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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역사

역사의 쓸모, 최태성 : 국민을 위한 정책을 펼친다는 것

by Caferoman 2021. 8. 31.

진정 국민을 위한 정치행정가가 된가는 것

오늘 <역사의 쓸모>에 대한 독서노트에서 공유하고자 하는 인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김육과 그가 생애를 바처 시행한 대동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워낙 수능 사회탐구영역에서 빠지지 않고 나온 주제라 기계적으로 암기하고 있는 수많은 조세제도 중 하나인 '대동법'은 누군가에게는 일생을 싸워 얻어내야 했던 투쟁의 산물이기도 했군요.

"역사의 쓸모"가 재조명하는 대동법

다음은 책에서 말하는 ‘당시 서민들에게 절실했던 대동법이 탄생하게된 경위’입니다.
예전 고등학생때는 이렇게 외웠던 기억이 납니다. "조선후기 조세제도 전세, 공납, 역" 당시에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외웠는데 당시 백성들에게 이 공납이 만만치 않은 등골 브레이커였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이 책을 통해 다시 바라보게 되네요.

대동법이란 쌀로 세금을 내는 제도예요. 당시 백성이 내는 세금은 크게 세 종류가 있었습니다. 각각 전세, 역, 공납이라고 했는데요. 전세는 토지에서 생산한 것의 일부를 내는 거니까 지금으로 치자면 소득세 같은 것입니다. 역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거예요. 요역은 국가에서 궁궐을 짓거나 길을 만들 때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고, 군역은 군대에 가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 거고요. 어찌 보면 지금도 존재하는 세금 형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공납입니다. 공납은 지역 특산물을 바치는 거예요. 백성들에게는 공납이 굉장히 큰 부담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주도의 특산물은 귤이잖아요. 지금이야 마트에 가면 산처럼 쌓여 있지만, 옛날에는 귤이 무척 귀했어요. 운송 수단도 변변치 않은데 한반도의 가장 남쪽, 그것도 섬에서 가져와야 했으니 희소가치가 클 수밖에 없었죠. 왕이 공신이나 과거시험에서 일등을 한 장원에게 주는 하사품이 귤 몇 알 정도였습니다. 하사품을 받은 사람들은 귤을 가지고 와서 가족들과 한 쪽씩 나눠 먹었어요. 그 정도로 귀한 과일이었습니다.

방납업자 : 공납 대행업체의 등장

제주도 백성들은 당연히 귤을 공납으로 바쳐야 했습니다. 어느 마을에 귤 100상자 하는 식으로 할당량이 다 있었어요. 귤나무에 귤이 열리기 시작하면 관리들이 찾아왔습니다. 아직 콩알만 한 귤을 모조리 세어서 나중에 몇 개를 제출하라고 미리 정해줍니다. 100상자를 채우기 위해 집집마다 분배를 해주는 거죠. 그런데 처음에 열린 귤이 모두 수확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썩는 것도 있고, 떨어지는 것도 있고, 새나 동물이 몰래 먹는 경우도 있겠죠. 게다가 제주도에는 바람이 엄청나게 많이 불잖아요. 하지만 그런 변수는 고려하지 않아요. 사정을 봐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썩은 귤을 조정에 바칠 수도 없어요. 공납용 귤을 준비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귤나무에 뜨거운 물을 붓는 농민도 많았다고 합니다. 몰래 귤나무를 죽였던 거예요. 사람들이 공납 때문에 괴로워하니까 수수료를 받고 공납을 대신 내주는 대행업자까지 등장합니다. 요즘도 대행 업체들이 있잖아요. 조선시대에도 그런 사업을 하는 자들이 생겨난 거죠. 이 사람들을 방납업자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방은 ‘막을 방防’ 자예요. 공납을 막아준다는 거죠.


공납의 어려움 때문에 방납업자라는 중간업자의 탄생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시대를 불문하고 중간업자들은 항상 있어왔나봅니다. 아무튼 처음에 상호 편의를 위해 생겨난 대행업체는 권력과 결탁을 하면서 부패하게 되고 이로인해 백성들에게 가해지는 조세의 부담은 더욱 가중됩니다.

이제 좀 숨통이 트이나 싶었던 백성들은 곧 더욱 고통스러운 상황을 맞게 됩니다. 방납업자들이 공납을 걷는 사또와 결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또는 방납업자의 특산물만 받아요. 백성들 입장에서는 원하지 않아도 무조건 방납업자에게 공납을 맡길 수밖에 없는 거예요. 당연히 방납업자들은 마음대로 값을 올립니다. 나중에는 도를 넘어서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져요. 귤이 한 상자에 1만 원이라면 방납업자는 귤 한 상자를 내주면서 10만 원을 받는 식이에요. ‘그럴 바에는 그냥 내가 어떻게든 마련하겠다’ 해서 사또에게 직접 귤을 바치면 사또는 안 받죠. 이건 상처가 났고, 이건 색깔이 안 좋고, 이건 맛이 없어 보이고……. 별의별 트집을 다 잡아요. 이런 걸 어떻게 임금님에게 바치느냐고 도리어 큰소리를 칩니다. 결국 백성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방납업자들의 10만 원짜리 귤을 살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면 방납업자들이 사또에게 사례비를 주는 거죠. 그 돈을 당시에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인정人情’이라고 했어요. “너 왜 이렇게 인정이 없냐?” “사또, 이게 다 인정입니다.” 이랬던 거예요. 사람의 따뜻한 마음을 뜻하는 말이지만, 저는 인정이라고 하면 부정부패가 떠오릅니다. 이 인정 때문에 백성들이 죽어났어요.

조세의 일원화, "그냥 쌀로 내자" 그것이 왜 그리 어려웠을까?

대동법은 공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개혁안이었습니다. 그냥 쌀로 세금을 내자는 거예요. 그때의 쌀은 화폐랑 똑같았어요. 조정에 바칠 양을 채우기 위해 이 집, 저 집 개수를 할당할 필요도 없어요. 백성들 입장에서는 무척 반가운 내용이죠. 그런데 대동법이 특히 혁명적이었던 건 토지에 부과된 세금이라는 점이에요. 공납은 집집마다 부과되는 것이라 누구나 다 내는 것이었다면 대동법은 토지 한 결마다 세금이 매겨져 땅을 가진 사람만 세금을 내게 하는 제도였어요. 토지가 없거나, 적게 소유하고 있던 일반 백성에게는 감세인 반면 넓은 토지를 소유한 양반 지주에게는 증세였던 셈이죠.


위와 같이 공납에 고생하던 백성들을 위해 어찌보면 단순히 ‘그냥 쌀로 세금 걷자’라는 단순한 정책이 대동법이었지만 이를 시행하는데에 수많은 기득권자들의 반대가 거세던 당시 상황을 보면, 부동산 문제에 있어 기득권자들의 반발을 넘어 성공적인 부동산 정책을 시행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오늘날의 모습과 오버랩 됩니다.

김육은 대동법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대동법 확대 시행을 끊임없이, 정말 끊임없이 주장했어요. 반대로 양반들은 대동법이 확산되지 못하도록 열을 올렸죠. 전세는 토지 1결당 쌀 4~6두를 내는데, 대동법은 1결당 12두를 부과했어요. 땅을 가진 사람 입장에서는 전세의 두세 배나 되는 부담을 추가로 지는 거니까 세금 폭탄이라며 난리를 친 거죠. 그러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합니다. 백성들이 대동법을 불편해한대요. 요즘 정치인들도 그러죠. 정책을 얘기할 때 국민을 들먹이면서 이건 안 된다, 저건 안 된다 그래요. 실은 자기들 이익을 챙기려고 그러는 것인데 국민 핑계를 댑니다. 김육은 이런 관리들에게 버럭 화를 내요. “대동법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은 오직 모리배들뿐입니다!” 하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합니다.

한사람의 인생을 갈아 넣어 완성된 대동법

인조가 사망하고 70세의 나이가 된 김육은 새로 즉위한 왕 효종에게 사직 상소를 올립니다. 효종은 업무 능력이 뛰어난 김육을 붙잡았습니다. 결국 김육은 효종이 자신의 사직 상소를 일곱 번이나 물리치고 계속 벼슬을 내리자 조건을 내겁니다. 대동법을 확대 시행해주면 일을 하겠다고 한 거예요. 이렇게까지 나가니까 드디어 충청도에도 대동법이 시행됩니다. 호서대동법이 시행되고 김육이 어떤 말을 했는지가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쉽게 말해 인터뷰 같은 건데요.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 말에 김육은 이렇게 답합니다. “나는 학문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저 백성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이 줄어서 너무 기분이 좋다.” 백성이 배고픈데 무슨 학문이 필요하냐는 거예요. 성리학이며 양명학이 무슨 소용인가, 백성이 잘살면 최고지. 이것이 바로 그의 사상이었습니다.


오늘 날 김육처럼 권력에 반대에 굴하지 않고 진정 서민을 위한 정책을 뚝심있게 밀어부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이제 곧 대선인데, 그렇게 서민의 짐을 경감시켜 줄 정책을 추진력있게 이끌어 갈 지도자가 나타나길 소망하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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