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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글쓰기

믿고 보는 글쓰기 지침서 : 나는 말하듯이 쓴다, 강원국

by Caferoman 2022. 8. 18.

강원국 작가님의 글쓰기 책은 언제나 친절하고 술술 읽힌다 : 나는 말하듯이 쓴다, 강원국

글쓰기에 관련된 책 중 강원국 작가님의 글을 즐겨 읽는 편입니다. 대통령의 글쓰기로 처음 접하게 된 이분의 글은 뭔가 술술 읽히면서도 피부에 와닿는 조언들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다른 저서들을 찾아서 읽다 보니 밀리의 서재/리디 셀렉트에서 서비스 중인 해당 저자의 책은 모두 읽어 본 것 같네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의 글쓰기 실력이 그만큼 성장하지는 못했지만요.

 

결혼해서는 아내가 주로 묻는다.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아?” 순간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든다. 결혼기념일인지, 아내 생일인지, 아니면 처음 만난 날인지 생각하느라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런 질문도 난감하다. “나 뭐 달라진 것 없어?” 그게 그거 같은데 도대체 뭐가 바뀌었다고 묻는지 모르겠다. 때로는 “내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묻기도 한다. 내가 심령술사도 아니고 어떻게 알겠는가. 문득 이렇게 묻는 날도 있다. “처음 만났을 때 내 인상이 어땠어?” 좋았다고 하면 질문이 어려워진다. “어떻게 좋았는데?” 30년도 더 지난 일이다.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계속해서 묻는다. “나 없이 살 수 있어?” 없다고 하면 성의 없다고 나무란다. 마음속으로 성의 있게 답해본다. ‘살 수 있고말고. 당신 없이도 살아야지. 그럼 죽어?’

 

작가는 다소 지루하고 어려울 수 있는 "글쓰기"라는 주제를 학술적으로 가르치려 하지 않고 에세이처럼 삶의 단편들을 그려내며 알기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하듯 알려줍니다. (사실 글쓰기를 알려주는 책이 재미없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죠.)

 

몇 년 전 이스라엘에 갔는데, 질문하지 않는 학생은 선생님이 상담한단다. 왜 그러는지 물었더니, 그런 학생은 아예 모르거나 학습 의욕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학생에게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무엇이냐고 내게 되물었다. 전 세계 인구 중 0.2퍼센트도 안 되는 유대인이 노벨상을 25퍼센트 가까이 차지한 이유가 질문하고 토론하는 ‘하브루타 havruta’ 수업과 당돌하고 뻔뻔하게 묻는 ‘후츠파 chutzpah’ 정신에 있다고 한다.
글쓰기를 힘들어하는 이유도 질문을 주저하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글쓰기는 스스로 묻고 답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게 언제였지?’, ‘누구였더라?’, ‘이것에 관한 내 생각은 뭐지?’라고 자기 자신에게 물을 수 있으면 쓸 수 있다. 일기 한 편을 쓰려고 해도 물어야 한다. ‘오늘 내가 뭐 했지?’ 독후감이나 기행문도 물어야 쓸 수 있다. ‘이 책 내용이 뭐였지?’, ‘여행 가서 뭐 했지?’ 모든 글은 물음에서 시작된다. 묻지 않으면 쓸 수 없다. 결정적 질문이 글의 주제가 된다. 읽을 때도 물어야 한다.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질문이다. 사람은 묻는 만큼 생각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스스로 묻고 답하는 과정이다"라는 말은 책을 읽고 난 뒤 스스로 생각을 정리해보고 되물어보는 글을 쓰는 과정이 왜 필요한지를 말해줍니다. 결국은 스스로 묻고 답하는 과정이 있어야 글도 쓸 수 있는 것이고 반대로 글을 써야 자신의 생각을 묻고 답하며 정리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그저 잘 읽고 끝내기보다는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생각을 글로 정리해 보는 것이 진정 이 책을 제대로 읽고 난 이의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하여 이렇게 독서노트를 적어봅니다.

 

세상에는 ‘주목’ 잘하는 사람과 ‘관찰’ 잘하는 사람이 있다. 주목과 관찰은 무언가를 본다는 측면에서는 같다. 하지만 보는 대상이 다르다. 주목은 남이 보라거나, 봐야 하는 데를 보는 것이고, 관찰은 내가 보고 싶은 데를 보는 것이다.
관찰하는 사람은 두 갈래 길로 나아간다. 하나는 자신의 콘텐츠를 발견하는 길이다. 일과 관계 속에서 자신이 남보다 잘하는 것을 찾아 심취한다. 관심 있는 것을 찾아 관찰하다 보면 자기만의 관점이 만들어지는데, 이러한 관점이 자신의 콘텐츠가 된다. 다른 하나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탐험의 길이다. 부모님과 선생님은 이 길을 가려는 자식이나 제자를 걱정한다. “너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냐? 진득하게 한 우물을 파야지. 왜 그렇게 한 곳에 정착을 못 해?” 하지만 이런 모험과 방황, 유목이 이야기를 만든다. 자기만의 이야기다.

 

글을 잘 쓰기 위한 비법 중 하나로 저자는 주목보다 관찰을 잘하는 태도를 꼽고 있습니다. 봐야 하는 곳을 바라보는 주목이 아닌 내가 보고 싶은 곳을 바라보는 관찰을 통해서 나의 이야기가 나오고 나의 콘텐츠가 나온다는 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보다 적극적인 시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목은 내가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고 해야 하는 일이지만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가운데 관찰은 나 자신에게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으면 하기 어려운 일 이니까요.

 

이어서 저자는 글 잘 쓰기 위한 태도로 "공감 능력"을 꼽으며 글은 썼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독자의 반응으로 완성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글은 반응이 좋은 사람을 앞에 두고 말하는 것처럼 써야지 벽에 대고, 또는 무표정한 사람을 앞에 두고 말하는 것처럼 쓰지 말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메모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메모할 생각을 던져준 자신의 뇌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다. 그래야 또 던져줄 테니까. 다른 이유는 말하고 글 쓰는 데 사용하기 위해서다. 써먹지 않으면 뇌는 생각을 던져주지 않는다. 사용하지 않을 것을 힘들게 생각해서 던져줄 이유가 없다.

저자는 필요할 때를 위한 저장의 목적 외에 생각을 던져준 뇌에게 감사하고 이러한 뇌의 활동을 장려하는 관점에서 메모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수단으로써의 메모를 넘어 메모가 작가력 향상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은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개요를 짜는 것은 시간 낭비이기도 하다. 쓰다 보면 개요대로 써지지 않기 때문이다.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고, 더 좋은 생각이 나기도 하며, 자료가 없어 개요대로 쓰지 못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개요는 무용지물이 되고 시간만 허비한 꼴이 된다. 그런 점에서 미국 작가 Edgar Lawrence Doctorow의 말은 일리가 있다. “소설 쓰는 일은 밤에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과 같다. 차의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데까지만 보면서 목적지까지 가는 게 소설 쓰기다.”

 

일반적으로 확실한 목적과 방향을 가지는 글쓰기(책 출간, 연재물)에서 권장하는 방법과 달리 작가는 개요를 쓰는데에 너무 큰 에너지를 쏟지 말 것을 권장합니다. 이는 확실히 사람의 성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 방식인데요, 전체 숲의 윤곽을 잡은 뒤에 세세한 나무를 그리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는 우선 개요와 목차를 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지만 글 쓰는 이가 쓰고자 하는 글이 소설이나 에세이인 경우, 글쓴이의 성향이 계획보다는 즉흥적이고 융통성 있게 대응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라면 구태여 개요에 많은 시간을 쓸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아무튼 저자의 글쓰기 강의(책)는 언제나 많은 깨달음과 재미를 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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