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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인문학

12가지 인생의 법칙, 조던 피터슨 : 5.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싶다면 처벌을 망설이거나 피하지 말라.

by Caferoman 2021. 8. 22.

독서노트

예비 아빠로서 읽었던 교양독서 중 하나

작년 12월 초, 저는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이사/물품구매 등 여러가지 일들을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아빠"라는 역할은 처음 겪게 되는지라 자연스럽게 관련한 공부가 필요하겠다 싶어서 이런저런 책들을 읽었는데요,
아들러의 책들과 함께 읽으면서 눈에 들어왔던 구절이 조던 피터슨의 12가지 인생의 법칙 중 5번째 쳅터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싶다면 처벌을 망설이거나 피하지 말라" 였습니다. 소주제 제목부터 꼰대의 향기가 물씬 올라오는군요.

 

지나친 혼돈은 지나친 질서를 낳는다.

부부가 세 살배기 아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진땀을 흘리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부모는 아이를 전혀 말리지 않았다. 그러다 아이가 위험한 짓을 하려 들자 아이를 안고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이가 마음대로 행동하는 걸 내버려 두다가 갑자기 모든 자유를 빼앗아 버린 것이다. 부모가 ‘안 돼!’의 뜻을 제대로 알려 주지 않아서 그 아이에게는 ‘합리적인 한계’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아이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알아야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지나친 혼돈은 지나친 질서를 낳는다’라는 격언의 전형적인 사례다(물론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이 쳅터는 작가의 공공장소에서 소란을 피우는 어린 아이를 바라보는 경험을 기술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기 아이의 잘못된 행동과 표현을 방임하는 것은 이후 외부 사회가 그 아이를 더욱 가혹하고 냉정하게 훈계하도록 책임을 유보하는 것이다'라는 무서운 결론에 도달합니다.

 

요즘 부모들은 대체로 아이를 꾸짖거나 체벌하면 아이와 멀어질까 봐 두려워한다. 요즘 부모들은 자녀들과 친구가 되기를 바란다. 자녀와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자녀의 존경 따위는 기꺼이 포기한다. 그런데 과연 바람직한 생각일까? 자녀는 살면서 많은 친구를 사귄다. 하지만 부모는 평생 엄마와 아빠 둘뿐이다. 부모는 친구를 넘어서는 존재다. 자녀의 친구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다. 친구의 권위는 잘못을 교정하는 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부모라면 자녀가 순간적으로 쏟아 낸 분노와 증오를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린아이는 장기적인 영향을 이해하고 인지하는 능력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질책을 받으면, 즉 교정 조치가 취해지면 즉각적으로 분노하는 경향이 있다. 부모는 사회와 자녀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자녀가 다른 사람들과 의미 있고 생산적으로 교류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순수한 아이’라는 허상

‘모든 사람은 알든 모르든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 철학자의 추종자’라는 말이 있다. 어린아이의 영혼은 본질적으로 순수하지만 문화와 사회 때문에 더럽혀졌다는 믿음은 18세기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의 영향이 크다. 루소는 사회와 사유권이 인간에게 해악을 끼쳤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는 문명화하기 전의 인간은 온화하고 경이로운 존재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아버지로서는 무능한 사람이라며 다섯 자녀를 고아원에 보내 버렸다. 루소가 말하는 ‘고결한 야만인’은 이상적인 존재였다. 피와 살을 지닌 현실적 존재가 아니라, 불순함을 제거한 원형적이고 종교적인 존재였다. ‘신성한 아이’ 역시 영원히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이와 함께 저자는 아이는 온전히 사회성과 규범을 익히기 전까지 선한존재가 아니다 라는 성악설에 가까운 인간관을 지지하면서 훈육은 아이가 올바르게 자라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임을 주장합니다.

 

자녀 훈육은 책임이 따르는 행위다. 훈육은 잘못된 행위에 대한 분노가 아니고, 그릇된 행위에 대한 복수가 아니다. 공감과 장기적 판단을 세심하게 결합한 행위다. 적절한 훈육을 하려면 큰 노력이 필요하다. 자녀에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기는 쉽지 않다.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올바른지, 또 왜 그렇게 구분해야 하는지를 알아내기도 어렵다. 공정하고 올바른 훈육 전략을 세우기도 어렵고, 자녀 양육과 관련된 모든 사람과 그 전략을 공유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자녀를 틀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환영받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견해가 퍼지면 아이들의 사회화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게 되고, 오히려 훈육이 아이들에게 해롭다고 합리화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아이를 파괴하는 자기기만 행위이므로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된다. 잘못된 합리화는 이뿐만이 아니다.

습관적으로 엄마 얼굴을 때리는 아기가 있다고 해 보자. 왜 그런 짓을 할까? 답은 분명하다. 엄마를 지배하기 위해서다. 나쁜 짓이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아이가 폭력적인 게 걱정되는가? 폭력은 당연한 것이다. 폭력은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평화다. 평화는 배우고 익히고 노력해서 얻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쯤 되니 벌써부터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내 한 몸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제가 한 아이의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되네요.

 

통계를 보면 세 살짜리 아이들이 인간 종족 중에서는 가장 폭력적이다. 세 살배기 아이들은 발로 차고 주먹을 휘두르고 이로 깨문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기도 한다. 그것은 새로운 영역을 탐험하고, 분노와 좌절을 표현하며, 충동적인 욕망을 해소하는 행동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허용되는 행동의 한계를 알아내려는 것이다. 그것 외에 어떤 방법으로 행동의 허용 범위를 알아낼 수 있겠는가. 세 살배기 유아는 어두컴컴한 낯선 곳을 탐색하는 사람처럼 경계를 찾아내려고 무작정 앞으로 덤벼들어 이런저런 실험을 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곳에 실제로 경계가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잘못된 행동을 지속적으로 교정해 주면 어린아이는 허용되는 공격의 한계를 알게 된다. 교정 조치가 없으면 호기심이 커져서 공격적인 모습을 자주 드러낸다. 상대를 때리고 물어뜯고 발로 차는 행위가 습관이 된다. 한계라는 신호가 분명하게 주어질 때까지 그런 행동은 계속된다. ‘내가 엄마를 얼마나 세게 때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엄마가 나무랄 때까지 때린다. 교정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교정은 다른 사람을 때리는 행위가 그다지 효과적인 사회적 전략이 아니라는 걸 깨우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아이들은 스스로 충동을 억제하고 조절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잘못된 행동을 교정해 줘야 충동을 억제하는 법을 배운다. 그래야 여러 충동이 서로 부딪치는 일 없이 아이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사회에 나가서도 다른 사람들과 충돌을 피하고 공존하는 법을 깨닫게 된다.

 

피터슨이 제안하는 훈육의 원칙

첫째, 중요한 최소한의 규칙만 남겨라.
둘째, 그 규칙을 적용할 때 최소한의 힘만 사용하라.
셋째, 부모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
넷째, 네 번째 원칙은 심리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부모는 자신들도 냉정하고 교만하고 원망하고 분노하고 기만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책을 읽고 결심하게 된 것은 아이와의 관계가 틀어질 것을 두려워 하여 훈육이라는 불편함을 타인(외부 사회)에게 유기해서는 안된다라는 결심입니다. 그 것이 불편하고 부담되는 일이라면 외부 타인에게 이를 떠넘기기보다는 더 친밀하고 가까운 부모가 기꺼이 감내해야 하는 일이라는 점을 말이죠.

 

훈육 책임을 등한시하는 부모는 올바른 양육에 필요한 갈등을 피하고 싶어 한다. 잠깐 악당이 되기 싫어서 자녀를 영원한 고통의 구덩이로 밀어 넣는다. 사회는 어떤 엄한 부모보다 비판적이고 매정하다. 어떤 매정한 부모보다 훨씬 더 아프게 때리고 가혹하게 처벌한다. 당신 자녀의 훈육은 당신이 맡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책임을 냉혹하고 무정한 세상에 떠넘기는 것이다. 사랑을 핑계로 훈육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비겁한 직무 유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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