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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정치사회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by Caferoman 2022. 9. 30.

절망 가운데 살아남은 희망의 기록 :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아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
-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중
Hat man sein warum? des Lebens, so verträgt man sich fast mit jedem wie?
- Friedrich Nietzsche, Twilight of the Idols (1888)

 

프로이트 그리고 빅터 프랭클

이 두 의학자는 신경 질환의 특성과 치료에 우선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고통을 주는 혼란의 원인을 서로 모순되는 무의식적 동기에서 비롯된 불안에서 찾았다. 반면에 프랭클은 신경 질환을 여러 형태로 분류한 다음, 그중에서 누제닉 노이로제와 같은 몇 가지는 환자가 자기 존재에 대한 의미와 책임을 발견하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가 성적인 욕구불만에 초점을 맞추었던 반면, 프랭클은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의 좌절에 초점을 맞추었다.

 

유한한 인간의 삶에 있어 그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과 노력은 인생의 중요한 이정표이자 삶을 살아가는 중요한 원동력이 됩니다. 2차 세계대전 시절 유대인 수용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 책은 '우스꽝스럽게 헐벗은 자기 생명 외에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죽음의 문턱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인간성을 지킬 수 있었던 힘이 '의미를 찾으려는 강한 의지'에서 온다는 것을 자신의 수용소 체험담을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담배를 필 수 있는 특권은 카포에게만 주어졌는데, 그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일정한 양의 담배를 배급받았다. 때로는 창고나 작업장 감독으로 일한 사람들이 위험한 일을 한 대가로 담배 몇 개비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 밖의 사람들은 담배를 피울 수 없었다.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살아갈 의욕을 잃었거나 아니면 남은 생의 마지막 순간을 그저 ‘즐기려는’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는 경우였다. 따라서 어느 날 동료가 담배 피우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가 자신을 지탱해 나갈 힘을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했다. 일단 그 믿음을 잃고 나면 살고자 하는 의지가 다시 생기기는 힘들었다.

 

수용소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피우던 담배의 의미가 그저 수 분간 주어지는 깊은 한숨을 넘어서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하나의 신호였다는 점은 이들의 삶이 얼마나 팍팍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수많은 이들이 죽어갔던 무시무시한 형무소의 삶은 어쩌면 육체적 살인에 앞서 삶의 의미를 잃게 만드는 실존적인 살인을 감행하는 곳이 아니었을까요?

 

마침내 내 차례가 됐다. 누군가가 내게 귓속말로 오른쪽은 작업실행이고, 왼쪽은 병자나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가는 특별 수용소행이라고 알려 주었다. 나는 일이 돌아가는 대로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앞으로 내가 통과해야 할 수많은 관문 중에서 첫 번째 관문이었다. 그날 저녁에야 우리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가진 깊은 뜻을 알게 됐다. 그것이 우리가 경험한 최초의 선별, 삶과 죽음을 가르는 첫 번째 판결이었던 것이다.

 

애써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한 작은 웃음

샤워할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들은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제 벌거벗은 몸뚱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심지어 털 한 오라기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글자 그대로 우리 자신의 벌거벗은 실존뿐이었다. 그동안의 삶과 현재를 연결시켜 주는 물건 중 과연 남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우스꽝스럽게 벌거벗겨진 몸뚱이 외에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서로를 재미있게 해 주려고 그야말로 안간힘을 썼다. 어쨌든 샤워기에서 정말로 물이 시원하게 쏟아지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기약 없이 죽음을 기다리며 형무소 생활을 해야 했던 이들의 실존을 지켜내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저자는 고증하고 있습니다. 웃어도 웃는게 아닌 상황에서 저자의 위트는 역설적으로 애잔하게 다가옵니다.

 

유머 감각을 키우고 사물을 유머러스하게 보려는 시도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기술을 배우면서 터득한 하나의 요령이다. 고통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수용소에서도 이런 삶의 기술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번 유추해 보자. 인간의 고통은 기체의 이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일정한 양의 기체를 빈 방에 들여보내면 그 방이 아무리 큰 방이라도 기체가 아주 고르게 방 전체를 완전히 채울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홀로코스트(Holocaust)

국가권력으로 범죄를 저지른 인물은 인류 역사에 숱하게 많았지만 민족 집단 하나를 완전히 말살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수백만 명을 체계적으로 학살한 사례는 히틀러와 나치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 남아 있던 피하 지방층이 사라지고, 몸이 해골에 가죽과 넝마를 씌워 놓은 것같이 됐을 때 우리는 우리 몸이 자기 자신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장 기관이 자체의 단백질을 소화시켰고, 몸에서 근육이 사라졌다. 그러자 저항력이 없어졌다. 같은 막사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어 나갔다.
수용소에서 사람 목숨이 얼마나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감정이 무뎌진 수용소 사람들도 병든 사람을 이송할 때에는 이곳에서 인간 존재가 얼마나 철저하게 무시당하는지를 느꼈을 것이다. 다 죽어 가는 병자의 몸은 바퀴 두 개 달린 수레에 던져진다. 동료 수감자가 그 수레를 끌고 대개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길을 몇 마일이나 걸어서 다른 수용소로 옮긴다. 만약 병자 중 한 명이 수레가 떠나기 전에 죽는다 해도 마찬가지로 수레에 던져진다. 리스트에 올린 번호와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번호뿐이다. 오로지 죄수 번호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그 사람이 의미 있는 것이다. 사람은 글자 그대로 번호가 됐다. 그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 ‘번호’의 생명은 철저하게 무시된다. 그 번호 이면에 있는 것, 즉 그의 삶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못 된다. 그의 운명과 그가 살아온 내력 그리고 그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수용소의 비참한 환경 속에서 그들이 끝내 살아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마음 한편에 남아있는 사랑하는 이와의 재회를 그리는 일말의 희망이었음을 저자는 전하고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그것이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라고 해도) 여전히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극단적으로 소외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주어진 고통을 올바르고 명예롭게 견디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때, 사람은 그가 간직하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됐다. ‘천사들은 한없는 영광 속에서 영원한 묵상에 잠겨 있나니.’

강제 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음을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그리고 살아남은 존재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게 되는 것이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지금 내가 겪는 고통이 의미 없는 고통이 아니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 어려운 시기를 버텨온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니체가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1944년 성탄절부터 1945년 새해에 이르기까지 일주일간 사망률이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추세로 급격히 증가했다는 것이다. 주치의는 이 기간에 사망률이 증가한 것은 보다 가혹해진 노동 조건, 식량 사정 악화, 기후 변화, 새로운 전염병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성탄절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희망적인 소식이 들리지 않자 용기를 잃었으며 절망감이 그들을 덮쳤다. 이것이 그들의 저항력에 위험한 영향을 끼쳤고, 그중 많은 사람이 사망하기에 이른 것이다.

 

저자는 강제 수용소는 그렇게 인간의 영혼의 깊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이자 선과 악의 혼합이라는 인간의 본성이 발견되는 곳으로 보았습니다. 그 수용소에서의 경험은 단순한 고난이 아닌 삶의 의미를 묻는 단계를 통과하는 과정이었다고 고백하며 수용소에서 삶의 의미를 추구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 고통받는 것과 죽어 가는 것까지 폭넓게 감싸 안는 포괄적인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니체의 구절과 함께 다음 니체의 인용은 고통을 극복해 낸 저자의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는 듯 합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입니다.” - 니체

 

수용소 생활 이후의 후유증 : 이인증

갇혀 있다가 석방된 죄수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을 정신 의학적인 용어로 ‘이인증 depersonalization, 離人症’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꿈처럼 비현실적이고, 있을 법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얼마나 많이 꿈에 사기를 당해 왔던가! 자유의 날이 와서 석방돼 집으로 돌아가고, 친구와 인사를 나누고, 아내를 포옹하고, 테이블에 앉아서 그동안 우리가 겪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하는 꿈, 그런 꿈을 꾸었다. 오히려 너무나 자주 꾼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그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자유의 날을 맞은 그 꿈도 끝이 나고 만다. 이제 그 꿈이 실현됐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그 꿈을 믿을 수 있을까?

 

저자는 석방된 죄수나 강제 수용소에서 풀려난 사람들이 겪는 후유증으로 이인증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간절한 꿈이 현실이 되었을 때 이를 비현실적이고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대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마치 우리가 너무나 간절한 꿈이 이루어졌을 때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라고 하는 관용구처럼요.

 

수용소에 있을 때 우리는 이런 얘기를 했다. 세상에 나가도 우리가 그동안 겪었던 시련을 보상해 줄 만한 속세의 행복은 없을 것이라고. 당시 우리가 바라던 것은 행복이 아니었다. 행복을 바라면서 스스로 용기를 얻고, 우리가 겪는 시련과 희생과 죽음에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불행을 견딜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게 수감되었다 풀려난 사람에게는 이후에도 정신적인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잠수병과 같이 깊은 물속에서 일하던 잠수부가 엄청난 압력을 받다가 갑자기 밖으로 나올 때 치명적이 듯 엄청난 정신적 억압을 받다가 갑자기 풀려난 사람은 도덕적, 정신적 건강에 손상을 입을 위험이 크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살아 돌아온 사람이 시련을 통해 얻은 가장 값진 체험은 모든 시련을 겪고 난 후 이 세상에서 신神 이외에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경이로운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빅터 프랭클 박사가 주창한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삶의 의미는 다음 세 가지 방법으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어쩌면 이 책에 쓰인 경험담은 그 세 번째 방법에 대한 실천의 과정과 결과가 아닐까요? 이 책을 읽으면서 온갖 비관적인 절망뿐인 상황에 대한 묘사로 가득하다가 말미에 희망을 찾은 듯한 예레미야 애가의 짧은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잠시도 잊을 수 없으므로,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나는 늘 말하였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
- 예레미야 애가 3:20~24(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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