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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설에세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도스토예프스키 : 톨스토이의 임종을 지키던 단 한권의 책

by Caferoman 2021. 9. 26.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 도스토옢스키

 

도스토예프스키의 최후의 걸작, 그에 대한 끝없는 찬사

지금까지 쓰인 가장 위대한 소설 - 지그문트 프로이트
인생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은 모두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안에 있다. - 커트 보네거트 -
소설가로서 궁극적으로 쓰고 싶은 건 '종합 소설'이다. 이를 정의 내리기란 어렵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바로 그 예다. - 무라카미 하루키
한 인간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창조해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이제 이토록 경이로운 일은 일어났고, 여기에는 그 어떤 설명조차 필요치 않다. - 헤르만 헤세
창작자의 내면에 이는 온갖 모순과 동요를 도스토옙스키보다 탁월하게 입증해낸 작가도 없을뿐더러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만큼 이를 경이롭게 구현해낸 작품 또한 없다. - 조이스 캐럴 오츠

 

고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수많은 문인들로부터 찬사가 끊이지 않는 책이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아무래도 러시아 문학의 양대산맥, 톨스토이의 임종의 순간에 그를 지키고 있던 단 한 권의 책이었다는 점이 아닐까 싶네요.

 

이 책은 그 어마어마한 분량에 사실 시작하기가 어려울 뿐, 막상 읽기 시작하면 엄청난 흡입력으로 독자를 빨아들이는 마성을 가진 클래식입니다.

 

시작부터 범상치 않은 서문

요즈음 같은 시대에 작중 인물에 대해 명쾌함을 요구하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그가 몹시 이상한, 아니 괴짜라고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란 점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상하다느니 괴짜라느니 하는 것은 분명히 세상의 이목을 끌기는 하지만 해를 주는 일이 많다. 특히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요즘처럼 부분적인 것들을 한데 모아 어떤 보편적인 의의를 찾아내려고 애쓰는 시대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본디 괴짜란 사람은 대부분의 경우 사회의 일부분이면서도 고립된 현상이다. 그렇지 않은가?

 

작중 인물의 성격과 유형을 구분하기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마치 "감히 내가 만든 캐릭터들을 재단하려 하느냐?" 라며 호통을 치는 듯합니다. 톨스토이의 안나 까레니나가 대작다운 멋진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는 "지은이로부터"로 시작하는 서문에 붙이는 작가의 해설은 이 대작의 포스를 충분히 풍기고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 미완의 마지막 소설

현실주의자를 신앙으로 이끄는 것은 기적이 아니다. 진정한 현실주의자이면서 아무런 종교도 믿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기적을 믿지 않는 힘과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기적이 자기 눈앞에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나타나게 되면 현실주의자는 그것을 인정하기보다 자신의 눈을 의심하려 든다. 또 설사 그 사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는 그것을 자기가 아직까지 모르고 있던 자연계의 한 현상일 뿐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현실주의자에게는 기적이 신앙을 낳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기적을 낳는 것이다. 현실주의자가 일단 신앙을 갖게 되면, 바로 그 현실주의 때문에 눈앞의 기적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일찍이 사도 도마는 제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겠다고 했으나, 실제로 예수의 모습을 보고 나서는 감격하여 ‘오오, 주여, 오오 하느님!’하고 부르짖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를 믿게 한 것은 과연 기적이었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그는 스스로가 원했기 때문에 믿음을 갖게 된 것이 틀림없다. 아마도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 말했을 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부활을 믿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분명한 자기만의 색깔을 가지고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쾌락만을 탐닉하는 방탕한 아버지(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와 그가 살해당한 사건을 중심으로 퇴역장교이자 맞아들로, 아버지와 유산과 여자 문제로 갈등이 깊었던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미챠), 표도르의 둘째 아들인 이반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바냐)는 기독교에 회의주의적인 인물로 죄와 벌에서의 스메르자코프를 연상시킵니다. 무엇보다 이 인물은 소설 속 하이라이트 "대심문관 이야기"를 전해주는 이 소설의 핵심을 꿰뚫는 중요한 인물로 등장합니다.

 

마지막으로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알료샤)는 표도르의 막내아들로 죄와 벌에서의 소냐와 같은 기독교적인 선과 구원을 상징하는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부자간에 금전, 여자 문제로 막장 드라마를 찍고 있는 구성원들 가운데 가장 정상적으로 보이는 인물로 이 소설은 이 알로샤라는인물을 중심으로 전체의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실천적인 사랑을 쌓음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웃에게 실천적인 사랑을 베풀도록 끊임없이 노력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사랑의 노력이 열매를 맺음에 따라 신이 실재하는 것도, 영혼이 불멸하리라는 것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사람들을 사랑함에 있어 자신을 완전히 희생할 수 있게 되면 그때야말로 확고부동한 믿음을 지니게 되어 그 어떠한 의혹에도 사로잡히지 않게 되지요. 이것은 경험이 증명하는 사실입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을 발명할 필요가 있다

볼테르가 했던 유명한 구절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연치 않게 이 소설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한스 라트의 21세기 소설 "그리고 신은 내게 얘기나 하자고 말했다"라는 소설에서도 언급되며 이 소설의 영향력이 21세기 소설에 까지 전달되었음을 암시하는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말이다, 18세기에 어떤 죄 많은 한 노인이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일부러라도 만들어내야 한다’
(s’il n’existait pas Dieu, il faudrait l’inventer.)
라고 말한 적이 있어. 그래서 정말 인간은 신이라는 걸 만들어 냈지.
너는 이 비밀을 알고 있었니? 무서운 것은 아름다움이란 단순히 무서울 뿐만 아니라 신비롭기까지 하다는 사실이야. 아름다움 속에서는 악마와 신이 서로 싸우고 있고, 그 싸움터가 바로 인간의 마음속이지.

 

그 자체로 완벽한 소설 속 소설 "대심문관 이야기"

악마가 세 가지 물음으로 당신에게 고했던 그 말, 당신이 거부한 것, 즉 성경에서 ‘유혹’이라 불리는 그 물음보다 더 진실한 말이 과연 있을 수 있겠소?
이 세 가지 물음에는 인간의 그 뒤 모든 역사가 하나로 통합되어 예언되어 있을 뿐 아니라 지구 전체에 미치는 인간 본질의 해결할 수 없는 역사적 모순을 모조리 집약한 세 가지 이미지가 나타나 있기 때문이오

 

이 소설의 살인적인 분량이 조금 부담스럽다면 소설 속 소설로 등장하는 "대심문관 이야기"만이라도 꼭 읽어보시기를 강하게 추천드립니다. 이 이야기는 '이단 심문이 한창이던 15세기 에스파냐 세비야에 예수가 재림한다면?'이라는 가정 가운데 펼쳐지며, 대심문관은 죽은 소녀를 다시 살리다 감금된 예수와 나누는 대화로 진행됩니다. 대심문관은 예수에게 광야에서 기적, 신비, 권위를 요구하는 악마의 유혹을 모두 거부하고 신앙의 자유를 선택하였지만, 자유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일 뿐이며 오히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기적, 신비, 권위가 있어야만 믿음을 가질 수 있으며 자유보다는 빵을 원한다고 주장하며 이에 예수는 빵보다 자유를 선택함으로써 빵에 대한 욕구로부터 탈피하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믿음과 질서를 가질 기회를 박탈하였다며 예수에게 토로합니다. 이에 반해 자신들(가톨릭 교회)은 예수를 유혹한 악마와 손을 잡고 지상에서 기적, 신비, 권위를 제공함으로써 자유를 감당할 능력이 없는 다수를 위한 빵을 제공하게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이 이야기의 끝에 대심문관은 겨우 종교와 신앙의 질서를 만들어낸 이제 와서야 예수가 재림하여 질서를 흐뜨러트린다면 지상은 지옥이 될 것이라며 예수를 풀어주며 다시는 나타나지 말 것을 요청합니다.

 

당신의 생각으로는 만약에 그 순종이 빵으로 살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거기 자유가 존재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소. 당신은 ‘사람은 빵만으론 살 수 없다’라고 반박했지만, 다름 아닌 그 빵을 위해 이 지상의 악마는 당신에게 반기를 들고 당신에게 도전하여 마침내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며, 모든 사람들은 ‘이 짐승을 닮은 자야말로 하늘에서 불을 훔쳐다가 우리에게 준 자다’라고 환호하면서 그 악마의 뒤를 따라가리라는 걸 당신은 알고 있소?

 

복음서에는 분명 예수가 다시 이 세상에 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의 시대와 우리의 신앙은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인에게 예수라는 존재가 필요하긴 한가?라는 일침을 던지는 의미심장한 이야기입니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 마태복음 4장 5-7절(개역개정)

 

대심문관은 예수가 당한 두 번째 시험에 대해 신앙에 있어 인간이 기적에 의지하지 않도록 모범을 보였지만 기적을 부정할 때 신까지 함께 부정하는 존재가 인간임을 강조했습니다. 인간은 신보다 오히려 기적을 바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인간이란 기적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당신은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걸 믿겠다’고 희롱하며 소리쳤을 때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소. 이것 역시 기적에 의해 인간을 노예로 삼기를 바라지 않고 기적에 의하지 않은 자유로운 신앙을 갈망했기 때문이었소.

 

예수가 겪었던 마지막 시험에 대해서 대심문관은 왜 그때 그 마지막 선물을 거부하여 우리가 이 고생을 하게 하느냐고 비난합니다. 거부할 수 없는 권위를 예수가 세웠더라면 우리가 양심과 자유의지의 명령과 선택지에 시달리지 않았겠느냐며 예수의 세 번째 시험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역설적으로 역설합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그때 이미 황제의 검을 손에 잡을 수 있었는데 어째서 그 마지막 선물을 거부했소? 그때 그 위대한 악마의 제3의 권고를 받아들였던들 당신은 지상의 인류가 구하고 있는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었을 거요. 아니오? 다시 말해 인류는 누구를 경배하고 누구에게 양심을 맡길 것인가, 그리고 모든 인간이 하나의 공동 개미집 같이 세계적으로 통합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었을 거란 말이오. 세계적 통합의 요구야말로 인류의 제3의 고민거리이며, 마지막 고민거리이기 때문이오.

 

알로샤를 통해 바라보는 인간의 소망

“만일 우리의 소망이 한갓 공상에 불과한 것이라면, 당신들이 그리스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기 두뇌로만 이룩하려는 건물은 언제나 낙성될 수 있지요? 언제 그 공평한 사회는 실현됩니까?”
사람은 그 구원자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구원을 받게 마련이다. 인류는 예언자를 배척하고 박해하지만, 한편으로는 자기들이 괴롭힌 순교자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수도원에서 속세로 나와 그의 주변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알로샤는 자신이 수도원에서 배운 신념과 가치관을 조금씩 완성해 갑니다. 알로샤를 통해 저자는 예수가 세상에 오셔서 처음 그 사역을 시작한 장소가 슬픔이 아닌 기쁨의 자리였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두려워할 것은 없느니라. 우리에겐 저분의 그 위대함이, 그 숭고함이 무섭게 보일지 모르지만, 저분은 한량없이 자비로우신 분이시다. 지금도 저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에서 우리와 함께 즐기고 계시는 거란다. 그리고 손님들의 즐거움이 끊어지지 않도록 저렇게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여 새 손님을 기다리고 계시지 않니. 저분은 영원히 쉬지 않고 새 손님을 잔치에 부르고 계시지. 저걸 봐라, 또 새 포도주를 날라오고 있구나. 저기 새 그릇을 가져오고 있는 것이 보이지?”
즉 위대한 영혼을 가진 예수의 어머니는, 예수께서 오로지 위대한 사업을 하기 위해서만 이 땅에 오신 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 자기네들의 보잘것없는 혼인 잔치에 기꺼이 예수를 초대한 무지하긴 하나 교활함을 모르는 사람들의 소박하고 단순한 즐거움을 예수께서도 같이 즐기실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
갈릴리의 가나에서 일어난 첫 번째 기적……
아아, 그 기적, 얼마나 고마운 기적인가! 그리스도께서 찾아간 것은 인간의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었다.

 

이 소설이 마음에 들었다면

도스토예프스키 생애의 마지막 소설인 이 소설은 사실 3부작으로 기획이 되었다고 하는데(정작 한부가 1500페이지가 넘는 엄청난 분량) 막상 저자는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타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중간에 끊겼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고 자체만으로 완성된 작품성을 보여주는 것을 보면, 또한 소설 속 대심문관 이야기와 소설 전체가 아우르는 주제가 전혀 이질감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면 과연 거장은 거장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합니다.

 

워낙 후대 수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준 작품이니 만큼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읽고 난 뒤에 함께 읽기 좋은 책들은 정말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제가 추천드리는 독서 흐름은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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