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를 읽으면서 "이 책이 영어 혹은 라틴어 계열의 언어로 온전히 번역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설국의 첫문장 "国境の長いトンネルを抜けると雪國であった."가 떠올랐는데, 주어의 생략이 가능한 일본어, 국어와는 달리 영어의 경우 반드시 한 문장에서 주어를 명시 해주어야 한다. 심지어 스페인어의 경우 동사에서도 그 주어의 성/수가 드러나게 되니 주어 없이 이루어진 문장을 번역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본래의 맛을 살리기가 어렵다. 그렇기에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로 번역된 설국의 유명한 첫 문장이 영어로는 "The train came out of the long border tunnel into the snow country." 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택시 라디오에서는 FM방송의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곡은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 정체에 말려든 택시 안에서 듣기에 어울리는 음악이랄 수는 없었다. 운전기사도 딱히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중년의 운전기사는 마치 뱃머리에 서서 불길한 물때를 읽어내는 노련한 어부처럼 앞쪽에 끊임없이 늘어선 자동차 행렬을 입을 꾹 다물고 바라보고 있었다. 아오마메는 뒷좌석 깊숙이 몸을 묻고 가볍게 눈을 감은 채 음악을 들었다.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 첫부분을 듣고 이건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라고 알아맞힐 사람이 세상에 과연 얼마나 될까. 아마 '아주 적다'와 '거의 없다'의 중간쯤이 아닐까. 하지만 아오마메는 왠지 그걸 맞힐 수 있었다.
-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서장
1Q84의 서장은 목적지를 향해 가는 택시 안에서 흐르는 익숙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그 음악을 둘러싼 기사와 승객 사이의 대화에서 시작한다.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택시를 타고 가는 클래식에 정통한 승객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소설이 시작되고 난 뒤 한참 뒤에 깨닳게 된다. 그 사이에 독자는 클래식 자신이 가진 선입견에 의해 음악에 정통한 승객이 당연히 남자일 거라 상상하며 소설을 읽게 된다.(물론 나 역시 그랬다.) 그러다가 보란듯이 그 승객이 택시에 내려 걸어가기로 결심한 순간 드러나는 여성의 옷차림에서 소설을 읽으면서 그린 풍경이 와르르 무너지게 된다.
영어나, 스페인어로 이 소설을 접했다면 이와 같은 반전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첫문장에서 등장하는 She 혹은 Ella를 통해서 그 승객이 여성임을 인지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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