵전략을 중점적으로 연구했던 허만 칸은 핵전쟁에 대한 여러 시나리오를 만들어서 분석했는데 그는 미국과 소련간 핵전쟁 전략을 분석한 끝에 다음과 같은 막말을 뱉어내었습니다
미국과 소련 간 전면 핵전쟁이 발발할 경우에 미국은 약 6000만 명의 사망자를 내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 빠르게 사회를 재건할 수 있었다. 그는 핵전쟁도 다른 전쟁과 마찬가지로 그저 전쟁일 뿐이고, 따라서 소련이 참기 힘든 도발을 할 경우에는 미국이 전쟁에 돌입해야 한다. 핵 전략을 잘 짜서 전쟁할 경우에 소련은 거의 궤멸할 정도의 피해를 보지만, 미국은 불과(!) 6000만 명만이 사망할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주장은 핵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하며 핵전쟁도 할 만한 전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책은 미국 최고의 학술 출판사인 프린스턴대학교 출판부에서 출판되었습니다.
마치 게임이론에서 1차선 도로 양방향에서 속도를 올리고 달려드는 운전자 중 누가 먼저 핸들을 틀 것인가를 겨루는 상황에서 "내가 더 미친놈이다"를 경쟁하는 것과 같은 위험천만한 1960년대는 무사히 지나갔지만 각 국가가 보유 중인 핵무기의 위험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소련이 참기 힘든 도발을 한다면 소련이 핵을 발사하지 않은 경우에도 미국이 핵무기를 가지고 선제공격을 하자고도 했다. 과연 이들은 제정신으로 이런 얘기를 한 것일까? 물론 미국이 심각하게 이런 전략을 고려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하면 이들의 얘기 자체가 일종의 전략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린 이 정도로 미친 상태이니 건드리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가치판단이 포함된 과학자의 목소리
나는 기술자/과학자일 뿐이니까 이 기술이 어떻게 쓰일지 고민할 것 없이 그냥 연구/개발만 잘하면 된다는 소극적인 자세는 위의 사례들과 같이 인류의 번영이 아닌 파괴에 일조할 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 과학자가 가치와 철학을 품고 기술과 과학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을 제시하는 모범적인 사례를 우리는 아인슈타인을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목소리의 효과가 변변치 않았지만요.
당시에 아인슈타인이라든지 버트런드 러셀같은 지성인과 과학자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핵전쟁을 반대했다. 핵전쟁을 하면 인류가 함께 절멸하기에 전쟁을 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말고 군비 감축에 들어가야 한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권위를 가진 전략가들은 과학자들의 만류를 소련이라는 나라를 전혀 이해 못하는 철부지 아이들의 칭얼거림으로 취급하고 핵무기를 늘리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당시 핵전략 중 하나로 상호확증파괴전략MAD, Mutually Assured Destruction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 전략은 쉽게 말해 끝장을 보자는 것이으니, 전략의 이름도 그에 걸맞은 ‘매드’였다.
인공지능과 4차 산업혁명 이후의 세상
저자는 인공지능이 대거 활약하게 되는 4차 산업혁명이 가속화돼서 이런 일이 상품과 지식 생산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난다면 상품이나 지식의 값은 싸지겠지만, 수많은 사람들 이로 인해 일자리와 그로 인한 소득을 잃어버리면서 그것을 돈 주고 사는 소비자는 점점 없어져버리는 사회가 될 수도 있음을 경고합니다.
오늘날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담론 속에서 가까운 미래에 AI의 발전이 인간을 공장과 사무실에서 쫓아낼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등장하고 있다. 사실 청년 실업이 많아지는 이유는 새로운 산업이 만들어내는 일자리보다 없어지는 일자리가 많기 때문이다. 구글은 지금 미국에서 가장 자산 가치가 높고 이윤을 많이 내는 회사이다. 예전에는 제너럴 모터스사(GM)가 그 자리를 차지했었다. 그런데 당시 GM에 고용된 인원은 60만 명이었던 반면 구글의 직원 수는 5만 명으로 GM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과학과 인문학은 상호보완적이다
“과학과 인문학이 상호보완적이다”라는 취지의 언급을 맨 처음 했던 철학자는 잠바티스타 비코Giambattista Vico라는 이탈리아의 사상가였습니다. 비코의 주장을 언급하며 저자는 이 책의 메인 주제라고도 할수 있는 과학과 인문학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는 완전히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문제는 거의 없고, 차이를 이해해야 하거나, 혹은 조금 더 옳고 덜 옳은 정도만 가릴 수 있는 문제투성이기 때문이다. 반면 수학의 경우에는 도출된 답이 맞는지, 틀리는지라는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다. 비코는 사람이 수학만 배운다면 결국 세상의 문제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방식에서 심각한 문제를 낳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그는 과학적 방법의 한계를 깨닫고 인간 사회를 더 이해하고 조정하기 위해서는 수학이나 과학이 아닌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또한 인문학과 과학의 조화에 더하여 예술적인인 감각을 더하는 것이 창의적인 과학자가 되는 중요한 균형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른마 인.과.예(인문학, 과학, 예술)를 갖춘 인재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생각의 탄생』의 저자 미셸 루트번스타인Michele Root-Bernstein은 노벨상 수상자를 연구한 바 있는데, 일반 과학자의 수와 비교했을 때 노벨상 수상 과학자들 중에서 사진을 하는 사람은 2배, 음악을 하는 사람은 4배, 미술은 17배, 공예는 15배, 작가는 25배, 무용을 하는 사람은 22배 정도 더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 노벨과학상 수상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한 가지 예술에 준전문가적으로 깊게 몰입했던 사람들이었다. 창의적인 과학자일수록 예술을 병행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과학이 상상력이 필요한 활동이라는 주장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저자의 다른저서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은 책임있는 기술과학에 초점을 둔 기술철학과 그 윤리에 대한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친근한 소재들을 가지고 잘 풀어내고 있습니다. 과학과 철학 이 모두가 쉽게 따분해 질 수 있는 장르임에도 이를 대중에게 잘 풀어낸 책(혹은 강의)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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