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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설에세이

소설 속 유토피아는 정말 실현 가능할까 : 유토피아 - 토머스 모어

by Caferoman 2022. 1. 12.

유토피아 - 토머스 모어 저, 전경자 역

어디에도 없는 세상 : 유토피아

이 책의 제목이자 주제인 유토피아(utopia)는 영국의 사상가 토머스 모어가 1516년에 만들어낸 말로, 처음에 라틴어로 쓰인 그의 저작 《유토피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리스어의 ou(없다), topos(장소)를 조합한 말로서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요.

 

주된 관심사가 철학이기 때문에 라틴어보다는 그리스어에 집중하고 있지요. 세네카나 키케로가 남긴 단편적인 글을 제외하면 철학에 있어서 라틴어로 기술된 것은 중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저 사람 생각이랍니다.

 

이 소설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법한 이상적인 세상을 묘사하며 역으로 어디에나 존재하는 현실적인 세상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나름 고급진 돌려까기라고 할수 있습니다.

 

우선 대부분의 왕들은 평화를 도모하는 훌륭한 방법보다는, 나로서는 능력도 없고 관심도 없는 전쟁술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왕들이란 자기들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영토를 잘 통치하는 일보다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새로운 영토를 손에 넣는 일에 고심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왕의 고문들은 모두 대단히 영리해서 다른 사람의 학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적어도 당사자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소설을 통해서 우리는 16세기 당시 절대왕정의 무능함과 불의함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우려사항들을 잘 짚어내고 있습니다.

 

완전히 부적절한 소리를 해서 연극을 희비극으로 만드는 것보다는 차라리 대사가 없는 역을 맡는 것이 낫지 않을 않을까요? 당신이 연극과 무관한 대사를 첨가한다면 비록 그것이 원작보다 낫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그 연극을 왜곡하고 망쳐 놓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진행 중인 연극의 흐름에 맞추어 최선을 다해야지, 다른 연극이 낫겠다는 당신 생각만으로 공연 중인 연극을 망쳐서는 안 됩니다.

 

아직 오지 않은 나라를 향한 희망

저자인 토마스 모어는 이 소설을 통해 무작정 비판하고 비관된 태도에 그치지 않고 더 좋은 세상을 향한 희망을 붙잡고 있음이 구절구절에서 발견됩니다.

 

이 나라의 국왕 자문 위원회에서는 바로 그런 식으로 일들이 처리되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쁜 아이디어를 뿌리째 뽑지 못하고 오래 지속되어 온 악폐를 완전히 치유할 수 없다고 해서 이 나라를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풍향을 조절할 수 없다고 해서 폭풍 속에서 배를 저버리지는 마십시오. 그리고 당신과는 다른 방향으로 생각이 굳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면서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의 낯선 아이디어를 오만하게 강요하지 마십시오. 정책에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상황은 요령 있게 처리하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하며, 좋게 만들 수 없는 것은 가능한 한 최소로 나쁘게 만들도록 힘써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 한 모든 제도를 좋은 제도로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그리고 모든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는 날이 그리 빠른 시일 내에 오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또한 자본주의가 인정하는 사유재산과 이를 통한 부의 양극화가 해결되지 않는한 진정한 유토피아란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사유 재산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공정하고 올바른 재화의 분배는 있을 수 없으며 국민이 행복하게 살도록 통치하는 국가도 있을 수 없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사유 재산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 수많은 국민이, 그것도 가장 선량한 국민들이, 근심과 걱정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압박을 받습니다.

 

유토피아는 어떤 곳인가?

이 나라 헌정(憲政)의 주요 목적은, 모든 시민은 육체노동에 투여하는 시간과 정력을 가능한 한 아끼어 이 시간과 정력을 자유와 정신의 문화를 누리는 데 쓸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들의 생각으로는 삶의 진정한 행복입니다.

 

저자가 묘사하는 유토피아는 사유재산도 없고 굶주린 이도 실업자도 없는 말 그대로 이상적인 사회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환경속에 누리게되는 물질적 시간적 여유를 통해 풍요로운 문화생활을 누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종류의 즐거움 중에서 유토피아인들은 주로 정신적 즐거움을 추구하며 이것을 가장 높이 평가하는데, 그 까닭은 대부분의 정신적 즐거움은 덕의 실천과 선한 삶을 인식하는 것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육체적 즐거움 중에서는 건강을 최고로 여깁니다. 먹고 마시는 것에서 얻는 기쁨은 이러한 행위가 오로지 건강을 위해서일 때만 바람직한 육체적 즐거움으로 간주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 자체는 즐거움이 아니라 오로지 질병의 은밀한 공격을 이겨 내기 위한 수단입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병의 훌륭한 치유법을 얻기보다는 아예 병에 걸리지 않도록 할 것이며, 진통제를 구하기보다는 고통을 방지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치유법이나 진통제로 위안을 얻는 즐거움은 아예 필요하지 않은 것이 더 좋겠지요.

 

벗겨보고(?) 선택하는 배우자

유토피아에서 보여지는 결혼문화의 경우 배우자 선택에 있어 그 과정이 조금 독특합니다.

다소 선정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벗겨놓고 찬찬히 본다음 배우자로서의 적합성을 평가한다"는 점인데요, 하다못해 망아지 하나 살때도 꼼꼼히 살펴보고 사면서 평생 함께 할 배우자를 선택할 때에 면밀히 관찰해보지 않는다는 점은 모순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외모로만 그 배우자의 가치를 평가한다는 점은 이상적인 사회모델 치고는 조금 아쉬운 부분입니다.

 

결혼 상대를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 이 나라 사람들은 우리들이 보기에는 극도로 어리석고 어처구니없는 풍습을 엄숙하고도 진지하게 지킵니다. 책임감 있고 존경할 만한 나이 지긋한 여인이, (과부든 처녀든) 신부가 될 여자를 신랑이 될 남자에게 나체로 보여 줍니다. 마찬가지로 존경할 만한 나이 지긋한 남성이 신랑이 될 남자를 신부가 될 여자에게 나체로 보여 줍니다. 우리들은 이 풍습을 비웃으면서 어처구니없다고 했습니다만, 이 나라 사람들은 다른 나라 풍습의 어리석음에 어이없어하면서 놀라워했습니다. 망아지를 살 때, 사람들은 불과 얼마 안 되는 금액이 걸려 있는 일임에도 얼마나 의심이 많은지, 망아지야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는데도 혹시 안장이나 모포 밑에 상처라도 있을까 봐 안장과 모포를 들어내기 전에는 거래를 마무리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남은 생애 동안 즐거움이 아니면 역겨움의 원인이 될 배우자를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는 경솔하기 짝이 없습니다. 신체를 전부 옷으로 가려 놓고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겨우 손바닥만 한 얼굴로 한 여자의 매력을 추정합니다. 그러고 나서 만약 서로 상대방에게 혐오감을 주는 것이 있을 경우에는 평생 동안 서로를 증오하면서 살아야 하는 크나큰 위험을 안고서 결혼을 합니다. 모든 사람이 오로지 상대방의 성품 하나에만 관심을 가질 정도로 현명한 것은 아니며, 실은 현명한 사람조차도 좋은 성품에 곁들여진 육체적 아름다움을 좋아합니다. 헤어지기에는 이미 늦은 시점에서 아내의 벗은 몸에서 아내를 몹시 싫어할 만큼 심각한 결함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물론 있겠지요. 이러한 결함을 결혼 후에야 발견하게 된다면 각자 자기 운명을 참고 견디어야만 하므로, 유토피아인들은 모든 사람이 사전에 법으로 이에서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성범죄만큼이나 성범죄 유도행위에 대한 처벌이 강한 유토피아는 최소한 미투를 할만한 일이나 무고한 미투에 의한 억울함은 없겠네요.

 

여자를 유혹하려고 시도한 남자는 실제로 유혹한 것과 동일한 처벌을 받습니다. 시도한 범죄는 실행된 범죄와 다름없이 나쁜 것이며, 범죄의 실패가 범죄를 성공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한 범죄자에게 유리한 점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유토피아인들의 생각입니다.

 

종교의 자유

또한 유토피아는 종교에 있어서도 제약과 강압이 없는 사회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말 그대로 "더 바람직한 종교가 결국 살아남지 않겠나?"라는 적자생존의 논리를 종교에 부여하고 있습니다.

 

유토푸스 왕이 이러한 법령을 제정한 까닭은 끊임없는 싸움과 뿌리 깊은 증오로 인하여 파괴될 위험에 처해 있는 평화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종교 자체를 위해서이기도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이 다양한 형태로 당신을 숭배하는 것을 좋아하실 수 있고, 그리하여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숭배하는 것도 실은 당신의 의도일 수도 있다는 것이 유토푸스 왕의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는 종교 문제에 관해서는 결코 성급하게 독단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그가 확신하는 바는, 누구든지 위협이나 폭력을 사용하여 타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믿음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면 이는 오만한 치행(痴行)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생각은, 만약 어느 한 종교만이 진정으로 참된 종교이고 나머지 모든 종교들은 거짓 종교라면, 그렇다면 그 참된 종교는 그 자체의 자연스러운 힘으로 결국 승리하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물론 사람들이 이 문제를 무릇 이성적으로 온건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전제하에서입니다.

 

유토피아, 그리고 디스토피아

유토피아 만큼이나 우리에게 친숙한 용어는 바로 디스토피아입니다.

이상적이고 완전한 하지만 어디에도 없는 꿈과 같은 세상과 달리 불합리와 부조리가 가득한 암울한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 세상을 우리는 흔히 디스토피아라고, 그러한 세상을 묘사한 소설을 디스토피아 소설이라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 전후에는 대표적인 디스토피아 소설 "1984", "멋진 신세계"등을 함께 읽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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