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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설에세이

1906년 결혼제도의 붕괴를 예언하다 :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by Caferoman 2022. 2. 4.

고양이를 의인화 한 소설로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문명보다 100년전 쓰여진 이책이 더 훌륭하다

 

"나는 고양이다"로 시작하는 20세기 최고의 의인화 소설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아무튼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데서 야옹야옹 울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히 기억한다.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인간이라는 족속을 봤다. 나중에 들은즉 그건 서생(書生)이라는, 인간 가운데서도 가장 영악한 족속이라 한다. ... 손바닥 위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 서생의 얼굴을 본 것이, 이른바 인간이라는 존재와의 첫 대면이었다. 그때 참 묘하게 생긴 족속도 다 있구나, 했던 느낌이 지금도 남아 있다. 먼저 털로 장식되어 있어야 할 얼굴이 미끌미끌해 흡사 주전자다. 그 후 고양이들도 많이 만났지만, 이런 등신 같은 족속과는 만난 적이 없다. 게다가 얼굴 한복판이 너무 튀어나왔고, 그 가운데 있는 구멍으로 가끔 연기를 푸우푸우 내뿜는다. 코가 매워 정말 난처하다. 이것이 인간이 피우는 담배라는 것은 요즘에 와서야 알았다.

의인법으로 쓰여진 소설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사실 소세키의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어느 작품이 처음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최근에 읽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문명"과 여러모로 비교가 되는 소설이었습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개미로 공전의 히트를 친 이후에 그가 내놓은 소설들은 사실 재탕에 재탕을 거듭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고, 문명이라는 소설을 읽었을 때, '아 이번엔 개미 대신 고양이구나'라는 그리 신선하지 않은 탄식이 나오는 것은 저 혼자만의 생각인지...

 

의인법 :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에 비겨 사람이 행동하는 것처럼 표현하는 수사법.
활유법 : 무생물을 생물인 것처럼, 감정이 없는 것을 감정이 있는 것처럼 표현하는 수사법.
- 표준국어대사전

 

원래 우리 고양이 사이에서는 말린 정어리 대가리나 숭어 배꼽이라도 그걸 먼저 발견한 자에게 먹을 권리가 있다. 만약 상대가 이 규약을 지키지 않으면 완력에 호소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이런 개념이 털끝만치도 없어, 우리가 발견한 맛난 먹이를 꼭 자기들을 위해 약탈해간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믿고, 마땅히 우리가 먹어야 할 것을 빼앗고도 시치미를 뚝 뗀다. 

 

이 소설은 20세기 초반에 쓰여진 작품으로 일본인들에게 뿌리 깊게 자리잡은 애니미즘의 영향이 두드러집니다.

동시대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21세기에 인간이 아닌 집단(개미, 고양이)과 인류 문명과의 교감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소세키의 이 작품은 타자의 시점에서 인간 군상의 실체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절묘함이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니미즘 : 해, 달, 별, 강과 같은 자연계의 모든 사물과 불, 바람, 벼락, 폭풍우, 계절 등과 같은 무생물적 자연 현상과 생물 모두에 생명이 있다고 보고, 그것의 영혼을 인정하여 인간처럼 의식, 욕구, 느낌 등이 존재하다고 믿는 세계관 또는 원시 신앙 - 위키피디아

 

집사의 떡을 훔쳐먹다 발견한 네가지의 진리

‘얻기 힘든 기회는 모든 동물로 하여금 내키지 않는 일도 굳이 하게 한다.’
‘모든 동물은 직감적으로 사물의 적합, 부적합을 예견한다.’

이미 두 가지 진리를 발견했지만 떡이 들러붙어 있어 조금도 유쾌하지 않았다. 이가 떡에 박혀 있어 빠질 듯이 아팠다. 하녀가 오기 전에 얼른 먹어치우고 달아나야 한다. 아이들의 노랫소리도 끝난 모양이니, 이제 곧 부엌으로 달려올 것이다. 번민 끝에 꼬리를 빙빙 휘둘러보았으나 아무런 효과도 없고, 귀를 세웠다 눕혔다 해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귀와 꼬리는 떡과 아무 관계도 없다. 요컨대 휘둘러도 허사고, 세우거나 눕혀도 허사라는 걸 깨닫고는 그만두었다. 그때서야 이건 앞발의 도움을 받아 떡을 떼어내는 수밖에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우선 오른쪽 앞발을 들어 입 둘레를 두루 쓰다듬었다. 쓰다듬는다고 떨어질 리 없었다. 이번에는 왼쪽 앞발을 뻗어 입을 중심으로 맹렬하게 원을 그려보았다. 그런 주술로 이 요물이 떨어질 리 만무하다. 조급해하지 않는 게 중요할 것 같아 좌우로 번갈아가며 움직여보았으나 여전히 이는 떡에 박혀 있었다.

 

고양이가 집사의 집에 있는 떡을 훔쳐먹으려다가 곤경에 처한, 그 과정에서 고양이가 얻은 두가지의 통찰을 서술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마치 동물을 의인화 한 애니메이션을 바라보는 듯한 생동감이 느껴집니다.

 

아아, 귀찮아, 하면서 이번에는 양쪽 발을 한꺼번에 사용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이때만은 뒷다리로만 설 수 있었다. 어쩐지 고양이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렇게 된 마당에 고양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좌우지간 떡이라는 요물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는 기세로 얼굴을 닥치는 대로 긁어댔다. 앞발의 동작이 맹렬했기 때문에 자칫하면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했다. 그럴 때마다 뒷발로 균형을 잡아야 했기에 한 곳에만 있을 수 없어 온 부엌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내가 생각해도 이렇게 서 있는 것이 참 용했다. 세 번째 진리가 곧장 눈앞에 나타났다.
‘위험에 처하면 평소에 불가능한 일도 해낼 수 있다. 이를 천우(天祐)라 한다.’

 

고양이 입장에서 절박한 상황에 아랑곳 하지 않고 강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던 집사와 그의 안주인은 결국 그(고양이)를 고난의 수렁에서 구원해 줍니다.

 

“거, 떡 좀 떼어줘라.” 하녀는 좀 더 춤을 추게 내버려두죠, 하는 눈빛으로 안주인을 보았다. 안주인은 고양이의 춤을 보고 싶기는 했으나 죽이면서까지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지 잠자코 있었다. ... 하녀는 꿈속에서 막 맛난 걸 먹으려는 찰나에 누가 깨워서 일어나기라도 한 사람 같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떡을 쑥 잡아당겼다. 간게쓰 군은 아니지만, 앞니가 다 부러지는 줄 알았다. 정말이지 아프고 안 아프고의 문제가 아니라 떡에 단단히 박혀 있는 이를 인정사정없이 잡아당기니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인고를 거치지 않은 안락은 없다.’ 이 네 번째 진리를 경험하고 천연덕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집안사람들은 이미 안쪽 방으로 들어가버리고 아무도 없었다.

 

고양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인간 세상의 부조리

자신이 만들지 않은 물건을 자신의 소유로 정하는 법은 없으리라. 자기 소유로 정하는 것이야 별 지장이 없겠지만, 다른 사람의 출입을 금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 드넓은 대지에 빈틈없이 울타리를 치고 말뚝을 세워 누구누구의 소유지로 구획하는 것은, 마치 창공에 새끼줄을 치고 여기는 나의 하늘, 저기는 그의 하늘이라고 신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만일 토지를 잘라내어 한 평에 얼마를 받고 소유권을 매매한다면,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를 한 30세제곱미터로 나누어 팔아도 된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공기는 나누어 팔 수 없고 하늘에 새끼줄을 치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토지의 사유 역시 불합리하지 않은가.

 

'인간은 과연 어떠한 권리로 이 땅위의 공간을 구분짓고 멋대로 그 소유권을 주장하며 심지어 이를 매매하는가'라는 파괴되고 몸살을 앓고 있는 자연을 대변하는 듯 고양이는 토지 사유화의 불합리함을 언급합니다.

 

나는 요즘 들어 운동을 시작했다. 고양이인 주제에 무슨 운동이냐며 시건방지다고 무조건 비웃으며 욕부터 해대는 놈들에게 좀 물어보겠는데, 그러는 인간들도 바로 얼마 전까지 운동이 뭔지도 모른 채 먹고 자는 걸 천직으로 알고 있지 않았는가. ‘무사시귀인(無事是貴人)’이라며 팔짱을 끼고 엉덩이가 썩어 문드러지도록 방석에 앉아 있는 것을 남자의 명예라 여기고 우쭐거리며 살아온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운동을 해라, 우유를 마셔라, 냉수욕을 해라, 바다로 뛰어들어라, 여름이 되면 산속에 틀어박혀 한동안 안개를 먹어라, 이런 쓸데없는 주문을 연발하게 된 것은 서양에서 신국(神國)으로 전염된 새로운 병으로, 역시 페스트, 폐병, 신경쇠약의 일종이라 여겨도 좋을 정도다. 하기야 나는 작년에 태어나 올해 한 살이니 인간이 이런 병에 걸리기 시작한 당시의 모습은 기억에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시절에는 이 뜬세상에 있지도 않았음에 틀림없다.

 

1906년에 예언한 결혼제도의 붕괴

요즘 문명의 경향을 넓은 시야에서 곰곰이 살펴 먼 미래의 추세를 점치자면 결혼은 불가능한 일이 될 거네. 놀라지 말게. 결혼은 불가능해질 거야. 이유는 이러하네.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요즘은 개성 중심의 세상이지. 주인이 한 가족을 대표하고, 군수가 한 군을 대표하고, 영주가 한 영지를 대표하던 시절에는 대표자 이외의 사람에게는 인격이 전혀 없었어. 있어도 인정받지 못했지. 그러던 세상이 확 변해 모든 생존자가 개성을 주장하기 시작하고 누구에게나 너는 너, 나는 나라고 말하게 되었네.

 

이 구절을 읽었을 때에 처음으로 이 책이 쓰여진 시기를 의식하고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1906년도에 쓰여진 "결혼제도의 종말"에 대한 예언이라니. 물론 여기서 제시하는 소세키의 근거는 여성 인권의 신장과 이로 인한 자의식 강화로 인한 상호 결합불가능한 개인화로 다소 어거지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백년도 더 이전인 당시에 결혼제도의 와해에 대한 고찰을 했다는 점은 무척이나 놀라웠습니다.

 

개인이 평등하게 강해졌다는 것은 개인이 평등하게 약해졌다는 말이기도 해. 남이 나를 해치기 힘들어졌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내가 강해졌지만, 좀처럼 남에게 관여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옛날보다 약해진 거겠지. ... 이렇게 되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공간이 없어져, 살아가는 게 갑갑해지지. 자신을 힘껏 팽창시켜 터질 것처럼 부푼 상태에서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거야. 괴로우니까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여유를 찾게 되지.

하지만 부모 형제가 떨어져 사는 오늘날, 더 이상 떨어질 게 없으니 최후의 방안으로 부부가 떨어지게 되는 거지. 요즘 사람들은 한곳에 사니까 부부라고 생각하네. 이게 아주 잘못된 생각이야. 한곳에서 살기 위해서는 한곳에 있기에 충분할 만큼 개성이 맞아야 하네.

부부 사이에 물과 기름처럼 확연한 경계가 있는데, 그것도 안정되어 그 경계가 수평선을 유지하면 그런대로 괜찮지만, 물과 기름이 서로 공작을 하니 집안은 대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들썩거리는 거지. 이쯤에 이르러서야 부부가 동거하는 것이 서로에게 손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라네.

 

맥주 한잔을 탐하던 고양이의 최후

기분 좋게 술에 취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여기저기 정처 없이 산책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기분으로 칠칠치 못한 발을 대충 옮기고 있으니 왠지 잠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자고 있는 건지 걷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눈은 뜨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눈꺼풀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무거웠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다. 바다든 산이든 놀랄쏜가, 하고 앞발을 앞으로 내밀었다고 생각한 순간 풍덩 하는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는 사이에 당하고 말았다. 어떻게 당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당했다는 것을 알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다음에는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제정신을 차렸을 때는 물 위에 떠 있었다.

 

이 소설의 끝은 술취한 고양이의 최후를 보여주면서 마무리 됩니다.

마치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마지막 장면을 보는 듯한 섬세한 심리의 묘사가 일개 축생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합니다. 뭔가 귓가에 Queen의 Bohemian Rhapsody가 흐르는 듯 합니다.

‘이제 그만두자. 될 대로 되라지. 드드득 긁어대는 건 이제 싫다.’ 앞발도 뒷발도 머리도 꼬리도 자연의 힘에 맡기고 저항하지 않기로 했다. 차츰 편해졌다. 고통스러운 것인지 다행스러운 것인지 짐작할 수가 없다. 물속에 있는 것인지 방 안에 있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어디에 어떻게 있어도 상관없다. 그냥 편하다. 아니, 편하다는 느낌 자체도 느낄 수 없다. 세월을 잘라내고 천지를 분쇄하여 불가사의한 태평함으로 들어선다. 나는 죽는다. 죽어 이 태평함을 얻는다. 죽지 않으면 태평함을 얻을 수 없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고맙고도 고마운지고.

 

사실 일본 문학을 읽기 시작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아서 소세키의 작품은 이 책이 처음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이 손에 꼽는 작가의 소설을 하나 정도는 읽어 봐야겠다 싶어서 집어든 책인데, 절묘하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문명("고양이를 의인화 한 현대 소설")을 읽는 시기와 겹쳐서 다른 세기의 소설과 비교해가면서 읽게 되었네요.

 

그러면서 새삼스럽게

やはり、クラシックは永遠だ。
"역시, 클래식은 영원하다"

를 외치게 되는 멋진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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