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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설에세이

악마도 때론 인간일 뿐이다 - 한스 라트(feat. 단테 - 신곡「지옥편」)

by Caferoman 2021. 8. 7.

독서노트

「지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토니 아우어바흐가 말한다.
「여긴 무슨 일이 있었죠?」 내가 묻는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셰익스피어 버전으로 말하자면, 오, 사랑하는 야콥, 지옥은 이제 텅 비었다오, 악마는 죄다 지상으로 옮겼으니.」

 

단테의 신곡이 "지옥 - 연옥 - 천국" 이렇게 3부작으로 이루어져 있듯 한스 라트의 그리고 "신은 시리즈" 역시 3부작으로 구성이 되어있습니다. 다만 3부작을 나누는 경계가 달라 굳이 나누자면 각 권을 "창조 - 타락 - 구속"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네요.

이 책은 주로 인간의 타락에 관련된 이야기를 주로 다룹니다. 물론 무겁지 않고 유쾌하게요.

 

「좋아요. 그럼 오늘의 지옥 메뉴는 뭐죠?」
「더티 마티니요. 진과 베르무트에다 올리브 주스 몇 방울을 섞어서 만들어요. 좀 떫은맛이 나죠.」

 

MANCHMAL IST DER TEUFEL AUCH NUR EIN MENSCH

그저 수다나 떨러 인간을 찾아온 신이라는 발칙한 상상의 이야기는 「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했다」에서 「악마도 때론 인간일 뿐이다」로 이어집니다.

 

「악마가 체스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네요. 자꾸 자기가 둔 수가 어떤지 묻는 걸 보니.」

 

이번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영업을 하러 온 '악마'의 이야기입니다. 단테의 신곡 시리즈에서도 사실상 지옥편의 참신성과 인기가 연옥편과 천국편에 비해 압도적이었던 것처럼 한스 라트의 3부작 중 두,세번째 작품이 첫번째 시리즈 「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했다」의 아성을 넘어서지는 못하는 점은 조금 아쉽습니다.

 

아무튼 1편 에서 창조된 인간의 정체성과 신과 인간의 관계에 초점을 두었다면 2편에서는 세상에 실재하는 악과 선악의 관계를 해학적으로 풀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건 나도 모르죠. 다만 악마가 내 인생을 완전히 망쳐 놓으려고 하는 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한테 그런 여편네를 보냈을 리가 없죠.」

 

“아쉽군요. 자정이 악마에게는 훨씬 좋은 시간인데.”

「나는 사실 잘 모르겠어. 자네야 사제니까 악마의 존재를 명확히 믿겠지만 나는 심리학자야. 악마의 외적 실존을 믿기보다는 인간 내면에 악의 심연이 자리하고 있다고 믿지.」 로베르토는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연기를 깊이 들이마신다.

「바로 그런 태도만큼 악마에게 좋은 것은 없어. 악마는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믿는 걸 좋아하지 않아. 심지어 아무도 자신을 믿지 않는 걸 가장 좋아해. 왜 그런 줄 아나? 악마를 믿지 않는 사람은 악마에겐 정말 고맙고 손쉬운 제물이거든. 야콥 자네도 그런 제물이야. 아무리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천국이 우리 마음 속에 있다고? 그렇다면 지옥은 그대 발바닥이 닿는곳에 있다.

「그럼 진짜 지옥은 어디 있습니까?」 내가 궁금해한다.
「아니면 불쌍한 죄인들을 벌주는 곳이 존재할 거라는 생각도 헛소리인가요?」
「그건 헛소리가 아닙니다. 심지어 그런 장소는 여럿 있죠.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실용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고문과 학대 같은 사업 영역을 전부 외부에 위탁 처리했어요. 요즘 말로 아웃소싱을 줬다는 말이죠.」 토니의 표정이 진지하다.

한마디로 지옥을 지상으로 옮기고자 했던 아이디어는…… 요즘 말로 대박이었죠.
우리는 인간들을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기 위해 더 이상 복잡한 수단을 강구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인간들이 알아서 서로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도록 자극만 주면 되었어요.
그건 쉬운 일이었죠. 그래서 우리는 그 뒤로 쭉 그렇게 해오고 있어요

 

악마들도 급변하는 세상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지옥을 경영함에 있어 혁신을 거듭했나봅니다.
지옥의 얼굴마담 격인 사업(고문/학대)까지도 이 세상에 아웃소싱을 준 걸 보면 말이죠.
확실히 위엄이나 간지(?) 측면에서는 단테가 묘사했던 지옥의 포스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만... 나름 그들이 도태되지 않고 진화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고통의 도시로 가는 길이 나를 통하고,
영원한 고통으로 가는 길이 나를 통하며,
영원히 버려진 인간들에게 닿는 길이 나를 통한다.
정의가 조물주께 호소했나니,
나를 창조한 이는 신성한 권위이시며,
최고의 지혜이시며, 태고의 사랑이시니.
영원한 존재들 이외에 나보다 먼저 창조된 것이 없나니,
나 또한 영원히 지속된다.
여기 들어오는 자들이여, 모든 희망을 버릴지니라. - 신곡「지옥편」,단테

 

영업부장 루시퍼가 제안하는 달콤한 유혹

신이 친히 찾아와 소통했던 존재, 악마로서는 상당히 상품가치가 높은 야콥을 쉴새 없이 유혹하면서 이야기는 3부작의 마지막 「그리고 신은 내게 도와 달라고 말했다」로 이어져 갑니다.

 

봉투는 장식용 스티커로 봉인되어 있다. 스티커 위에는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조잡한 천사 그림이 그려져 있고, 펼쳐진 두루마리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도미누스 보비스쿰Dominus Vobiscum. 미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경구인데, 보잘것없는 내 라틴어 실력과 아득한 종교 수업에 대한 기억만으로도 이 말은 충분히 번역할 수 있다. 주님께서 너희와 함께하시나니.

 

성경에 나오는 광야에서 예수께서 받으신 유명한 3가지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대심문관 이야기를 통해 그의 3가지 선택의 결과가 후대에 신앙을 가지게 되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위주로 기술합니다. 반면 한스 라트의 이 소설에서는 복음서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저서 어디에서도 대변해주지 않던 악마의 입장에서 유혹과 시험을 재해석 하는 듯 합니다. "우리도 우리 나름의 고충이 있었어", "지옥을 대기업 프랜차이즈로 성장시킨 썰 푼다" 라고 말하는 듯한 루시퍼의 말재간이 이 소설의 포인트가 아닐까 싶습니다.

 

「마음속에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이 있는 사람은 절대 완전히 나쁠 수는 없어. 난 그렇게 생각해.」
내가 잠시 후 덧붙인다.
「설사 그가 악마라고 하더라도.」

 

함께하기 좋은 것들

지옥으로 가실 분은 단테라인으로 환승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책이 마음에 들었다면

아직 다른 "그리고 신은..." 시리즈를 읽지 않으셨다면 모두 정주행하는 것을 강하게 추천합니다.

 

"그리고 신은..." 시리즈 3부작

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feat.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악마도 때론 인간일 뿐이다 - 한스 라트(feat. 단테 - 신곡「지옥편」)

그리고 신은 내게 도와 달라고 말했다 - 한스 라트(그리고 신은 시리즈의 마지막)

 

저자가 이 소설을 쓰는데에 큰 영향을 받았을 거라 의심되는 고전 명작들

  •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 도스토예프스키
  • 「신곡 : 지옥」 - 단테

이 소설의 세계관과 구성이 마음에 든다면 좀 더 읽어볼만한 현대 작품들

  • 「신」, 「죽음」 - 베르나르 베르베르
  • 「신과 함께 : 신화편」, 「신과 함께 : 저승편」,「신과 함께 : 이승편」 - 주호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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