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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철학종교

시대의 지성인이 남긴 참회록 : 지성에서 영성으로, 이어령

by Caferoman 2022. 8. 29.

무신론자 였던 지성 이어령이 신앙을 가지기까지 : 지성에서 영성으로, 이어령

 

과학 실험에 의하면 영혼의 무게는 1온스밖에 안 된다고 한다. 라면 한 젓가락의 무게밖에 안 되는 영혼이 있기에 무신론자들도 이따금 기도를 한다.

한 때 꽤 오랜 기간 저자의 마지막 작품인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이 책은 저자의 책들 중 가장 처음 접한 책으로, 무신론자였던 이어령 선생님이 기독교를 자신의 신앙으로 받아들이기까지 과정을 담고 있는 에세이 형식의 책입니다.

 

기독교가 한국에서 성행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물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국에서는 신을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그때의 ‘하나’는 ‘하늘天’과 유일하다는 뜻인 ‘하나’의 양의성을 가진 말이라 하면서, 샤머니즘은 범신적인 종교이고 유교는 조상신을 천의 개념으로 발전시킨 것인데 이 두 가지 다 유일신을 받아들이는 데 별로 거부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에 비해서 일본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힘들었던 이유로, 천주님인 ‘데우스 デウス’는 일본말의 다이우소(큰 거짓말)와 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들어올 때부터 거부감을 가졌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유일신과 범신의 갈등이 있었어도 한국에서는 서로 마찰 없이 공존할 수 있었음을 이야기했지만 그밖에 이념 지향적인 한국의 관념주의에 비해, 일본의 ‘모노 もの, 물건’의 감각 등은 관념보다 구체적인 피지컬한 세계로 더 발전해간 점을 들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서는 저자의 일본 거주 시절에 보고 듣고 느낀 바에 대한 감상들이 곳곳에 담겨 있는데요, 기독교라는 종교가 일본에 비해 한국에서 성행하는 이유에 대한 나름의 해석이 담긴 내용인데, 정서/문화적 배경에 의해 일본에서는 기독교가 뿌리내리기 어렵다는 엔도 슈샤쿠의 침묵에서도 읽었던 비슷한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お前だけではなくゴアや澳門にいる宣教師たち、西欧の教会のすべての司祭たちは信じてはくれまい。だが私は二十年の布教の後に日本人を知った。我々の植えた苗の根は知らぬ間に少しいずつ腐っていたことを知った。...
"日本におられる間、決してそんな考えは持たれなかった"
”あの聖者も" フェレイラはうなずいた。はじめは少しも気がつかなかった。だが聖ザビエル師が教えられたデウスという言葉も日本人たちは勝手に大日と呼ぶ信仰に変えていたのだ。陽を拝む日本人にはデウスと大日とはほとんど似た発音だった。あの錯誤にザビエルが気づいた手紙をお前は読んでいなかったのか"

자네뿐 아니라 고아나 마카오에 있는 선교사들, 서구 교회의 모든 신부들은 믿어주지 않겠지만, 나는 이십 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선교한 후에야 일본인을 알았어. 우리가 심은 묘목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뿌리가 썩고 있었다는 것을." ...
 "그 성자도 거기까지는 한 번도 생각이 미치질 못했지. 하지만 성 자비에르 신부가 가르치신 하나님이라는 말도 일본인들이 멋대로 오오히(大日)라고 부르는 신앙으로 변해 있었어. 태양을 숭배하는 일본인에게 데우스와 오오히는 거의 비슷한 발음이었던 거야. 그 착오를 비로소 깨닫게 된 내용의 편지를 자네는 읽지 않았던가?"

 

죽음에 진심인 한국 사람들

한국 사람들은 유난히 죽는다는 말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말끝마다 좋아 죽겠다고 하고 슬퍼 죽겠다고 하고 우스워 죽겠다고 합니다. 배가 고프면 배고파 죽겠다고 하고 배가 부르면 이번에는 배불러 죽겠다고 하는 사람들. 처음에는 그런 동족들이 싫고 부끄러웠지요. 하지만 죽음은 삶의 극한 언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메멘토 모리라는 것을 알았지요. ‘살기죽기’라고 하지 않고 ‘죽기살기’라고 말하는 사람들, “To be or not to be” 햄릿 대사도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라고 번역하는 사람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먼저 생각하는 한국인이야말로 메멘토 모리의 철학적 종교적 민족이 아니겠습니까.

 

한자를 봐도 죽는 것(‘사死’)과 죽이는 것(‘살殺’)을 구분하고 있고 일본어, 영어 모두 이를 구분하고 있는데 유독 한국말에는 죽다의 사역동사인 죽인다가 있을 뿐, ‘살殺’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는 지적은 꽤나 신선했습니다. 감동적인 순간, 최고의 기쁨과 만족을 느끼는 순간, ‘죽인다’ ‘죽여준다’라는 표현을 쓰며, 말끝마다 ~해 죽겠다고 말하는 한국 사람들이야 말로 저자의 표현대로 죽음을 기억하면서 살아가는 메멘토 모리의 민족이 아닐까 싶네요.

 

의문은 지성을 낳지만, 믿음은 영성을 낳습니다. 지성과 영성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간단합니다. 의심 속에서, 끝없는 의문 속에서 지성은 커집니다. 하지만 사람 집에 집을 짓고 살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 그러한 짐승들의 슬기에 대해서는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제비처럼 믿어야만 인간의 힘을 빌려 다른 짐승들의 위협에서도 보호를 받고 편안하게 살 보금자리를 얻어 새끼들을 안심하고 키웁니다. 심지어 다리가 부러져도 흥부가 와서 치료를 해주고 말이지요.

 

제비가 사람이 사는 집에 깃들어 둥지를 틀고 새끼를 키우는 데에는 우선 그 집의 인간이 나의 보금자리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시작함을 저자는 주목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 믿음이 전제되었을 때 제비는 다른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새끼를 키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릴 적 할아버지 집 대들보에 둥지를 틀고 부지런히 들락날락 거리며 새끼들에게 먹이를 가져다주는 제비를 보며 왜 그때는 제비가 구태여 사람이 사는 집에다가 둥지를 틀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지 못했는데, 역시 지성은 같은 현상을 보고도 배우고 느끼는 바가 다르구나를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인생이란 15분 늦게 들어간 영화관과 같다

로맹 롤랑 Romain Rolland은 인생이란 15분 늦게 들어간 영화관과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놓쳐버린 15분의 줄거리를 찾기 위해 신앙을 가지고 철학에 매달리는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저서인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도 보여준 삶의 태도와 마찬가지로 저자는 우리의 삶은 어떠한 모습으로 어떻게 흘러가는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아가신 듯합니다. 그 과정이 마치 조금 늦게 들어간 영화관 같아서 인생이라는 시간을 우리는 어떤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앞으로의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갈지를 고민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네요. 내 삶이라는 영화의 지난 이야기를 파악하고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를 살아내는 것이 인생이다라는 표현이 참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 나이에 뭐가 답답해서 세례 받는 거냐?” 하고 묻는 질문에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명예 달라면서 글을 썼더니 명예가 생기더라, 돈 벌려고 애쓰니까 되더라, 또 병 때문에 병원에 다니니까 나아지더라. 그런데 어느 날 너무도 외로워서 무엇을 하든 마음은 채워지지 않고, 세상에 나 혼자구나 싶었다.”
너무나 절실한 고독이 왔을 때, 절대 나는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때, 즉 영혼이 갈구할 때, 목마를 때, 수돗물이든 1 급수든 2 급수든 보통 물로는 채울 수 없는 갈증을 느낄 때 어디로 갑니까? 물론 그런 영혼의 아픔과 갈증이 교회에 간다고 해결되진 않지요. 하지만 식당에 가면 만날 맛있는 음식, 입에 맞는 음식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요. 그래도 배가 고프면 식당에 갈 수밖에요.

 

대체적으로 버라이어티하고 극단적이고 극적인 여타 회심자의 간증과는 달리 이 책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고백은 다소 덤덤해 보입니다. 하지만 삶의 허무함 가운데 신앙에서 그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해 온 어느 노선생의 진솔한 자기 고백은 영혼의 갈급함을 채우기 위해 우리가 찾아가 봐야 할 곳이 어디일까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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