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편의점 점원들, 손님들의 시선에서 바라본 세상
이 소설은 어느 편의점 주인의 시점에서 시작해서 그 주변인물들로 시점을 옮겨가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으로 쓰여졌습니다. 결국 주요 등장인물들 모두가 각각 한 챕터 챕터의 주인공이 되는 셈이죠. 흥미진진한 구성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 탓에 책을 펼치자 마자 그 자리에서 2시간만에 다 읽어버렸네요. 주제도 그렇고 작가의 문체도 그렇고 어렵거나 막히는 부분 없이 술술 읽히는 책입니다.
편의점이란 사람들이 수시로 오가는 곳이고 손님이나 점원이나 예외 없이 머물다 가는 공간이란 걸, 물건이든 돈이든 충전을 하고 떠나는 인간들의 주유소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주유소에서 나는 기름만 넣은 것이 아니라 아예 차를 고쳤다. 고쳤으면 떠나야지. 다시 길을 가야지. 그녀가 그렇게 내게 말하는 듯했다.
이 책은 우리 주변에 어디서나 있을 법한 편의점을 배경으로 하여 그 편의점에서 만날 수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생각, 삶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게 합니다.
엄청난 결말을 기대한다면 실망할수도
“그 작품 제목.” “음…… 편의점인데요, 아주 불편한…… 그래서…… 불편한 편의점.” 김 대표의 전화를 끊자마자 인경은 노트북 한글 프로그램을 열었다. 그러고는 빠르게 타이핑을 시작했다. 제목을 적고 두 칸 줄을 띈 뒤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를 새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쉬지 않고 타이핑을 했다. 어떤 글쓰기는 타이핑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이 오랜 시간 궁리하고 고민해왔다면, 그것에 대해 툭 건드리기만 해도 튀어나올 만큼 생각의 덩어리를 키웠다면, 이제 할 일은 타자수가 되어 열심히 자판을 누르는 게 작가의 남은 본분이다. 생각의 속도를 손가락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가 되면 당신은 잘하고 있는 것이다. 인경은 연기하듯 대사를 발음하며 동시에 타이핑을 했다. 그녀의 왼손과 오른손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그녀는 그동안 봉인됐던 필력이 풀린 듯 쉼 없이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저녁에 시작된 작업은 어느덧 자정을 넘겼고, 겨울 밤하늘의 어둠이 짙어질수록 그녀의 글도 밀도를 더해갔다. 그 새벽, 동네에 유일하게 불이 켜진 곳은 독고 씨의 편의점과 그녀의 작업실뿐이었다.
이 소설의 조금 아쉬운 점은 인물별 시점을 전환하며 치밀하게 쓰여진 인물관계 및 구성에 비해 다소 급작스럽고 서둘러서 마무리한 듯한 결말입니다. "우연히 기억을 잃은 노숙인을 알게 되어 그를 편의점 종업원으로 고용하면서 생긴 일"이라는 소재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결말이 이것이 최선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나는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절대 지치지 않는 그녀의 에너지가 부러웠다. 그래서 물었다. 대체 당신을 지탱하는 힘은 무엇이냐고? 그녀가 말했다. 인생은 원래 문제 해결의 연속이니까요. 그리고 어차피 풀어야 할 문제라면, 그나마 괜찮은 문제를 고르려고 노력할 따름이고요.
책의 결말에 집중하기 보다 그 속에서 등장하는 한사람 한사람의 소소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기분으로 읽는 것이 이 책을 을 읽는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마주친 편의점 점원은 어떤 사람일까?' , '방금 옥수수 수염차를 사들고 나간 손님은 어떤 삶을 살아 왔을까?' 와 같은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해주는 요즘같이 추운 겨울에 읽기 좋은 책이었습니다.
기차가 한강철교에 올랐다. 오전 햇살이 물의 표면에 반사되어 생동감 넘치게 빛나고 있었다. 노숙자로 자리 잡은 뒤론 서울역과 그 주변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사실 딱 한 번 한강에 간 적이 있었다. 다리에 올라 몸을 던지려 했다. 실패했다. 사실 올겨울을 편의점에서 보내고 나면 마포대교 혹은 원효대교에서 뛰어내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 강은 빠지는 곳이 아니라 건너가는 곳임을. 다리는 건너는 곳이지 뛰어내리는 곳이 아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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