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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인문학

열린 인문학 강의, 윌리엄 앨런 닐슨 : 종교

by Caferoman 2021. 8. 30.

누군가에게 성경 혹은 성서가 의미하는 바

누군가에게 ‘성서’가 되는 책이란 어떤 책일까요? 먼저 영적인 삶을 일깨우는 중요한 자극제가 되고 깨달음의 원천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목표를 다잡고 신앙을 굳건히 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그 책으로 되돌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성서는 영혼의 건강을 위해 확실하게 의지할 수 있는 증명된 치료약입니다. 성서는 마음속으로 은혜를 받고 희망을 얻는 모든 것과 연관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는 도구일 뿐 아니라 상징이지요.

홉스는 종교에 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다음 네 가지 현상, 즉 유령에 대한 견해, 이차 원인에 대한 무지, 소위 두려움에 대한 집착 그리고 우연한 일들을 전조로 여기는 행위에 ‘종교’의 자연적인 씨앗이 내재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각기 다른 공상, 판단 그리고 열정 때문에 그토록 다양한 의식儀式이 성장할 수 있었고 어떤 한 사람이 사용했던 의식이 대부분의 다른 사람에게는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이 말은 1651년에 출간된 『리바이어던』에 나옵니다.

 

저서의 이어지는 챕터에서는 종교에 대한 내용입니다. 여기서는 원론적인 종교의 교리나 그 차이에 집중하기보다는 종교에 요구되는 역할과 그 보편적인 특징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1755년에 데이비드 흄은 『종교의 자연사』라는 책을 썼는데, 여기서 그는 다신교가 종교의 원형이고 “최초의 종교 관념은 자연의 작용을 심사숙고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일상사에 관한 관심과 인간의 정신을 움직이게 하는 끊임없는 희망과 두려움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상 "렐프 바튼 페리"의 종교 분야 개론 부에서 인용

 

종교, 당신의 불안과 두려움을 위한 치료제

종교가 두려움이나 호기심과 같은 본능처럼 그 자체로는 종교와 전혀 관련이 없는 인간 본성의 다양한 요소를 이용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종교의식은 근원적이라기보다는 복잡하고 파생적이며, 인간에게 타고난 것이라기보다는 경험의 산물인 셈이지요.

 

종교는 그 종류를 막론하고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주는 보편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종교의 기원, 즉 신이라는 존재의 기원에 있어서도 종교를 넘어서는 보편성이 있음을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종교의 대상인 신은 흔하고 친숙한 대상입니다. 마치 태양을 너무 쉽게 볼 수 있고 도처에 산재해 있어서 누구나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모든 선입견을 제쳐두고 최초의 발견자나 지구에 막 도착한 화성인의 눈으로 이 세상을 살펴본다면, 절대로 신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통상적인 의미에서 신은 뚜렷하게 눈으로 볼 수 있는 사실이 아닙니다.

 

즉 종교가 인간과 환경의 결합으로 발생한 것이라는 보편적 원리라고 할수 있습니다.

 

종교, 두려움에서 출발해 희망에서 완성된다

 

인간은 주기적으로 자신의 통제를 넘어서는 거대하고도 설명하기 힘든 환경을 문득문득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이 뭔가를 도모하지만 결국 일의 성패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을 넘어서는 그 무엇입니다. 홍수, 가뭄, 역병, 혹독한 기후, 복종, 실수, 실패. 실제로 이런 것들을 통해 인간은 뭔가에 의존하고 있다는 교훈을 배우고 받아들입니다. 가장 인상적이고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은 죽음입니다.

이제 인간이 이렇게 쓰라린 경험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까요? 살아야 한다면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산다는 것은 모든 곤경으로부터 희망을 가지고 길을 찾아가는 것이니까요. 자신이 유한하고 뭔가에 의존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면 도움을 얻게 됩니다.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힘이 인간의 운명을 실제로 결정한다면, 인간은 그 힘을 이겨내려 하든지 아니면 그 힘과 동맹을 맺어야 합니다. 여기에 바로 종교의 뿌리가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무력감을 의식한 인간이 실제로 지배하는 힘과 자신을 결합하려고 시도합니다. 종교란 결핍감, 스스로 얻을 수 있는 세속적 이득에 대한 불신, 운명을 통제하는 힘과 타협해서 구원에 이르는 방법입니다. 종교는 두려움에서 출발해 희망에서 완성됩니다.

 

마지막 한 문장이 어쩌면 종교에 대한 저자의 입장을 잘 정리해준 요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종교는 두려움에서 출발해 희망에서 완성된다."

 

이상 "렐프 바튼 페리"의 종교 분야 개론 부에서 인용

 

불교를 통한 케이스 스터디

다시 불교의 가르침으로 돌아와서,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핵심은 인간 고통의 원인입니다.
그는 그 원인을 존재와 쾌락에 대한 갈망에서 찾았습니다. 이러한 갈망을 조절하려면 열반의 길에 들어야 합니다.
이는 현생에서 욕망과 악 그리고 미망의 불꽃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윤회의 고리를 끊는 것입니다.

신을 종교의 근원이 아니라 종교의 산물로 바라보는 관점이 중요한 까닭은 불교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불교는 신이 없는 종교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 자신이 공자처럼 종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종교의 창시자들은 모두 거의 불가피하게 추종자들에 의해 신성화되지요. 하지만 석가모니는 자신을 신성화하지 않았습니다. 석가모니는 영혼 자체도 일시적이고 환상적인 경험으로 봐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고통은 존재의 보편 법칙입니다. 존재는 욕망의 업보이고 이전 존재의 침전물인 인연, 습성, 공과 때문에 환생합니다. 존재의 순환은 피할 수 없는데, 생은 환생과 존속의 조건을 계속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성공적인 존재, 실질적인 욕망의 실현이 아니라 욕망을 이김으로써 존재로부터 해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종교에서는 신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적극적인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에 숨은 힘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을 곤경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점에서는 종교인 셈입니다. 모든 관점에서 봤을 때 열반은 적멸과 동등하지만 무기력함과 실패를 의식하는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구원을 의미하지요. 이것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선을 획득함으로써 인간과 세계를 일치시킨다는 생의 철학입니다.

 

신이 없는 종교로서의 불교를 다루면서 저자는 종교에 있어 신의 존재가 필수 요건이 아닌 종교의 산물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저자는 종교가 과학이나 이론과 차이를 보이는 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선 종교는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두고 사물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엄밀한 의미의 과학과는 다릅니다. 종교는 오직 인간의 운명과 관련된 우주의 삼라만상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종교는 사실적 판단이 아니라 희망, 두려움, 확신, 절망, 집착, 사랑, 감사 혹은 자기복종 같은 감정을 통해 모습을 드러냅니다.
종교의 두 번째 비과학적 요소는 상상력과 사회적 전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종교는 이론과 다릅니다. 이론이란 믿음 이후에 나오는 것이지 믿음 이전에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어떤 개인이 우주의 힘에 대한 해석을 채택해서 삶의 근거로 받아들이고 나서야 비로소 유효해져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과학으로 증명하려는 종교나 종교적인 입장을 변호하는 과학은 서로 다른 속성때문에 모순을 일으킬 수밖에 없음을 그 둘의 차이점을 짚어가면서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가 과학과 다른 또 하나의 중요한 측면은 증거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입니다. 과학 이론에서 요구하는 검증 능력과 동일한 능력을 지닌 종교는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종교는 어둠 속에서의 도약입니다. 그 이유는 확실합니다. 엄밀하고 이론적인 목적을 더 많이 밝혀내기 위해 미루었던 문제들도 실용적인 목적에서는 결론을 내려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삶이란 비상사태이고 위기이며, 윌리엄 제임스가 말했듯이 ‘강요된 선택’입니다. 재빨리 마음을 정해야 하고 닥치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런 세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리고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결정은 미룰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생각해봐도 증거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신앙이란 그럴듯해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고 그런 상황을 냉담하게가 아니라 확신을 가지고 믿는다는 뜻입니다.

 

"신앙이란 그럴듯해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고 그런 상황을 냉담하게가 아니라 확신을 가지고 믿는다"
이 구절은 마치 버트런드 러셀이 쓴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의 내용을 연상하게 하네요.

 

이상 "찰스 록웰 랜먼"의 불교 쳅터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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