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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철학종교

직장인을 위한 브런치같은 철학책 : 최고의 선택, 김형철

by Caferoman 2023. 10. 13.

일상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직장인에게 브런치처럼 친근하게 사색의 여유를 제공하는 책 : 최고의 선택, 김형철

직장인에게 브런치 같은 사색의 여유를 제공하는 캐주얼한 철학책

어중간한 철학은 현실을 저버리지만 완전한 철학은 현실로 인도한다. _카를 야스퍼스

 

철학이라는 카테고리 자체가 어렵지 않게 쓰여진 다는 것은 그러면서 단순히 여러 사상가들의 철학을 훑고 가는 개론서에서 지루함을 피해가면서 어느 정도 그 깊이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실제로 개론서 형식의 다양한 철학책들을 호기심에 펼쳐 보지만 끝내 완독하지 못하는 책들이 부지기수였거든요. 그런 면에서 우연히 알게 된 이 책은 직장인에게 있어, 더 세부적으로는 직장의 리더라는 자리에서 접하게 되는 고민과 딜레마를 어떻게 철학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서 여러 사상가의 사상들을 실용적인 측면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수십년 전 직장인의 생존전략을 그려낸 TV 시리즈 "손자병법"과 마찬가지로 현대 직장인 독자를 대상으로 재구현된 손자병법이라고 할까요?

 

“이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 변한다는 사실만이 변하지 않을 뿐이다.” - 헤라클레이토스,그리스 철학자

 

인센티브 배분의 문제 : 롤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롤스가 주장하는 공리주의는 2가지 정의의 원칙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제 1원칙 : 모든 개인은 다른 사람의 자유와 충돌하지 않는 범위에서 최대한의 기본적 자유에 대해 평등한 권리를 지녀야 한다.

제 2원칙 :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한의 배려가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롤스의 공리주의를 바탕으로 각기 다른 구성원에게 성과에 따른 인센티브를 배분하려고 하는 경우 이를 어떻게 적용해야할까요? 이 책에서는 실제 철학자들의 사상을 가까운 직장의 사례를 들어 살펴보고 있습니다.

A, B, C 세 회사가 있습니다. 각 회사에는 직원이 세 명 있습니다. A사는 총 90의 인센티브를 30, 30, 30으로 똑같이 나눕니다. 그런데 B사는 총 150의 인센티브를 40, 50, 60으로 나눕니다. 50, 50, 50으로 똑같이 나누지 않았으니 숫자만 놓고 보면 불평등해 보이지요? 하지만 롤스는 B사의 경우가 A사의 경우보다 더 정의로운 분배라고 주장합니다. B사의 최소 수혜자 몫인 40이 A사의 30보다 많기 때문입니다. C사는 B사보다 10이 더 많은 총 160의 인센티브를 25, 35, 100으로 나눕니다. 롤스는 C사가 A사보다 정의롭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최소 수혜자의 몫인 25가 A사의 30보다 적기 때문입니다. 롤스는 왜 이 같은 논리를 내세울까요? 그는 최소 수혜자가 감내할 수 없을 만큼 고통을 겪는 조직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소 수혜자에 대해 최대한 배려하자’는 논리를 편 겁니다. ‘완전 평등’(A사),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C사)과는 확실히 다른 개념이지요.
- 책의 본문 중

 

오캄의 면도칼 : 조직에 불필요한 허례허식, 군살은 무엇일까?

한 설문 조사에서 회사원들에게 “언제 사표를 내고 싶은가?” 하고 물었습니다.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을 때? 야근을 너무 많이 할 때? 아닙니다. 뜻밖에도 “상사가 자신을 불신한다고 느낄 때.”라는 답이 가장 많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언제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가?”라고 물으니 “상사가 일하는 데 사사건건 간섭할 때.”라고 답했습니다.
- 책의 본문 중

 

현명한 리더는 오캄의 면도칼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의사소통 과정에서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과감히 삭제 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교장선생님의 기나긴 훈화 말씀이나 보고를 위한 보고를 위한 보고장표에 시간을 낭비하는 직장의 사례들이 그 대상이 될 수 있겠지요. 핵심만 간단히 하는 것 이것만 리더가 잘 지켜줘도 업무 효율은 크게 오릅니다.

또한 그 대상은 불필요한 절차일 수 있고, 매뉴얼일 수 있고, 업무 양식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하나의 팀일 수도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건 사람이 아닌 ‘자리’를 쳐내야 한다는 겁니다. 오캄의 면도날은 꼭 필요한 경우에 한해 신중하게 휘둘러야 하는 칼입니다. 늘 해오던 거니까, 이걸 해야 왠지 있어 보이니까, 그런 이유로 붙들고 있는 ‘군더더기’가 있지 않나요? 당신은, 그리고 당신의 조직은 그것을 놓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동굴에 갇힌 리더 : 플라톤

동굴에 죄수들이 갇혀 있습니다. 이들은 한 번도 바깥세상에 나가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동굴 벽만을 보게끔 묶여 있고, 등 뒤에는 횃불이 타오릅니다. 이들은 동굴 벽에 어른거리는 자신의 그림자만을 보며, 그것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믿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한 죄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동굴 밖으로 나가면 새로운 세상이 있을지도 몰라.” 어렵게 밖으로 나간 죄수는 눈부신 태양을 바라본 순간 눈이 멀 뻔합니다. 오랫동안 어둠에만 익숙했던 눈에 태양은 너무 밝습니다. 죄수는 동료들에게 영원히 타오르는 태양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동굴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밝은 세상에서 어두운 동굴로 들어서자, 다시 어둠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죄수는 앞이 보이지 않아 비틀거립니다. “태양이라고? 앞도 제대로 못 보고 비틀거리는 주제에. 너나 잘하세요!” 여러분이 태양을 본 죄수라면 어떻게 동료 죄수들을 설득하겠습니까? 플라톤은 말합니다. 인간이 지상에서 감각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동굴 벽에 어른거리는 불완전한 그림자일 뿐이라고요. 그리고 인간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으로서의 이데아야말로 영원한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유명한 ‘동굴의 비유’입니다. 너무 눈이 부셔 자신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태양의 존재를 어떻게 태양의 존재를 경험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설득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은 조직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이끌어 가야하는 리더가 맞닥뜨린 문제이기도 합니다. 동굴의 삶에 안주하는 다른 이들과 달리 리더라면 플라톤의 죄수처럼 동굴을 박차고 나가 눈이 멀 것 같은 태양을 마주해야 하며 그것이 리더와 리더가 아닌 사람을 구분하는 핵심이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습니다.

 

홉스 기업 혁신의 딜레마 : 불에 타 소실된 뒤 복원된 숭례문은 역사적으로 동일한 문화재인가?

옛날 옛적에 테세우스라는 배 한 척이 있었습니다.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진 테세우스호는 오랫동안 전장을 누비며 혁혁한 공을 세웁니다. 사람들은 테세우스호가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여기고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광장에 전시를 합니다. 그런데 세월의 풍파에 깎이고 닳아 더 이상 배의 무게를 지탱하고 모양을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사람들은 같은 종류의 목재로 배의 부분부분을 수리합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수리가 이뤄진 것이지요. 어느 날, 사람들은 그 배를 구성하는 목재가 처음 진수된 목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자 철학자들이 질문을 던집니다. “이 배는 역사적인 그 배와 동일한 배입니까?” 이 주제에 대해 많은 논의가 벌어집니다. 그렇지만 어느 입장이 참인지 결정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 이런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근대의 태동을 알린 시대의 천재, 토머스 홉스입니다.

2008년 숭례문(남대문)은 방화사건으로 불에 타 절반 이상이 불타 사라졌습니다. 이를 다시 복원하기 위해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는데요, 600여년 전에 건축된 이 문화재는 사실 그 당시 사용했던 목재와 기타 재료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새로운 재료로 복원이 되었는데요, 우리는 이 숭례문을 600년 전 본래의 건축물과 동일한 존재로 볼 수 있을까요?

앞예서 예시를 든 홉스에 따르면는 그 배를 그 배이게 하는 것은 배의 형상이며 그 정체성의 핵심은 그 배의 기능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 형상에 존재론적 단절이 없다면 동일한 대상이라고 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옛 재료가 남아 있지 않은 숭례문 또한 그 형상과 기능으로서 문화재의 명맥을 잇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헤겔의 정반합 : 주인은 노예의 노예이고, 노예는 주인의 주인이다.

주인을 주인으로 만드는 것은 노예입니다. 주인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스스로 아무리 주인이라고 주장해도 주인이 되지 않습니다. 한편 주인은 노예에게서 인정받고 난 후에는 전적으로 노예에게 의존하기 시작합니다. 노예가 제공하는 서비스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주인은 반대로 노예의 노예가 되는 셈이지요.

 

정반합으로 널리 알려진 헤겔의 변증법은 정(these)이 있으면 이에 대립하는 반(anti-these)이 생기며 이 둘 간의 긴장과 대치사이에서 합(synthese)으로 승화(aufheben)하는 명제가 탄생한다는 개념입니다.여기서 합은 곧 다시 정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이 과정이 반복되게 되면 자료구조론에서 볼 수 있는 이진트리(Binary Tree) 모양의 구조가 무한히 만들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헤겔이 말하는 변증법의 핵심은 1. 우리의 역사는 이러한 변증법의 법칙에 따라 진보하며, 2.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마지막으로 3. 소통에서는 작용이 있으면 반드시 반작용이 있다는 점인데요, 이는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반대측 의견과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소통을 단절한다면 더이상 진보할 수 없음을 시사합니다. 즉 순탄하지 않더라도 반대측과 소통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야 정치도 역사도 진보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사르트르 : 의자에는 없고,인간에게는 있는 것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무슨 말일까요? 의자는 자기 자신을 의식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또한 의자는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일정한 목적을 갖고 만들어졌습니다. 그에 비해 인간은 어떤가요. 목적이 없으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지녔습니다. 즉,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 겁니다.

즉자적(即自的) 존재 : 의식이 없는 객체, 의식이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없고, 삶의 환경에 대해 자유를 행사할 수 없는 존재, 무생물이 그 예.

대자적(對自的) 존재 : 자기 자신을 대할 수 있는 의식을 가진 객체. 인간은 본래 대자적 존재이나, 타인에게 관찰 대상이 되면 즉자적 존재로 전락함.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는 없다.” 라는 말로 유명한 헤라클레이토스는 세상에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 뿐이라고 말합니다. 즉, 변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유일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데카르트 역시 세상에 절대 의심할 수 없는 사실 한가지는 바로 "내가 현재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말하며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언을 남깁니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자신을 의심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하였는데요, 그는 건설적인 비판을 위해 다음 네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어떤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마라.

둘째,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쪼개라.

셋째, 단순한 문제에서 시작해 복잡한 문제로 옮겨가라.

넷째, 빠뜨린 것이 없는지 전체적으로 다시 점검하라.

 

신이 존재를 두고 내기를 한 도박사 : 파스칼, 팡세

“인간은 수증기 한 방울로도 죽을 수 있을 만큼 갈대처럼 연약하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 파스칼

 

세상 모든 것에 내기를 거는 도박사가 있습니다. 그는 신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를 두고 내기를 합니다. 도박사는 무턱대고 자신의 감에 따라 배팅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변수와 경우의 수를 생각해서 가장 이득이 되는 선택을 하는 것이 도박사입니다. 그래서 도박사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경우의 득실을 따져봅니다.

첫째, 신이 실제로 존재하는데 내가 신을 믿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는 대박이 터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천당 들어가는 표는 예약된 것이지요. 물론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야 하는 비용이 발생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영원한 행복이 보장된 천당에 들어가는 비용이니 기꺼이 지불할 마음이 있습니다.

둘째, 신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데 내가 믿는 경우입니다. 이 상황에는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겠지요. 아니, 죽었으니 무엇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그야말로 완전 꽝입니다. 살아생전에 교회에 가느라 친구들과 주말에 놀지 못한 게 억울해집니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면서 좋은 사람들과 만나고 깨달음도 얻었으니 손해라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통틀어 계산해보면 그저 그런 상태겠지요.

셋째, 신이 실제로 존재하는데 내가 믿지 않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결과를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영원한 지옥불에 떨어질 테니까요. 신을 믿지 않은 불경죄는 그 무엇으로도 사면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신을 믿지 않을 때 느끼게 되는 무한한 두려움의 진원은 바로 이 경우 때문입니다.

넷째, 신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데 믿지 않는 경우입니다.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으니, 아무것도 없는 셈이지요. 고통받을 지옥도, 즐거움을 누릴 천당도 없습니다.
- 책의 본문 중

 

이렇게 네 가지 경우를 따져본 뒤 도박사는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신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베팅은 일단 신을 믿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파스칼의 『팡세』(Pensées, 생각)에 나오는 도박사 논증인데요, 이 책은 이 챕터에서 재미있는 질문을 하나 던집니다. "『팡세』의 도박사는 과연 천당에 갔을까?" 

 

밀 반대하기에 동의하기 : 99명의 찬성, 1명의 반대 여러분이 결정권자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영국의 저명한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위 상황에서 반대하는 목소리는 반드시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주장인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반대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과연 그 근거가 맞는지 따져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아버지인 제임스 밀에게서 고급 교육을 받습니다. 세 살부터 그리스어를, 여덟 살부터 라틴어를 배웁니다. 열 살에는 이미 플라톤을 원전으로 술술 읽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공리주의를 이어갈 천재 지식인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에 따라, 존경하는 친구인 제러미 벤담에게 교육을 맡깁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란 양적 공리주의를 창시한 제러미 벤담은 밀에게 엄청난 교육을 시키지요. 청출어람이라 할까요. 밀은 벤담에게서 공리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스승의 이론에 반대합니다. 쾌락은 양적으로만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질적인 차이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쾌락에는 고급과 저급이 있다고 구분합니다. ... 그러면 무엇이 고급이고 무엇이 저급인가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밀은 경험론을 신봉하는 영국 철학자답게 두 가지를 모두 경험한 사람에게 묻는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경험 있는 리더에게 판단을 맡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란 뜻입니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 마음을 지킨다는 것

아우렐리우스는 어릴 적부터 문학, 희극, 음악, 지리학, 문법, 수사학, 법학을 두루 공부합니다. 특히 스토아 철학에 심취합니다.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그는 고모부에게 양자로 갔다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총애를 받습니다. 어려서부터 다방면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건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배려와 지도 덕분이지요. 아우렐리우스를 아낀 황제는 그를 황제의 자리에 앉힐 계획을 세웁니다. 다음 황제로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세우면서, 피우스가 아우렐리우스를 양자로 삼게 만듭니다. 한 세대 넘어서까지 계획을 세운 것이지요.

그렇지만 정작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이 황제가 된 뒤 로마의 전통을 깨고 친아들 코모두스에게 왕위를 물려줍니다. 코모두스가 아버지만큼 현명했다면 문제가 없었겠지요. 하지만 성격이 포악하고 사려 깊지 못해 모두들 황제가 될 만한 자질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주인공 막시무스 장군(가상의 인물)을 핍박하는 폭군 황제가 바로 코모두스입니다. 코모두스가 로마의 멸망을 앞당겼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권력을 남용하고 나라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합니다. 결국 암살당하는 비극을 맞지요.
- 책의 본문 중

 

2,500년 전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의 철학자였다. 왜, 소크라테스일까? 델포이 신전 신탁에 이렇게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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