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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철학종교

마흔에 읽는 니체, 장재형

by Caferoman 2023. 1. 4.

실제로 40대 독자가 가장 많았던 책 : 마흔에 읽는 니체, 장재형

유구한 철학자들의 저서에는 항상 그들의 저서의 해설서, 또는 그 해설서의 해설서가 존재합니다.
심지어는 공자의 가르침을 제자들이 풀어 쓴 논어를 풀어 쓴 다산 정약용의 글을 풀어 쓴 저서도 존재하니까요.(<다산의 마지막 공부, 조윤재>) 다시 말해서 해설의 해설의 해설서라고 할 수 있지요.

마찬가지로 니체의 수 많은 해설서는 니체의 저서만큼이나 다양하게 존재 합니다.
그동안 읽었던 니체의 해설서는 니체의 삶을 장소와 연대기 순으로 다룬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 니체> 편과
철학과 삶의 치료제로서 니체의 철학에 주목한 <필로테라피 : 우울한 날엔 니체>,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불교와 과학이라는 계단 사이에 등장하는 차라투스트라를 언급하는 <열한 계단, 채사장>등과 같은 책들이 있었는데요,
이번 책 "책제목"은 니체의 철학과 40대라는 나이가 주는 삶의 무기력함을 조합한 컨셉으로 출간된 책으로 보입니다.

 

“모든 삶의 순간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
- 유고, 니체

 

40대라는 시기에 느껴지는 삶의 무게와 무기력감이 니체의 철학과 꽤 잘 어울리는 것 같아보이는 점에서 이 책의 기획이 꽤 괜찮아 보입니다.
각 시기별로 권장할 만한 필독서를 꼽으라면
10대의 호밀밭의 파수꾼
20대의 데미안
30대의 그리스인 조르바라면
40대의 필독서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이 책을 접하며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신은 죽었다 : 신과의 결별을 선언한 초인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이 등장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언젠가 찾아올 위대한 정오에 우리의 마지막 의지가 되기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는 인간이 가진 죄의 속성을 강조하는 당시 기독교가 인간을 병들게 만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니체는 유한한 삶 가운데 무력한 존재로 인간을 바라보는 기독교의 관점을 넘어서는 초인이 되라는 초인사상을 제안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두 개의 서판을 주변에 둔 채 자신의 때를 기다립니다. 하나는 "신은 죽었다"라고 적힌 낡고 부서진 서판이고, 다른 하나는 “삶을 극복하고 초인이 되어라”라고 적혀 있는 새롭게 반쯤 쓰인 서판이라고 우리의 삶을 비유하며, 과거와 결별하고 ‘내가 원하는 나’로 살기 위해서 낡은 서판을 파괴하고 자신의 삶으로 새로운 서판을 완성해가는 ‘창조하는 자’가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저자는 차라투스트라의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도록 하라. 그리하여 그대들 모두가 나를 부정하게 된다면 그때 내가 다시 그대들에게 돌아오리라.”를 인용하며 익숙한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경험할 때 비로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며 "내가 진짜로 원하는게 뭐야"라는 물음과 함께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하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려 하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대들은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양 고전 중에서도 손꼽히는 난해함을 보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는 “모두를 위한 그리고 아무도 위하지 않는 책”입니다. 비유와 상징이 가득한 난해한 책이다 보니 이를 풀어쓴 수많은 해설서들이 존재하는 것은 불가피해 보입니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 사상을 저자는 기독교 사상을 포함한 플라톤의 이원론을 부정할 때, 유일하게 인정할만한 것은 이 세상 뿐이며, 그 세상에서 당당히 바로서는 혹은 맞서는 자로 초인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초인이 이 대지의 뜻이 되어야 하며, 대지에 충실하고,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을 말하는 자들을 믿지 마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니체의 이미지중 하나는 바로 "바위 절벽 위에 올라 검은색 외투를 입고 오른손에 지팡이를 쥐고 서 있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묘사한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작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일텐데요, 한 남자가 홀로 저 멀리 안개로 뒤덮인 산등성이들을 내려다보는 모습에서 니체가 말한 초인의 모습을 어렴풋이 상상해 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힘에의 의지 : 삶은 힘에의 의지다

우리의 가치 평가들과 재화 목록들 자체는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 그것들의 지배에서 무엇이 산출되는가? 누구를 위하여? 무엇과 관련하여? 삶을 위하여. 그러나 삶은 무엇인가? 따라서 여기에서 “삶”의 개념에 대한 새롭고 더욱 분명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에 대한 나의 공식은 다음과 같다. 삶은 힘에의 의지다. 《유고》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의지’ 철학에 영향을 받아 그가 말한 ‘삶에의 의지’의 개념을 빌려 자신이 말하는 의지에 ‘힘에의 의지’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쇼펜하우어의 "맹목적인 의지를 부인하며 삶에 대한 비관으로 나아간 수동적 허무주의"에서 더 나아가 니체는 "더 많이 원하며, 더 강해지기를 원하는 힘에의 의지를 추구"하는 능동적 허무주의를 주장했습니다. 니체에게 있어 "힘에의 의지"는 단순히 살아남기 위한 의지가 아니라 삶과 맞서 싸우고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원동력었음을 저자는 강조하며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운명애(運命愛, Amor fati)가 니체의 중심사상임을 강조하며 마흔의 문턱에 들어선 독자들에게 자신의 운명을 돌아보고 당당히 한걸음 나아가는 것을 제안합니다.

 

“그대에게는 무엇이 매일매일의 역사인가? 그것을 구성하는 그대의 습관을 돌아보라! 그것은 무수히 많은 사소한 비겁과 나태의 산물인가, 아니면 용기와 창조적 이성의 산물인가?”
《즐거운 학문》

 

이러한 니체의 질문에 마흔을 맞이한 우리는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삶을 향한 사랑과 열정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삶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선택할 인지"

 

영원회귀(Ewige Wiederkehr des Gleichen) : 지금 이 순간은 단 한 번 뿐

영원 회귀(Ewige Wiederkehr des Gleichen)
동일한 것이 동일한 모습으로 영원히 반복해서 되돌아온다는 뜻.
《즐거운 학문》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느 날 악령이 고독에 잠겨 있는 그대의 뒤로 살며시 찾아와 “너는 이 삶을 다시 한 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라고 물었을 때,당신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다시 한 번, 그리고 셀 수 없이 몇 번이고 반복해서 살아야만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영원 회귀 사상을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되더라도 나는 이 삶을 사랑할 것인가?”라는 물음이라고 해석하며 '너는 얼마만큼 너 자신과 인생을 사랑할 수 있는가?’라고 바꿔 묻고 있습니다.

 

번아웃에 대처하는 니체의 자세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라는 구절은 "신은 죽었다"만큼이나 우리에게 유명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이 가지는 의미는 ‘제대로 잘된 인간은 죽음을 제외하고 해로운 것에 대한 치유책을 알고 있다’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급변하는 세상속에서 ‘빨리빨리’를 외치다 번아웃 증후군에 시달리는 중년에게 필요한 치유책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니체는 ‘삶을 사랑하는 능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번아웃에 빠지지 않는 방법, 혹시 빠지더라도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결국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삶을 감당하기 힘들더라도 연약한 태도를 보이지 말라고 한다. 사실 인생살이는 견뎌 내기 힘들 만큼 우리에게 가혹하기 때문에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듯이 삶에 대한 사랑에도 마찬가지이다. 삶이 아무리 불완전할지라도, 우리는 그 불완전함마저 사랑해야 한다. 그래서 니체는 “우리의 결함은 이상을 바라보게 되는 눈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삶을 사랑하는 능력을 스스로 회복하라. - 마흔에 읽는 니체, 장재형

 

니체에 따르면 돌이킬 수 없는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야말로 가상의 세계일 뿐이며 과거와 미래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질 때 지금 이 순간, 현재에 충실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현재를 잡아라’로 번역되는 라틴어"Carpe Diem"의 정신을 말하는데요, 이를 위해서는 기억보다 망각의 중요성이 대두된다고 이 책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엉덩이가 아닌 발로 글을 써야 한다

"살아 숨 쉬는 글은 책상머리에 앉아 떠오른 생각이나 관념을 끄적거린 글이 아니다. 고독에 몸부림칠 때 위로해 주는 글, 삶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하는 글,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게 달리고 싶은 삶에 대한 열정을 갖도록 하는 글. 이것이 삶의 철학자 니체가 말한 피로 쓴 글이 아닐까? 한마디로 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온몸’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다.  - 마흔에 읽는 니체, 장재형

“가장 필요한 것은 삶이므로 문체는 살아 있어야만 한다”, “나는 손으로만 쓰는 것이 아니다. 발도 항상 글 쓰는 사람과 함께하길 원한다”라는 니체의 어록을 언급하며 저자는 글을 쓰는 이는 모름지기 방구석에 앉아 탁상공론을 펼치는 수준을 벗어나 실제 삶으로 뛰쳐나와 치열하게 그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통해 글을 써야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니체의 글이 수많은 경구(아포리즘)으로 가득한데요, 이러한 특성은 1. 니체는 건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짧고 강렬한 방식의 아포리즘 문체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점, 2. “다른 사람들이 한 권의 책으로 말하는 것 또는 한 권의 책으로도 말하지 못하는 것을 열 개의 문장으로 말하는 것”을 선호한 니체의 집필 스타일, 3. 자신의 글이 한 가지로 해석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독자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해 다양하게 해석하기를 바란 니체의 의도 때문이었음을 이 책은 말하고 있습니다.

 

창조하는 자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모른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행복한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젊은 나이에도 감탄할 만큼 삶을 즉흥적으로 연출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끊임없이 대담한 일을 하지만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두 번째는 자신이 원하고 계획했던 모든 일에 실패한 사람이다. 그는 성공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여러 번의 몰락과 파멸을 경험한 사람이다. 니체는 하는 일마다 실패한 두 번째 유형의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니체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얼마 전 밀리의 서재의 2022년 독서 리포트를 읽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접하게 되었습니다.

"마흔에" 읽는 니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은 실제로 40대 독자가 가장 많았지만 그에 크게 뒤지지 않는 비율로 30대 또한 이 책을 많이 읽었다는 점인데요, 냉랭해 보이지만 사실은 따뜻한 니체의 위로가 40대에 국한되지 않고 젊은 세대 모두에게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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