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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철학종교

죽음에 이르는 병(Sygdommen Til Doden), 키에르케고르

by Caferoman 2021. 9. 20.

괜찮아, 죽을 병 아니야 (그렇다면 죽을병은 무엇인가?)

"주여 아무런 쓸모 없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하시고,당신의 모든 진리에 대해서는우리의 눈을 맑게 하옵소서!"

 

이 책은 성서에 나오는 "나사로의 죽음"을 모티브로 쓰여진 책입니다.

예수께서 죽어서 썩은내가 풀풀나는 나사로를 보고 "괜찮아 저거 죽을 병 아니야"라고 말하는 구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그럼 도대체 당신이 말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은 뭐란말이오?"

 

라는 질문에서 출발하는 책입니다.

 

이 글의 제목으로 알 수 있듯이 절망이란 것은 이 책 전체를 통해 병이라고 해석되고 있지, 약으로서 해석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나는 여기서 분명히 해두고 싶다. 즉, 절망은 그만큼 변증법적으로 명증하다. 동시에 또 그리스도교의 말로서도 죽음이라는 것은 최대의 정신적 비참함을 뜻한다. 하지만 구원은 죽는 것 안에, 적 서서히 죽어가는 것 안에 존재한다.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저자는 어떠한 심정과 태도로 이 책을 썼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키르케고르 읽기 - 세창출판사"의 설명과 같이 그는 저서를 통해 자기 자신의 내면을 그대로 비추었던 철학자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사랑도, 명예도, 삶과 죽음까지도 초탈하여 죽음 직전까지 자신이 주장하는 바와 일치하는 삶을 살기에 투철했던 철학자였습니다. 그는 실존주의 철학자로 분류되며 ‘자신의 사상과 자신의 삶이 일치를 이루는 것’에서 저자만의 실존주의를 확립했습니다.

 

실존주의자는 단순히 이러한 ‘대의를 위한 희생’이나 ‘지행합일’의 덕목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실존주의는 무엇보다 한 개별자로서 자기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을 우선적으로 절대적인 관심으로 파고드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한 개인에게 절대적으로 진실한 것은 다른 모든 이에게도 진실하다는 일종의 인간성으로서의 보편성을 인정한다. - 키르케고르 읽기, 이명곤

 

그는 저서 공포와 전율에서 스스로를 “나에게는 믿음을 가질 용기가 결핍되어 있다”라고 평가하며 자신은 진정한 크리스천이 될 수 없다고 말했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진지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여기서 그의 진지함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 유명한 "신 앞에 선 단독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홀로 서는 이 인간은 열심히 노력하고, 철저하게 책임지면서 오직 홀로 섬으로써 특정한 단독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 죽음에 이르는 병, 14쪽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다. 반면 인간의 불행이란 무엇이며 무엇이었으며, 또 무엇일 것인가? 악마가 지어낸 말인 ‘적당히’라는 말이, 이것이 일단 그리스도교에 적용되면 그리스도교가 군소리로 둔갑한다!  - 순간, 16쪽

 

키에르케고르가 바라본 권태

권태―인간에게 열정 없이, 일도 없이, 기분전환도 없이, 열의도 없이, 완전한 휴식 중에 있는 것보다도 더 참기 힘든 것은 없다. 이렇게 된다면, 그는 아무것도 아님을, 포기를, 부족함을, 의존성을, 무기력함을, 공허를 느끼게 된다. 비록 의식하지는 못하겠지만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권태와 우울함과 슬픔과 눈물과 후회와 절망이 튀어나올 것이다. _Pensées, p.85

파스칼의 권태에 대한 언급처럼 키에르케고르 역시 인간의 실존적인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이 권태로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을 한다고 해서 권태가 폐기되는 것은 아니다. … 비록 그들 자신은 권태를 느끼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그들이 권태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진정한 관념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지, 그들이 권태를 극복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 모든 인간은 권태로워하고 있다. _이것이냐 저것이냐, 478쪽

 

신들은 권태로워져서 인간을 창조하였다. 아담은 홀로 있었기 때문에 권태로워졌다. 그래서 이브가 창조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권태는 세상에 들어왔고, 인구의 증가에 정비례해서 권태도 늘어만 갔다. _관점, 471쪽

 

이러한 실존에 대한 권태는 종교적인 의미로 ‘실존적 권태’에 대한 회피가 더 이상 ‘신을 추구하지 않는 상황’, 즉 더 이상 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신을 추구하지 않는 상황 그 자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신’이라는 존재가 삶에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는 상황이 가장 심각한 종교적인 죄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실존의 권태는 진정으로 ‘실존적이고자’ 하는 의지에 의해 극복될 수 있으며 이런 의지는 점진적으로 실존의 단계를 상승시키며, 이것이 곧 ‘실존의 질적인 도약’으로 '심미적 실존 > 윤리적 실존 > 종교적 실존' 단계로 도약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에 있어서 권태를 극복한다는 것, 이것이 곧 실존의 의미이며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이자 나아가 신에게로 나아가는 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권태의 극복 = 실존하기 = 자신이 됨 = 신에게로 나아감

이 네개의 명제는 동의어로 볼 수 있습니다.

 

심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그리고 종교적 실존

아주 작은 현실의 일들에서 절대적인 삶의 의미로 다가갈 수 있다면 바로 거기에서 ‘절대자’와 마주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가 가진 신앙의 의미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실존의 지평들은 크게 심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으로 구분되며, 실존의 권태에 대한 자각은 본질적으로 종교적 실존의 단계만 가능함을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실존의 단계는 마치 정상을 오르는 계단처럼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취하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단계에서 다른 하나의 단계로 나아가면서 존재함의 의미가 확대되는 개념으로 보고 있습니다.

 

심미적 실존

‘심미적’이라는 것은 ‘감각적인 것’으로 특히 감각적 혹은 감성적 차원에서 ‘미적인 것’, 즉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것과 관계되는 것을 말합니다. 심미적 실존의 의의를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 심미적 실존의 삶 그 자체가 인간에게 무한한 기쁨을 줄 수 있다는 점 :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봉착하는 현실의 다양한 권태, 무의미, 환멸, 분노, 절망감, 공허 등에서 의미와 충만감을 회복하고 순수한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곧 ‘심미적인 실존’ 혹은 ‘미학적 실존’을 가집니다.

- 심미적 실존에서의 삶은 다른 실존의 차원으로 나아가는 ‘관문’과도 같으며 또한 ‘지참금’과도 같다는 점 : 누구도 심미적 실존에서 충만하게 실존적이지 못하다면 윤리적 실존과 종교적 실존의 삶으로 제대로 도약할 수 없습니다.

 

윤리적 실존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윤리적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행복이라고 생각하였고,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윤리를 보다 큰 행복을 위해 필요한 무엇으로 고려하였다. 파스칼도 『팡세』에서 인간을 본질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처럼 고려한다. 따라서 우리는 윤리적 혹은 도덕적으로 되는 게 힘들더라도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 윤리적 실존이란 진정한 자기 자신을 추구하기 위한 내적인 삶을 가지는 것 자체를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속하는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것을 말하며 이는 선과 악이라는 의로움의 문제와 긴밀히 관련되어 있음을 "키르케고르 읽기"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키르케고르에게 윤리적 실존의 가장 깊은 의미는 ‘진정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내적이고 존재론적인 문제, 즉 자기 동일성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자기에 대해 절망한다는 것, 절망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 이것이 모든 절망을 위한 공식이다. … 절망은 절망에 빠진 사람인 자기를 먹어치울 수 없다는 것에서, 그것이 곧 절망에 있어서의 모순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에서 인간 안에 영원한 것이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 그러한 것이 절망의 본질이며, 자기에게 있어서의 병인 이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_죽음에 이르는 병, 34-35쪽

 

절망의 세가지 유형 : 모른다, 알아서 그렇다, 알고도 그렇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의 유형을 세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1. 자기가 절망하고 있는걸 모르는 절망 또는 자신이 영원한 자기를 가지고 있음을 모르는 절망
  2. 자기가 절망하고 있단걸 알지만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길 원하지 않음 : 취약함의 절망
  3. 자기가 절망하고 있단걸 알지만 절망하고 자기 자신이고자 함 : 반항


첫 번째 절망은 대다수 현대인의 삶에서 볼 수 있으며 인간이 영원성과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근본적인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모든 경우에 해당한다고 정의합니다. 이는 유물론적 혹은 무신론적인 사상이 지닌 근원적인 특성으로 인간에게 어떤 영원과의 관계성 혹은 신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고 판단하는 유물론적인 사유에서는 인간은 결코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없으며, 이러한 것을 갈망할 수 없음에 대한 절망이 도사리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유물론자의 관점에서 이상,이데아,선,정의는 모두 인간이 고안한 것으로 이러한 관념은 인간의 무지 혹은 나약함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생각하며, 진실은 오직 물질과 신경의 조합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유물론자의 심리 깊은 곳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란 결코 이러한 ‘이상적인 것’, ‘이데아적인 것’, ‘선한 것’ 혹은 ‘의로운 것’에는 도달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절망이 존재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절망은 첫 번째 절망보다 더 심각한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정신의 병,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인간이 무엇이며 어떤 존재로 되어야 하는가를 알고 있지만, 그 어떤 이유로 이러한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고 판단하거나 이러한 진리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이러한 진리를 추구할 때매력적인 세속의 가치들을 포기할 수 없어 실존 추구를 포기하게 되며, 따라서 의지적으로 ‘허상’의 자신을 추구하게 되는 경우라고 보고 있습니다. 일체의 신적인 것을 제거하고 오직 인간 스스로가 작은 신이 되고자 하는 이러한 것은 가장 심각한 정도의 ‘절망’이라고 보고 있으며 이러한 절망을 최초로 감행하였던 존재는 신과 동등한 존재가 되고자 자신의 직분을 이탈한 대천사 ‘루시퍼’가 그 예입니다.

 

첫 번째 절망이 ‘무지’나 ‘무의식’에 의한 것이라면, 두 번째, 세 번째 절망은 ‘의식적’이며, ‘의지적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철학사에서 예를 든다면, ‘초인이 되고자’ 한 니체나, 인간을 ‘자유’라고 선언한 사르트르나 푸코 등이 이 두 번째 절망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절망은 앞선 두 가지 절망이 결코 인간에게 구원이나 행복을 줄 수 없다는 자각에서 발생하는, 그리하여 인간의 모든 노력이 결국 ‘진정한 의미 있는 삶’이나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절망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진정한 인간의 위치나 처지를 자각하고 순수하게 절대자 앞에 나서는 개인(단독자)의 겸손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절망할 수 있기에 위대하다.

인간은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온 자연을 통틀어 가장 연약한 존재다. 하지만 생각하는 갈대다.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데서 시작한다. 비참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비참하지만, 비참하다는 점을 안다는 데 위대함이 있다.
- 팡세, 블레즈 파스칼
이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이 동물보다 우수하다는 장점이다. 이 병에 주의하고 있다는 것이 기독교인들이 자연 그대로의 인간보다 뛰어나다는 장점이다. 이 병에서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인들에게는 지극한 축복이다. _죽음에 이르는 병, 25쪽

 

앞선 시대의 철학자 파스칼이 팡세에서 말한것과 마찬가지로 키에르케고르 역시 인간은 스스로의 비참함을 알고 절망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위대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키르케고르가 보여준 종교적 실존

첫째 :  인간은 근원적으로 ‘신성 혹은 절대’, ‘무한 혹은 영원성’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며, 이는 확실성으로서가 아니라 다만 가능성으로서만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인간은 이를 현실성으로 가지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 부정(초월)을 감행하여야 한다

둘째 : 이러한 사실을 긍정하고 이를 실천적으로 추구하는 ‘믿음의 실재’와 ‘믿음에 대한 일체의 사변적인 사유’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이는 ‘신의 실재’나 종교적 실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며 신의 신비는 우리들의 모든 합리적인 설명을 넘어서며, 진정으로 종교적인 한 개인의 삶은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삶의 형식을 넘어서고 있다.


인간이 가진 최고의 정열로서 그리고 역설로서의 믿음

믿음이란 사유가 끝나는 곳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_공포와 전율, 107쪽
믿음이란, … 개별자가 개별자로서 절대자에 대하여 절대적인 관계에 선다는 역설이다. _공포와 전율, 112쪽
절대적 본질에 대한 이 순수한 의식은 나 자신에게도 낮선 의식으로 변하였다. … 이와 함께 믿음은 본질에 대한 순수한 의식이다. 다시 말해서 단순한 내적인 것, 따라서 사유이며, 직접적인 것이다. ―믿음의 본성 안에서 원리적인 계기, 무시된 습관인 계기― 이 직접적인 것과 더불어 믿음의 본질은 다음과 같이 형성된다: 그의 대상은 본질이다. 즉, 순수한 사유이다. 그런데 자기의식의 속으로 들어가는 사유로서의 이 직접성은 자기의식의 저편에 거주하면서 개관적인 존재의 의미를 수용한다. 사유의 순수함의 직접성과 단순성을 수용하는 이 의미로부터 믿음의 본질은 자기의식에 대해서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인 초-감각적인 세계가 되면서 재현(la représentation) 안에서 사유의 바깥으로 다시 밀려난다. - 헤겔 『정신현상학』 p.95


관념론이라는 그 이름 자체가 이미 예고하듯 위에서 언급된 헤겔의 철학은 최상의 실재로서의 존재가 ‘관념적인 것’임을 부정할 수 없으며, 따라서 만일 ‘믿음’이라는 것이 인간실존의 최상의 것을 의미한다면 모든 개개인에게 보편적인 어떤 ‘이데아적인 것’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종교는 모든 인간을 위한 진리라는 것이다”라고 결론 내리고 있습니다. 최상의 존재가 ‘보편적’ 혹은 ‘일반적’이라는 점, 종교라는 것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라는 점이 관념론적인 시각의 특징으로 볼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념론에 비교해 보았을 때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핵심을 보다 명확히 이해할 수 있는데, 믿음의 실재를 제거하고 보편적인 이해체계로서의 종교를 인식하는 헤겔철학과 달리 믿음의 정신이 혹은 개별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이 ‘모순관계’에 있지 않다는 점이 키르케고르의 철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곧 개별자가 보편적인 것보다도 높은 곳에 있다는 역설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일은 이 운동은 반복되는 것이고, 따라서 개별자가 처음에 보편적인 것 안에 있다가 후에 와서는 보편적인 것보다도 높은 곳에 있는 개별자로서 고립된다고 하는 역설이다. _공포와 전율, 110쪽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절대자 앞에 홀로 선다는 것"임을 저자는 다시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에 이르는 병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교적으로 이해할 때 죽음은 오히려 그 자체가 삶으로의 과정이다. … 죽음이 최대의 위험일 때는 사람은 간절히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더 큰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은 죽음을 바라게 된다. 위험이 너무나 커서 죽음이 희망이 될 정도로 클 때, 그때 절망은 죽을 수조차도 없다는 무력함이다. 이 최후의 의미에 있어서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_죽음에 이르는 병, 29쪽


이 책은 읽는 내내 그래서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무엇일까?를 묻게됩니다. 저자는 자신의 영혼을 상실하는 것이 죽음보다 더 심각한 일이라고 말하며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적인 시각으로 이 책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즉, 죽음보다 큰 위험이란 ‘영적인 생명’을 상실할 위험이며 ‘의미 있는 삶’을 상실할 위험을 의미합니다.


기독교인이 배운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죽음에 이르는 병, 20쪽)
“이처럼 인간은 권태의 어떠한 이유도 가지지 않으면서도 권태롭게 될 만큼 그 본성의 고유한 상태로 인하여 매우 불행한 존재이다” - 팡세, 파스칼, p.89
만일 인간이 가령 병으로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망으로 죽는 것이 가능하다면 인간 속에 있는 영원한 것, 즉 자기는 육체가 병으로 죽는 것과 같은 뜻으로 죽을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절망의 죽음은 계속적으로 삶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절망에 빠진 사람은 죽을 수가 없다. _죽음에 이르는 병, 30쪽

 

진정한 삶이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다.

키에르케고르는 진정한 실재로서의 삶이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다고 말합니다.이는 사후에 맞이하게 될 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죽음에 대한 생각이 현재에 있어서 영원성을 선취하게 하는 것으로 그에게 진정한 현재성은 곧 영원성과 맞닿아 있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즉, ‘지금 현재’에 천국을 앞당겨 살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순교가 단지 죽임을 당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에 있다고 한다면 키르케고르는 진정한 순교자라고 할 수 있다. ‘때가 찼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것을 말해준다. 그는 끝까지 세상에서 ‘권태의 극단’을 인내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종교적 천재의 ‘견디어 냄’이 끝나는 그 순간이 ‘때가 찬’ 그때이다. 죽음이 자신을 이 세상에서 물러나게 할 때까지 묵묵히 사랑으로써 견디어낸다는 것, 그리고 비로소 죽음이 자신을 영원성으로 나아가게 할 때, 그 순간이 바로 ‘때가 찬’ 그때인 것이다. - 키르케고르 읽기, 이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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