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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설에세이

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feat.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by Caferoman 2021. 8. 6.

독서노트

「신이 노름꾼이라고요? 거참 흥미롭네요. 예전에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했죠.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고.」
「나도 알아요. 아인슈타인은 낄 데 안 낄 데 모르고 아는 척하기 좋아하는 인간이죠.
신은 주사위를 던질 뿐 아니라 룰렛도 아주 좋아해요. 블랙잭은 물론이고. 심지어 가끔 포커도 쳐요.
생각해 봐요. 도박꾼이 아니라면 어떻게 인간 같은 족속을 만들 생각을 했겠소?」

 

UND GOTT SPRACH: WIR MÜSSEN REDEN!

개인적으로 (고전 문학을 제외하고) 2019년 읽었던 최고의 소설을 꼽으라면 한스 라트의 '그리고 신은...' 3부작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 이야기를 좀 더 현대적이고 캐주얼하게 풀어낸 버전이라고 할까요?
'인간을 만든 신이 어느날 나를 찾아온다면, 어떤 모습으로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라는 흥미롭지만 참신하기는 쉽지 않은 주제를 저자는 첫 문장부터 흥미롭게 풀어냅니다.

 

전처가 한밤중에 문 앞에 서 있다.

 

신이 없더라도 우리는 신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 볼테르

책의 서문에 등장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왜, 구지 이 어록을 인용해야 했을까',
분명 이 저자 역시 도스토예프스키의 광팬임에 틀림이 없다는 합리적인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말이다, 18세기에 어떤 죄 많은 한 노인이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일부러라도 만들어내야 한다’
(s’il n’existait pas Dieu, il faudrait l’inventer.)
라고 말한 적이 있어. 그래서 정말 인간은 신이라는 걸 만들어 냈지.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도스토예프스키

 

저자의 종교를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한스 라트는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신이 찾아온 것을 가정한 것 같습니다. 곳곳에 성경에서 익숙한 신/메시아의 모습을 유희적으로 풀어내는 것을 보면요.

 

「프레디 집에 가면 있을 거요. 그 집에서 오늘 결혼식 파티가 열리거든요. 아벨도 거기 구경 갔소.」
노인의 단어 선택에 나는 잠시 혼란스러워진다.
「구경 갔다고요? 초대도 받지 않은 결혼식에 갔다는 말입니까?」
노인이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소. 뭐 늘 하던 짓이니까.」

「무슨 저런 시건방진 등신이 다 있어?」 하인츠가 재수 없다는 듯이 불쑥 내뱉는다.
「저런 놈이 어떻게 신의 아들이지? 도무지 믿을 수가 없군.」
「한편으론 위안이 되기도 하는데요. 자식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건 신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드니까요

 

신이 인간을 찾아와 무언가를 부탁한들 해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만일 내가 자네라면 정신 이상자인 게 더 좋을 것 같아. 자네가 정말 신이라면 누구도 자네를 도와줄 수 없을 테니까.」

인간 세상을 찾아온 신에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제한적입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대심문관처럼 당신 없이도 잘 살고 있으니 돌아가라고 하거나, 아니면 이 책에서의 야콥처럼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손 놓거나... 순탄치 않은 이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찾아온 신이라는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기적'은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던져진 질문처럼 저자 또한 그 질문을 던집니다.

 

황야에서의 첫 번째 물음은 이 같은 뜻을 지니고 있었소. 그런데 당신은 당신 자신이 무엇보다 존중하는 자유 때문에 그것을 거부했던 거요. 그러한 뜻 외에도 이 물음에는 현세(現世)의 위대한 비밀이 숨어 있소. 만약 당신이 ‘지상의 빵’을 받아들였다면, 개개의 인간들과 또 온 인류의 영원하고도 공통된 고민거리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었을 것이오. 고민거리란 바로 ‘누구에게 무릎을 꿇을 것이냐?’ 하는 의문이오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 일부

「예를 들어, 자네는 마음만 먹으면 세상의 모든 카지노 돈을 딸 수 있다고 해놓고 왜 그러지 않았지? 그 돈이면 정말 좋은 일들을 많이 할 수 있잖아! 그랬다면 자네의 삐딱한 아들조차 그게 알량한 서커스 마술 따위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았을까?」
「어제 난 상당한 액수를 수도원에 잃어 주고 왔어.」
「그것도 카지노에서 딴 돈이야?」 아벨이 고개를 끄덕인다.
「자네한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라면 왜 좀 더 큰 규모로 하지 않지? 돈이 많으면 바꿀 수 있는 일도 많아.」 나는 이런다고 해서 아벨이 돈의 출처를 고백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않았지만, 이런 도발은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최소한 자신의 논거에 허점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할지 모르니까.
아벨은 깊은 한숨을 내쉰다. 「좋아, 자네 말대로 내가 그렇게 했다고 쳐. 그다음엔 무슨 일이 벌어질까? 기자들이 나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카지노 돈을 어떻게 그렇게 몽땅 털 수 있는지 묻겠지. 경찰도 당연히 내 대답에 관심이 높을 테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진실을 말해야 할까?」 나는 침묵한다.
「그래, 기왕 말이 나왔으니 끝까지 가보지.」 아벨이 말을 이어 간다.
「내가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했다고 쳐. 실은 내가 신이어서 그 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이야. 그럼 무슨 일이 벌어질까? 카지노들을 차례로 망하게 한 게 내가 세상의 본원적 지배자라는 사실을 믿게 할 충분한 근거일까? 세계 종교의 지도자들이 내 말을 진실이라고 믿을까? 그래서 나를 공동의 신으로 떠받들까? 아니면 그전에 어떤 종교를 갖고 있든 상관없이 그날부터 모든 인류에게 또 하나의 신이 생겼다고 생각할까?」
「지금으로선 나도 확신이 안 드는군.」
「그건 나와 의견이 같군. 아마 그보다는 이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겠지. 사람들은 나를 깎아내리거나 고소를 하거나, 심지어 나를 죽이려고 할 거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네나 내 아들처럼 단순한 해결을 믿지 않으니까. 그건 어떤 종교를 갖고 있든 상관없어. 크리스티안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야. 원한다면 성경을 펴봐. 그 부분에 있어서는 성경 말이 맞아. 인간들에게 신을 보내면 인간들은 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합당한 이유를 찾아낼 거라고 했으니까.」
나는 침묵하다가 얼마 뒤 입을 연다. 「그래도 자네가 신이라는 증거는 한층 더 인상적이고 장엄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식이 됐건… 좀 더 신에 걸맞은 형태로 말이야. 인류에게 자네의 실존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카지노 몇 개를 망하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아, 그래? 그럼 세상을 무엇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 자연 재앙?」
나는 어깨를 으쓱한다. 「모르겠어. 뭐, 가능할지도.」
「좋아. 어떤 걸 원해?」 아벨이 비아냥거리듯 묻는다.
「대홍수? 전염병? 가뭄? 메뚜기 떼의 습격? 아님 일식으로 충분하겠어?」 나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모르겠어.」
「명심해, 야콥. 인간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 기적은 결코 쉽지 않아. 예를 들어 남극과 북극의 얼음이 실은 지구 온난화 때문이 아니라 내 지시로 녹는 것이라고 해도 인간들은 그 때문에 신을 믿지는 않아. 아니, 오히려 그 반대지.」 - 「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다고 했다」 중 일부

그렇게 신과 동행하는 이 묘한 이야기는 3부작 「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했다」에서 「악마도 때론 인간일 뿐이다」, 「그리고 신은 내게 도와 달라고 말했다」로 이어지게 됩니다.

 

함께하면 좋은 것들

도스토예프스키 라인으로 환승하실 분은 이번역에서 하차하여주십시오

 

프랑스 보르도의 뽀므롤 혹은 생 테밀리옹지역 와인

선반에는 최고급 보르도 와인 여섯 병이 기품 있게 누워 목을 따주길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 와인을 보는 내 눈이 정확하다면 비싸게 주고 구입하지 않은 와인은 하나도 없어 보인다. 나는 싱글벙글거리며 포므롤 와인을 냉큼 집어 들고는 찬장을 뒤져 곧 레드 와인 잔과 아직 가격표가 붙어 있는 고급 디캔터를 찾아낸다.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와인을 마시는 장면입니다. 이 세상에 내려온 신 이야기를 하는데 와인이 빠져서는 여러모로 섭섭하죠. 이 와인에서 직접 언급한 뽀므롤(Pomerol) 지역의 와인도 그렇지만 저는 뭔가 이 소설의 감성과 분위기가 생 테밀리옹(Saint-Émilion)과도 몹시 잘어울릴 것 같아보입니다.

제가 추천하는 와인은

  • Chateau Lagrange, Pomerol(샤또 라그랑쥬, 포므롤) - Merlot 95% , 카베르네 프랑 5%의 메를롯의 매력을 느낄수 있는 포므롤 와인
  • Saint Emilion Baron Carl(쌩떼밀리옹 바롱 칼) - Merlot 베이스의 보르도 블랜드 와인입니다.

고르다보니 뭔가 이 소설은 Merlot과 잘어울리는 느낌입니다. 이 멋진 소설과 함께 보르도 레드와인 한잔 어떠신가요?

 

이 책이 마음에 들었다면

한스 라트 그리고 신은 3부작 중 나머지 「악마도 때론 인간일 뿐이다」 - 「그리고 신은 내게 도와 달라고 말했다」

거장 도스토예프스키의 걸작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강력하게 추천드립니다.

 

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feat.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악마도 때론 인간일 뿐이다 - 한스 라트(feat. 단테 - 신곡「지옥편」)

그리고 신은 내게 도와 달라고 말했다 - 한스 라트(그리고 신은 시리즈의 마지막)

 

또한 인간세상에 내려온 신이라는 이 구도가 매우 흥미진진하게 느껴진다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도 추천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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