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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인문학

12가지 인생의 법칙, 조던 피터슨 : 7. 쉬운 길이 아니라 의미 있는 길을 선택하라

by Caferoman 2021. 8. 26.

독서노트

쉬운 길이 아니라 의미 있는 길을 선택하라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 강당 뒷벽에는 "직업 선택의 십계"라는 다소 괴상한 직업선택의 지침이 있었는데요, 그중에 특히 눈에 띄는 구절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직업선택의 십계
하나,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둘,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셋, 승진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넷,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다섯,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여섯,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일곱,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여덟,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아홉,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이 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열,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어쩌면 이 챕터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 있는 길을 가라라는 의미와 일맥 상통하는 교훈이 아닐까 싶어 리뷰에 앞서 고등학교 시절 지긋지긋하게 봤던 구절을 가져와 봤습니다.

 

희생과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두 종류의 근본적이고 원형적인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해야 한다. 두 의문은 모두 노동의 궁극적인 의미와 관계가 있다.
지금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가? 그리고 나중에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성서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대심문관'에서 언급된 예수의 시험

일곱번째 인생의 법칙을 논하면서 저자는 성경의 복음서에서 기술된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걸작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쳅터중 하나인 "대심문관"이야기에서 언급한 예수가 사탄에게서 받은 세가지 시험에 관련된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리고 그 시험은 ‘예수는 인간의 타락에 대한 책임을 개인적으로 떠안기로 결심한 존재’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예수는 인간 본성의 약점을 파고드는 그 유혹(시험) 즉, 자신의 내면과 세상에 존재하는 악에 대하여 두려움 없이 맞서는 존재였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첫 번째 유혹

사탄의 첫 번째 제안은 40일 동안 굶주린 그리스도에게 돌을 빵으로 바꿔 허기를 달래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사탄의 첫 번째 유혹에 이렇게 응답한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성경(복음서)에서는 빵과 삶에 대한 여러 사건이 나오는데요, 사건마다 예수는 생명을 지켜 주는 음식을 끝없이 제공해 주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결혼잔치에 술이 떨이진 곳에서는 물이 포도주가 되고, 굶주린 수천명의 군중들 가운데서는 적은 양의 빵과 물고기로 배불리 먹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저자는 이러한 기적이 '고결한 의미를 추구하는 삶이 가장 실리적인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예수처럼 살면 나와 주변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을 것이라는 문학적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즉 '올바른 삶이 빵이나 돈보다 낫다'라는 메시지를 예수는 첫 번째 유혹을 이김으로 나타내었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 유혹

첫 번째 유혹에 실패하자 사탄은 그리스도를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 그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마태복음> 4장 6절)라고 말했다.

 

신의 아들이라는 존재가 우리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악의 손아귀에서 구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삶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무조건 지켜 주는 구조대원도 아니고, 경솔하게 요망한 마법을 부리는 마법사도 아니다. 하나님은 모습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유일한 아들의 간절한 절규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을 저자는 강조합니다.

 

이 때에 예수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하나님에게 자신을 위해 개입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즉 인간으로서의 삶의 과정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초월적인 존재(하나님)를 입증해 보이라고 요구하지도, 그 존재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도, 육체의 나약함을 해결해 달라고 간청하지도 않은 것은 그러한 편법이 인간이 가진 본질적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세 번째 유혹

사탄은 그리스도에게 세상의 모든 나라를 눈앞에 펼쳐 보이며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와 인간을 지배할 기회를 주겠다고 말한다. 가장 높은 자리와 가장 강력한 권력을 약속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장 좋은 땅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을 원한다. 그런 힘이 있으면 욕망을 무제한으로 채울 수 있고 모두에게 존중받을 수 있다. 모든 것을 가진 편안한 자리를 마다할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

 

세 번째 유혹에 담긴 의미는 삶은 원래 비극이며 최고의 보상을 받으려면 즉각적인 만족과 본능적인 욕망을 거부해야 하며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또한 악을 이기려면 특별한 희생이 필요하며 기독교는 오랫동안 그 특별한 희생을 설명하고 전하는 데 공을 들였으나 원하는 효과를 얻지 못했다는 점을 언급하며 역설적이지만 "삶의 비극을 극복하는 데는 최고의 선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 책에서 언급한 예수가 받아들인 시험과 그의 삶을 통해 드러난 "의미 있는 삶"은 어쩌면 모두 가지 않으려 했던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좁은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도스토예프스키 또한 이 예수가 받은 세가지 시험을 별도의 쳅터로 무게있게 다룬 것 역시, 인류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하는 태도에 있어 이 이야기가 많은 것을 함의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요?

 

예수가 가르친대로 살지 못하는 기독교인의 문제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기독교인은 예수가 명령한 행위를 한 번도 실천한 적이 없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라는 뻔뻔스러운 주장이 나온 이유는, 예수가 요구한 행위를 널리 천명할 용기와 의지가 교회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세계를 구원했고, 구원은 현세가 아닌 내세를 위한 것이며, 구원은 노력과 노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는 세 개의 결과로 이어졌다. 이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강화된다. 첫째, 내세를 중요시하고, 세속적인 삶의 의미는 과소평가했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고통을 해결해야 할 책임을 회피해도 괜찮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둘째, 구원은 이 땅에서 땀 흘리고 노력한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라서 현재 상태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마르크스가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 비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셋째, 하나님의 아들이 중요한 일을 이미 모두 끝냈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다른 도덕적인 의무를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

 

성서로 전해지는 예수의 메시지 만으로는 이 시대를 대하는 마침표가 되지 못함을 니체나 마르크스는 비판합니다.
고통으로 깨어진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하는 것에 앞장서야 함에도 그러지 못한 당시대의 교회는 그 역할과 방향면에서 큰 한계를 보였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쳅터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삶의 비극을 극복하기 위해서 올바른 삶을 살아내기 위한 편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편법은 과거 예수조차 선택하지 않았다. 최고의 선을 목표로 삼고 오직 그것을 향해 담담하게 걸어가라

"쉬운 길이 아니라 의미 있는 길을 선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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