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역사

역사의 쓸모, 최태성 : 역알못에게도 술술 읽히는 역사책

by Caferoman 2021. 8. 23.

독서리뷰

역알못에게도 어렵거나 지루하지 않은 역사책

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죽을힘을 다해 싸운다면 오히려 해볼 만합니다.

 

수 많은 인용과 패러디로 유명했던 이순신 장군의 위 구절은 난중일기를 읽으면서 한번, 영화 명량을 보면서 한번,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게 되면서 또 한번 달리 보이는 구절이었습니다.

단순히 입시를 위해서 기계적으로 배우고 외웠던 역사는 이 책을 통해 좀 더 피부에 와 닿는, 저자의 표현대로 나에게 "쓸모" 있는 역사가 된 것 같네요.

 

삼국유사 vs 삼국사기

우리 역사 속에 이 ‘쓸데없다’는 것만 찾아 모은 분이 계세요. 바로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입니다. ‘유遺’라는 한자에는 ‘버리다, 유기하다’라는 뜻이 있어요. ‘유사遺事’라는 건 말 그대로 ‘버려진 것들을 모은 역사’입니다. 버려졌다는 말은 곧 이미 무언가를 취했다는 뜻이겠지요. 그렇다면 선택된 것은 무엇이냐? 바로 『삼국사기』입니다.

『삼국사기』는 고려시대 유학자 김부식이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시대 역사서입니다. 어느 연도에 무슨 일이 일어났고 어떤 인물이 있었는지를 쭉 정리한 책이지요. 나라가 주도하여 편찬한 정사正史이기 때문에 신비하고 기이한 일을 전하는 야사野史는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교과서에서 간단히 요약 나열된 선조들의 업적을 영혼없이 외기만 했었는데, 그 업적 하나 하나에서 시대정신과 인류애가 없었으면 불가능 했을 강한 의지가 느껴져서 시대정신이 부족한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훈민정음의 가치

한글을 만든 목적부터가 ‘민본’이에요. 백성들을 위해 만든 거지요. ‘훈민정음’의 뜻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입니다. 『훈민정음 언해본』 서문을 보면 이렇게 나오죠.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그걸 해석하면 이래요.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서 말과 문자가 서로 맞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자기 뜻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게 안타까워서 새로 글자를 만들었으니 쉽게 익혀서 편하게 쓰라는 겁니다.

 

장기 집권과 권력 유지를 위해 고안/개발된 사사오입 개헌, 평화의 댐, 사대강 사업이 아닌 오로지 국민(혹은 백성)의 필요한 바와 입장을 해아려 국가주도로 하나의 태스크를 주도했던 왕이 과연 한반도 역사에 얼마나 있었을까요? 그러고 보면 세종대왕이 기득권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하여 이루어 낸 "훈민정음"프로젝트는 그 결과물 자체의 가치를 넘어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배층은 피지배층이 공부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억압된 자들이 똑똑해지는 순간 이 상황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테고, 그것을 바꾸려 할 거 아녜요? 그럼 자기들이 골치 아파지잖아요. 그래서 상민이나 여자는 공부를 시키지 않았던 거예요. 그냥 순응해서 살길 바랐으니까요. 그런데 한글이 반포된 지 3년 만에 한글 벽서가 붙습니다. 어느 정승을 비판하는 내용이었어요. 이건 그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사건이에요. 사극을 보면 벽서 앞에서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잖아요. 그 사람들 마음이 어떻겠어요? 문제의식을 느끼겠죠? 그저 순응하고 살아가던 사람도 그런 글을 자꾸 접하면 새로운 게 보이고 몰랐던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이 사회의 모순을 깨닫고 문제의식을 공유할 때 세상이 변할 수 있어요. 지식을 쌓고 정보를 나누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일입니다

창조나 창의력을 말하면 사람들은 자꾸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고 해요. 그러나 아무리 새로워도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으면, 열광하지 않으면 널리 쓰이지 않습니다. 저는 소수를 위한, 소수의 권익을 대변하는 기술은 역사의 흐름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자유의 확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어요. 폭발력을 지닌 창조적 발명은 소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수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21세기 서희와 같은 협상가가 존재했다면?

복잡한 국제관계와 이해관계에 얽혀있는 오늘날, 과거 서희와 같은 협상가가 존재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국제외교는 어떠했을까요? 저자는 고려 - 거란 사이에 있었던 외교분쟁에서 활약했던 서희의 외교술을 재조명합니다.

서희가 재상으로 있을 때 고려는 송나라와 국교를 맺고 거란을 멀리했습니다. 그런데 거란의 장군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와요. 고구려의 옛 땅은 모두 거란의 차지인데, 고려가 영토를 침범하고 있어서 토벌하러 왔다고 으르렁댑니다. 80만 병사를 이끌고 왔으니 당장 나와서 항복하라고 협박문을 보내죠.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거란의 요구를 들어주자는 의견이 우세했습니다. 그런데 서희가 벌떡 일어나서 반론을 제기합니다. ... “만약 우리가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고 적이 원하는 대로 땅을 떼어준다면 만세의 수치로 남을 것이다.”

외교를 할 때 가장 중요한 자세는 패를 보여주지 않는 것입니다.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거죠. 일례로, 한반도에 사드(THAAD)를 배치하느냐 마느냐로 시끄러웠을 때 우리 정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어요. 중국은 사드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사드 배치의 목적이 북한이라고는 하지만 중국에 위협이 된다는 것이죠. 이명박 정부까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NCND(neither confirm nor deny)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이목을 끌지 않도록 절제된 대응을 하는 로키(low key) 기조를 유지했죠. 그런데 다음 정부는 곧바로 속내를 드러냈어요. 사드를 배치한다고 해버렸습니다. 사드 배치라는 패를 숨기고 있어야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는데, 패를 보여줬으니 그 판에서는 힘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였죠. 설혹, 패를 뒤집더라도 이후 전개될 양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대책을 세웠어야 하는데 그래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사드 배치를 선언한 순간 중국과 마찰이 생겼습니다. 중국이 좋고 싫고를 떠나서 외교 문제를 그렇게 풀어가서는 절대로 유리한 위치에서 관계를 이어갈 수 없습니다.

 

이 책이 쓰여진 시점이 사드배치로 인해 대중국 외교에 어려움을 겪던 시기인지라 더더욱 이 서희의 사례는 남일 같지 않게 다가옵니다.

 

서희와 소손녕은 자기 패는 보여주지 않고 상대의 패를 읽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서희는 거란군이 전쟁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빨리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싸울 의도로 대군을 끌고 왔으면 얼른 공격해야 하는데 땅을 돌려달라고만 하잖아요. 그러면서 왜 가까운 거란하고는 교류하지 않고 송나라랑 친하게 지내느냐고 슬쩍 진짜 패를 드러냅니다. ... 거란이 정말 싸워야 하는 나라는 송나라예요. 거란 입장에서는 송나라와 고려가 친한 게 문제였어요. ... 거란의 패를 읽은 서희는 탐색전을 끝내고 먼저 제안합니다. “우리도 너희랑 친하게 지낼 수 있어. 그런데 고려와 거란 사이에 있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우리가 그 땅을 관리할 수 있게만 해주면 얼마든지 거란으로 가서 왕에게 인사를 드릴 수 있어.” ... 고려와 거란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뜬금없이 제3자인 여진을 끌고 들어와서 완전히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어버린 겁니다. ... 이 회담으로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얻게 됩니다. 거란에 땅을 줘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오히려 거란한테서 땅을 받아 온 거예요.

그럼 거란은 손해를 본 걸까요? 아닙니다. 거란이 목표로 하는 건 송나라예요. 그 어마어마한 땅에 비하면 고려에 주기로 한 강동 6주는 콩알만 한 땅입니다. 그건 손해가 아니라 투자예요. 고려에 후방을 공격당할 걱정 없이 송나라를 총공격하기 위한 투자였습니다. 이 회담에서 진 사람은 없습니다. 고려도 거란도 이긴 겁니다. 협상이란 이처럼 서로가 윈윈할 수 있는 조건을 찾는 일입니다.

 

이 책을 통해 당시 고려는 늘 거란/몽골 등을 상대로 '힘겨운 항쟁을 했다' 후에는 '영토 일부를 빼앗기고 급기야 원의 속국이 되기까지 했다' 정도로 일축해서 기억하고 있던 역사에서,
저자의 재조명을 통해 비록 열악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어떻게 외교술로 차선을 얻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선조들의 고뇌와 지혜를 바라보며 우리에게 통찰력을 주는 쓸모있는 역사로 인식을 전환할 수 있었습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