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의 위기, 한병철
한줄 서평
스토리텔링이 아닌 스토리셀링이 지배하는 오늘날, 정보의 쓰나미와 업데이트의 강박 속에서 이야기를 상실한 우리는 미래를 희망하는 법, 자신의 역사 속에서 존재하는 법을 상실하게 되었다. 나와 공동체의 정치적 행위에는 각 개인의 서사적 응집성을 전제로 한다. 시간과 주의를 파편화하고 머무름을 허용하지 않는 정보의 디지털화로 우리의 서사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우리는 자극적이고 파편화된 정보의 홍수 속에서 관조하고 머무르는 법을 잊어버렸다. 우리는 업데이트 강박에 시달리며 지식보다는 정보에, 공동체보다는 커뮤니티에, 공감보다는 정보 교환에 집착하는 삶의 양상을 보인다.
스토리텔링은 ‘스토리셀링Storyselling’이라는 자본주의의 달콤한 무기가 되어 마치 의미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유혹한다. 세상으로부터 충격받고 저항하고 간극을 느끼며 자신만의 철학을 쌓아올릴 기회를 빼앗고 그저 ‘좋아요’를 외치게 만든다.
우리 삶은 원래 세상을 변화시킬 힘이 있는 이야기였다.
“우리 독자들은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혁명보다 파리 라틴 숙소에서 일어난 지붕 화재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
-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를 창간한 이폴리트 드 빌메상
정보와 지식의 가장 큰 차이는 정보는 그것이 새로운 동안에만 가치 있어 그 순간에만 유효하다. 반면 지식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시간적 폭이 있다. 그런 지식 안에는 서사적 진폭이 내재해 있다.
신자유주의와 맞물려 정보체제가 자리 잡는 과정에서 이들은 우리에게 침묵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속적으로 우리의 의견, 필요, 선호를 소통하라고, 삶을 서술하라고, 게시하라고, 공유하라고, 링크로 걸라고 요구한다. 자유가 결국 통제와 제어로 전복되는 것이다. 공유하고, 링크를 거는 동안 우리는 스스로를 지배의 흐름에 예속시킨다.
미래와 진보의 서사를 가지고 다른 삶의 형식을 향한 갈망을 품었던 근대와 달리, 후기 근대는 새로운 것 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에 해당하는 혁명적 파토스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후기 근대에는 출발 직전의 분위기가 없다. ‘계속 그렇게 하기’와 대안 상실로 힘이 빠져 있다. 이야기할 용기, 세상을 바꾸는 서사를 향한 용기를 상실했다.
상업과 소비에 집중하는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은 사회를 변화시킬 힘이 없다. 후기 근대는 아우라가 없는 상태, 즉 미래가 없는 상태다. ‘업데이트 강박’은 과거는 더 이상 현재에 유효하지 않고 미래는 최신의 것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며 그 폭이 좁아진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가 없는 채로 존재하게 된다.
서사만이 희망하게 함으로써 미래를 열어준다.
정보는 놀라움의 자극으로 생명을 유지한다. 정보는 시간을 파편화한다. 주의도 파편화한다. 정보는 머무름을 허용하지 않는다. 가속화된 정보 교류 속에서 정보는 또 다른 정보를 사냥한다. 오로지 순간만이 중요하다. 현실이 스냅으로 쪼개진다. 이로 인해 우리는 안정적으로 시간적 정박을 이룬 곳에서 떨어져 나온다.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같은 디지털 플랫폼의 ‘스토리’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들은 어떠한 서사적 길이도 보이지 않는다. 일련의 순간 포착일 뿐이며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실상 이들은 빠르게 사라지는 시각적 정보에 불과하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커져가는 접촉의 빈곤은 우리를 병들게 한다. 우리에게서 접촉이 완전히 없어지면 우리는 스스로의 자아ego 속에 불치의 상태로 사로잡힌 채 잔류할 것이다. 접촉은 우리를 자아 안에서 밖으로 꺼내준다. 접촉의 빈곤은 결국 세계 빈곤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우리를 우울하고, 외롭고, 불안하게 만든다. 디지털화는 이러한 접촉의 결핍과 세계 빈곤을 계속해서 악화시킨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고립시키는 것은 늘어가는 연결성이다. 여기에 바로 파멸적인 네트워킹의 변증법이 존재한다. 네크워킹되어 있다Vernetztsein는 것은 연결되어 있다Verbundensein는 뜻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과도하게 소통한다. 우리는 게시하고,공유하고,링크를 건다. 집단적 의식 내용을 허용하던 이전의 ‘의례적인 관조’는 소통과 정보의 도취에 자리를 내주었다. 소통 소음은 마을 주민들이 하나의 이야기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뭉치게 해준 ‘노래’를 완전히 침묵하게 만들었다. 이 소통 없는 공동체는 공동체 없는 소통에 길을 내준다.
삶은 이야기다. 이야기에는 새 시작의 힘이 있다. 스토리셀링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소비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야기,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지각과 현실에는 눈멀게 한다. 바로 여기에 스토리 중독 시대 서사의 위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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